BL(Boys’ Love)은 독특한 취향이다. 이토록 쉽게 폄하되는 동시에 거의 변명 되지 않는 취향을 찾아보기란 힘들 것이다. BL은 아름다운 남성들, 특히 소년들 간의 성애와 로맨스를 다루는 장르이며, 만화와 소설을 비롯하여 다양한 형태의 콘텐츠로 제작된다.
남성들의 성욕은 자연화되지만 여성들의 성욕은 낙인화되는 사회, 이성애는 공기처럼 비가시화되지만 여타의 섹슈얼리티는 ‘인권’이나 ‘음란’의 범주를 통과해 가시화되는 사회에서 여성과 비남성들은 다양한 욕구와 동기로 BL 텍스트를 은밀하게 생산하고 유통해 왔다.
그러나 폐쇄적인 커뮤니티, 인터넷 카페, 동인지 판매전 등을 중심으로 ‘음지’에서 향유되던 BL은 2010년 중반 웹툰과 웹소설 플랫폼을 중심으로 대중화되기 시작한다. 인기 웹소설은 이제 OTT 회사에서 드라마로 제작되어 공중파 프로그램에 소개되기에 이르렀다. 이와 같은 배경 속에서 BL을 읽는 할머니 캐릭터가 등장했다. 쓰루타니 가오리 작가의 만화 〈툇마루에서 모든 게 달라졌다〉(이하 〈툇마루〉)는 75세 서예 교실 선생님 이치노이 유키와 17세 여고생 사야마 우라라의 BL을 매개로 한 우정을 다룬다.
▲<그림1>〈툇마루에서 모든 게 달라졌다〉 Ⓒ 쓰루타니 가오리
BL 읽는 할머니와 에이지즘
더위를 식히기 위해 서점에 들른 유키는 만화 코너에서 ‘그림이 예쁜’ 책을 발견하고 젊은 시절 읽던 소녀만화를 떠올리며 구입한다. 이 구매는 서점 직원들을 잠깐 술렁이게 하는데, 유키가 구입한 책은 BL 만화였기 때문이다. 서점에서 일하는 우라라는 남몰래 BL을 좋아하고 있기에, 어떤 직원보다도 할머니가 신경 쓰인다. 교실이 떠나가도록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을 맘껏 이야기하는 또래들처럼,
우라라도 아끼는 작품에 관해 잔뜩 이야기하고픈 충동을 종종 느낀다. 하지만 우라라가 소장한 BL 만화 컬렉션은 우라라의 방에서조차 책꽂이에 당당히 꽂히지 못하고 박스에 담긴 채 안쪽 책장에 이중으로 숨겨져 있다. 그 책들은 어쩐지 부끄러운 취향이고, 남에게 이해받지 못하리라는 예감을 불러일으킨다.
▲<그림2>〈툇마루에서 모든 게 달라졌다〉 Ⓒ 쓰루타니 가오리
그렇다면 실상은 어떨까? 낮에 구입한 만화책, 〈너만 바라보고 싶어〉를 개봉한 유키의 눈앞에 남고생들의 풋풋한 사랑이 펼쳐진다. 유키는 의아해했다가, 놀랐다가, 키스 장면 앞에서 입을 막는다. 그리고 이튿날 곧장 다음 권을 산다. 서점에서 유키는 우라라에게 묻는다. “이런 책들이 유행인가요? 남자끼리 그….” 여기부터 여기까지 전부다 ‘그거’라는 우라라의 대답에 조금 놀라며, 유키는 말한다. “난 처음 읽었는데 (…) 응원하고 싶어진다우.” 마음을 졸이던 우라라는 유키의 대답에 안심한다. 두 사람은 서점에서 카페로 이동하고, 전화번호를 교환하며, 친구가 된다.
일본은 물론 한국에서도 화제를 불러일으킨 이 작품은 BL을 둘러싼 양가적인 상황을 보여준다. 우선 BL 향유층과 재현 폭의 확장이다. BL 장르의 역사가 축적되고 작가도 독자도 나이를 먹음에 따라 BL은 어린 여성들의 전유물이 아니게 되었다. 오늘날 BL은 미소년뿐만 아니라 중년과 노년을 성애화하고 로맨스의 주인공으로 만든다. BL 동인들은 ‘언젠간 졸업해야 할 취미’로 BL을 여기는 대신, 아끼는 회지를 내 무덤에 껴묻거리로 넣어달라 말한다.
반면, 이 작품의 화제성은 충분히 확장되지 못한 BL 문화의 경계를 드러냈기 때문에 획득된다. BL은 동성애를 피상적이나마 이해하고 성애와 순애에 관심을 가질 것으로 여겨지는 취향의 주체를 전제한다. BL을 좋아하게 된 75세의 여성이 낯선 풍경으로 다가온다면, 껴묻거리 농담을 하면서도 75세의 여성을 나의 미래 속에 배치하지 않기 때문이고, 또한 노인이 동성애를 이해하지 못하며 성애나 순애와는 무관한 존재라고 치부하기 때문이다.
1969년 로버트 버틀러는 이처럼 “노인, 노년, 그리고 나이 드는 것 자체를 대하는 편견에 찬 태도들의 조합”을 가리키기 위해 연령차별(에이지즘)이라는 용어를 고안한다. 노년학자들의 말을 빌자면 이는 우리 자신의 미래에 대한 편견이자 인간 존재의 보편적 조건과 연관된 차별이다. 〈툇마루〉는 개방적이고 활달하게 삶을 사는 노인은 이런 편견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것처럼 현실을 외면하지 않으며, 노년에 획득하게 될 안정적인 삶과 연륜을 찬양하는 방식으로 에이지즘이 타개될 수 있다고 말하지도 않는다. 유키는 QR코드를 보고 젊었을 때 남편과 하던 ‘매직아이’인 줄 알고 눈을 게슴츠레 뜨는 사람이며, 자신이 좋아하는 만화 〈너만 바라보고 싶어〉의 문법을 따라가지 못해 시간의 전환을 ‘그림체가 갑자기 변했다’고 의아해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것을 우라라는 설명해준다. 단지 설명해주고 이해하면 되는 일이다. 유키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그 가능성을 구역화하는 판단은 잇따르지 않는다. 유키와 만화 이야기를 나눌 수 있고 함께 동인 행사에 참여할 수 있음이 우라라는 즐겁다. 자신을 ‘할머니’로 지칭하는 유키의 곁을 더욱 고령의 여성이 수레에 의존하여 지나가자, 우라라는 뭉뚱그려질 수 없는 노인 사이의 다양함을 깨닫는다.
둘의 교제 장면을 본 우라라의 소꿉친구가 “저분, 너희 할머니야?”라고 묻자 우라라는 대답한다. “할머니 아니야.” 이 대답은 친할머니가 아니라거나, 할머니라고 부르기에는 유키가 충분히 젊다는 것을 뜻하기보다, 네가 쉽게 말한 ‘할머니’라는 단일 범주에 유키라는 친구를 넣지 않겠다는 의지처럼 읽힌다.
퀴어 시간성 속에서,
수치심을 다정함으로 변환하기
에이지즘은 무엇보다 이성애규범적인 선형적 시간성과 깊게 연관되어 있다. 성인됨, 결혼, 부모됨, 양육, 은퇴라는 사회적 의례 절차를 하나하나 통과해가는 일직선의 삶은 대부분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행복의 유일 서사로 통용된다. 생물학적・사회적 생산성의 절정에 20-40대가 존재한다면 그것의 전후에는 상승과 하강이 있을 것이라는 상상이 여기에 더해진다.
노년기는 선형적인 생애주기 속에서 물화된 인식 범주다. 이 선형적 시간성에 진입하지 못하거나 진입을 거부한 이들은 멈춰 있는 사람들, 고독한 사람들, 이상한 사람들, 즉 퀴어로 의미화된다. 퀴어 이론가 호세 에스테반 뮤뇨즈에 따르면, 이성애규범적 문화 속에서 과거와 미래는 퀴어에게 속하지 않은 것으로 여겨진다. 오직 퀴어들에게는 현재 간신히 생존하는 것만이 겨우 허락된 상상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노인은 종종 노인이라는 존재 자체로만 고정되면서 과거가 있었다는 사실이 잊히고, 또한 그 역시 여전히 열린 미래를 갖는다는 점도 망각된다. 〈툇마루〉는 유키에게 악의 없이 ‘마지막’에 웃는 사람은 머리숱이 많은 사람이라고 말하는 미용실 직원과, ‘마지막’까지 이 집에서 혼자 살거냐고 묻는 유키의 딸을 보여준다. 유키는 ‘마지막’이라는 단어를 쌉쌀한 초콜릿을 녹여 먹듯 곱씹는다.
퀴어들의 삶에 미래가 없다고 여겨지던 시대부터 BL은 그 어떤 텍스트보다 낙관적이고 반복적으로 퀴어의 삶을 살 만한 삶이자 가능한 선택으로 서사화 해 왔다. 우라라와 유키는 왜 소녀 만화도, 서예도 아닌 BL이라는 취향을 통해 서로를 만나고 있을까? 어째서 둘에게 BL은 그토록 재미있을까? 그것은 BL이 만들어 내는 퀴어한 시간성이 이들에게 머물 자리를 마련해주기 때문이며, BL의 중성적인 도상들이 다양한 정체성과 욕망들에 열려 있기 때문이다.
▲<그림3>〈툇마루에서 모든 게 달라졌다〉 Ⓒ 쓰루타니 가오리
새카만 머리가 늘 뻗쳐 있고, ‘토토로의 검은 곰팡이’, ‘강시’처럼 생겼다는 말을 듣기도 하는 뚱한 표정의 우라라는 예쁘고 매력적인 동기 여자애들을 자신 과 ‘다른 종족’이라고 느낀다. 〈너만 바라보고 싶어〉의 주인공들을 닮은 자신의 소꿉친구에게 우라라는 나름의 애정을 품고 있지만 이성애적 관계로 진입하길 바라지 않는 다. 다만 만화를 읽으며, 소꿉친구의 연애를 구경하며, 사랑은 무엇일까 궁금해할 따름이다. “가끔 내 시간만이 다른 사람보다 느리게 흐르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1권)는 우라라의 독백에는 ‘여자’가 되어가는 시간성으로부터 스스로가 지연되거나 이탈해 있다는 톰보이의 자각이 담겨 있다.
나아가 BL은 성차를 제거함으로써 관계성과 친밀성의 구축을 성 각본에서 벗어나 영점에서부터 제시한다. 다시 말해, 특정한 성애가 당연하거나 자연스럽지 않으며 의무도 아닌 것으로 여겨지는 세계 속에서, 그럼에도 사람은 어떻게 타인에게 이끌리고 그를 유혹하며 그와 관계를 지속해 나가는가를 BL은 탐색하 고, 가르쳐준다. 그리고 이런 실천들이야말로 사랑이라고 이야기하면서 보편을 거꾸로 구축해낸다. 퀴어한 시간성 속에서 만들어지는 사회성은 우라라에게 예컨대 이런 방식으로 깃든다.
관절에 통증을 느끼는 유키의 상태를 사소하게 치부하지 않고, 배려라는 명목으로 유키와의 행사 참여를 포기하지도 않고, 행사장까지의 거리를 혼자 미리 걸으며 가늠해보는 것. 유키의 참여가 어렵겠다고 판단했을 때, ‘부스 입장’이라 는 방법을 찾아내는 것. 그것을 위해 처음으로 자신의 회지를 서툴게나마 제작해 보는 것. 즉, 차이에도 불구하고 함께하는 방법을 발명해 내는 것. 그 과정을 통해 ‘나’라고 믿었던 사람과 다른 내가 되어가는 것. 유키와 더불어 작품 이야기를 나누고 캐릭터들을 사랑하는 동안, 우라라에게 BL은 수치심 어린 취향에서 다정함의 교본으로 변환된다.
“너와 있으면 나는 나 자신을 알게 돼. 나도 네게 그런 걸 주고 싶어”(5권)라 는 청자가 모호한 우라라의 독백은 BL의 세계와 우라라-유키의 세계를 공통으로 약분하는 다정함이자, 성애로 온전히 환원되지 않는 사랑이며, 지금 여기의 우리를 고정하는 정체성에서 벗어나, 나아가는 느낌, 변화하는 느낌의 표현이다. 차별과 폭력이 지양된, 우리가 상상해야 하는 유토피아는 바로 이 느낌과 함께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