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누군가가 내게 고등학생 아이가 한국사 공부를 잘하게 읽으면 좋은 책을 소개해달라고 한 적이 있었다. 나는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좋을 것이라고 했는데, 그 사람은 경악한 얼굴로 말했다.
“그건 만화잖아요. 만화는 안 됩니다.”
그는 확고했다. 만화란 오락도구일 뿐이며, 설령 교육용의 만화가 있을지언정 그보다 훨씬 해악을 끼치는 만화가 많기 때문에 애초에 그 ‘맛’을 보게 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모름지기 공부란 괴롭고 힘들어야 머릿속에 남게 된다고 믿는 것 같았다.
우리 사회에는 즐거운 것을 하찮게 보는 문화가 있다. 사람들은 유용한 것만이 살아남을 자격이 있다고들 많이 생각하는 것 같다. 만화나 소설 같은 것 들은 시간을 그저 흘려보내기 위한 아무 짝에 쓸모없는 것들일 뿐이라 생각하곤 한다. 그나마 어떤 감동을 마음에 전달해준다면 조금이라도 유용하겠지만 그런 것도 아니라면 그 가치를 인정하지 못하게 되고 만다. 마치 1970년대에 만화책 불태우기 행사를 열었던 것처럼.
▲<그림1>〈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 유일, 화음조, 이예지
어떤 것의 가치는 단지 ‘유용하기’ 때 문에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그저 한 조각의 웃음일수도, 한 방울의 눈물 속에 있을 수도 있다. 우리는 태어났고 살아간다. 이성이 부족하던 저 먼 옛날에는 신이 어떤 ‘목적’으로 인간을 만들었으리라 생각하고 그 목적에 부합하지 못하면 살 아갈 가치가 없다고 판단했다. 다시 생각해보면 그리 먼 옛날도 아니다. 나치는 장애인들을 집단 학살했었고, 미국도 장애인들에게 강제 불임 시술을 강행했었다.
장애인들이 어떤 삶을 살아가는지 보고 싶어하지도 않았고, 그들을 방치한 뒤에 그들이 방치된 결과를 놓고 그들을 유용하지 않다고 판단하고 사회에서 배제하고자 했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가 인기몰이를 했다. ‘자폐 스펙트럼 서번트 증후군’이라는 웬만해서는 알지 못하는 긴 이름의 장애를 가진 변호사의 활약을 그린 드라마다. 일각에서는 예쁘고 천재인 장애인을 내세워 장애인의 실상을 왜곡한다고 비난하기도 한다. 장애인이 유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식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고 우려한다. 드라마에서 우영우가 “장애인도 나쁜 남자와 사랑에 빠질 자유가 있습니다”고 말하고 있는데도 그런다. 주인공이 예쁘고 똑똑한 것은 비장애인 드라마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장애인이 등장하니까 예쁘고 똑똑하면 안 된다고 말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은가?
장애인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드라마를 보면서 우리나라 만화 중에는 장애인 이 주인공인 만화가 뭐가 있을까 생각해봤다. 많지 않다. 지난 7월 27일부터 〈이 상한 변호사 우영우〉가 네이버웹툰에 연재되기 시작했다.
▲<그림2>〈나는 귀머거리다〉 Ⓒ 라일라
네이버웹툰에는 장애인을 주인공으로 하는 또 다른 만화가 있다. 라일라 작가의 〈나는 귀머거리다〉이다. 만화를 그린 라일라 작가 자신이 청각장애인이다. 소리를 전혀 들을 수 없는 선천성 장애인이다. 라일라 작가는 누구나 만화를 연재할 수 있는 네이버 베스트도전에 〈나는 귀머거리다〉를 그려서 올렸는데, 자신도 없고 오히려 청각장애인에게 누를 끼칠까 두려워지는 바람에 바로 만화 그리기를 그만두었다. 좋은 만화가를 찾아서 멋진 그림으로 청각장애인의 이야기를 전달해보고 싶었다. 그러나 결국 그런 작가를 찾지 못했다. 라일라 작가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이야기들을 전달해야겠다고 생각하고 2년 넘게 태블릿으로 그림 그리기를 익혀서 다시 만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1년 반 가량 63화를 연재하고 네이버웹툰에서 정식연재를 제안하여 입성하게 되었다. 〈나는 귀머거리다〉 는 2015년에서 2017년까지 2년 동안 연재하여 200화로 완결되었다. 지금도 네이버웹툰에서 감상할 수 있다.
〈나는 귀머거리다〉는 청각장애인에 대해 엄청나게 많은 것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소리가 있다는 것을 언제 처음 알았는가라는 질문에 다른 청각장애인이 겪었다는 이야기를 해준다. 어렸을 때 엄마가 현관 문을 열 때마다 사람이 있는 것을 보고 너무나 신기했다는 것. 엄마가 마법을 부리는 건가, 저 문을 열면 늘 사람이 있는 건가라고 생각하고 자기도 열어보았지만 당연하게도 사람이 문 앞에 서 있는 법은 없었다. 소리가 사람이 왔다는 것을 알려준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비장애인 언니가 엄마가 오는 것을 언제나 귀신처럼 알아차리는 이유를 몰랐고, 길을 걸을 때도 낮에는 경적을 아무리 울려도 못 듣기 때문에 위험하고, 오히려 밤에는 헤드라이트 불빛으로 뒤에 차가 온다는 것을 알 수 있어서 안전하다는, 이런 이야기들은 비장애인은 상상도 못할 이야기들이었다.
청각장애인은 자신의 몸에서 나는 소리도 듣지 못하기 때문에 알 수가 없다. 배가 고플 때 배가 울리면 “꼬르륵” 소리가 난다는 것도 모르고, 화장실에서 배변할 때 얼마나 큰 소리가 나는지도 모른 다. 연필로 글을 쓸 때도 소리가 난다는 것 도 알 수가 없다.
▲<그림3>〈나는 귀머거리다〉 Ⓒ 라일라
청각장애인은 말을 배우지 못하고 글을 배우기 때문에(심지어 말 없이 글 배우기는 상상을 초월하게 어렵다) 욕은 배우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그 때문에 의사 표현에서 불이익을 당하기도 한다. 스토커에게 시달린 청각장애인이 경찰에게서 “정말 싫었다면 욕을 썼겠지”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약간은 시일이 지나서 지금은 좀 나아진 부분이 있기도 하다. 자막 관련한 부분이 그렇다. 비장애인인 나도 가끔 배우 발음이 좋지 않아 넷플릭스 같은 영상 서비스를 이용할 때 자막을 켜곤 하는데, 그 때마다 [신나는 음악], [발소리], [문 여는 소리] 이런 자막을 보면서 ‘뭐 저런 것까지 일일이 표시하는 걸까?’ 하고 생각 한 적이 있었다. 알고보니 이 자막은 청각장애인을 위한 배리어 프리(Barrier Free)이 다. 장벽을 없애준다는 뜻인데, 검색해보면 프리어배리, 배리프리어 등 엉터리로 표기하는 경우도 많다. 그만큼이나 알려지지 않은 용어라는 뜻이기도 하겠다.
사람들이 ‘정보’로 창작물을 보게 되면 그 안에 들어 있는 것만으로 모든 것을 알게 된 것처럼 굴 때가 많다. 라일라 작가도 그것을 걱정한다.
〈나는 귀머거리다〉에서는 청각장애인도 다양하다는 점을 몇 번이나 보여준다. 보청기를 착용하면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청각장애인도 있고, 소리를 전혀 듣지 못하는 청각장애인도 있는데, 이 두 사람은 서로 장애에 대해서 이해하는 정도도 다르다. 또한 어떤 청각장애인은 사람의 입술 모양을 보고 말을 이해하고, 어떤 청각 장애인은 수화로 의사소통을 한다. 이 사람들끼리도 어울리기가 쉽지 않다.
사람들은 다양하다. 제각기 다른 개성을 지니고 있는 존재이다. 그런데 어떤 카테고리를 설정하는 순간 하나의 묶음 안에 들어가는 사람은 그래야만 하는 존재처럼 여겨지게 되는 경우를 많이 본다. 청소년은 청소년다워야 하고, 남자면 남자다워야 하는 그런 것처럼, 장애인은 장애인다워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었을 때 살아갈 자격이 주어지는 것인가? 아니다. 하지만 과도한 경쟁이 지배하는 우리 사회에서는 장애인이 자기 발전을 위해 얼마나 많이 노력해야 하는가는 안중에 없이, 그들이 못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받아야 하는 것들조차 불공정한 것이라 매도하기 일쑤다. 라일라 작가는 고등학교 때 영어듣기평가를 시험지로 받는 것에 대해 급우가 ‘혜택’이고 ‘역차별’ 이라고 한 말 때문에 심한 우울증에 걸리기도 했다.
▲<그림4>〈나는 귀머거리다〉 Ⓒ 라일라
이렇게 이야기하면 마치 〈나는 귀머거리다〉가 뭔가 되게 심각하고 어두운 웹툰처럼 보일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런 우려는 저 멀리 치우기를 바란다. 〈나는 귀머거리다〉는 뛰어난 재치와 유머로 가득 찬 즐거운 만화다. 비장애인이 하면 차별적인 유머도 당사자가 하면 훌륭한 개그가 되는 것을 보여준다든가, 급우들이 뒤에서 하는 험담 같은 것도 하나도 안 들린다고 깔깔대는 장면에선 웃음이 저절로 나오고 만다.
비장애인은 장애인에 대해 잘 모른다. 장애에는 많은 종류가 있고 우리 사회는 오랫동안 장애인을 눈에서 보이지 않게 하는 데만 힘을 썼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나는 귀머거리다〉 같은 창작물들이 더 많이 나오고, 그 위에서 우리 모두가 함께 살아가야 하는 존재로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 〈나는 귀머거리다〉에서 말하듯이 장애인들이 비장애인이 되기 위해 살아가야 하는 것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