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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현아의 〈연의 편지〉: “네가 숨처럼 내쉬던 작은 호의들을 난 평생 기억할 것이다.”

<지금, 만화> 15호 Essay 에 실린 글입니다. 〈연의 편지〉/글, 그림 조현아/네이버웹툰

2023-05-12 하원준


오늘과 여름, 지친 마음의 작은 치유

여름이다. 나를 겹겹이 둘러싼 무덥고 습함으로 기분마저 물 담긴 양동이 속에 빠졌다 나온 것 같은 진하디 진한 여름이다. 그리고 원치 않게 내 주변의 누군가와 마음이 충돌하는 일마저 생긴다면, 이 여름은 무겁게 젖은 기분이 곰팡이처럼 번져가는 느낌일 것이다. 뒤죽박죽의 감정에 전염되어갈 땐 나만의 해결 방법이 있다. 재빨리 작열하는 태양과 흐르는 땀을 피해 나무 그늘을 찾아가야 한다. 그리고 그 안에서 북극의 빙하가 뜬 물 한 잔을 냉각수로 채워 넣고, 마음의 쿨러가 흥분을 냉각시 킬 때까지 그늘 밖을 본다. 뜨거운 풍경과 격리된 태도로 그곳을 보고 있으면, 서서히 나는 차가워진다. 신기한 것은 차가움을 갈망하는 순간, 뜨거웠던 바람마저 그늘 속에선 선선하게 위로에 동참한다는 것이다. 그 순간, 나는 이게 치유 받는구나. 라는 생각이 든다.

 

<그림1>〈연의 편지〉 Ⓒ 조현아


연의 편지가 그런 만화다. 내가 혼돈의 뜨거움 속에서 차갑게 치유 받는구나라는 느낌을 갖게 만드는 만화다. 조현아 작가가 글과 그림을 동시에 창작한 연의 편지20188월부터 10월까지, 여름 특선 10부작으로 구성되어 네이버웹툰에 연재되었다. 이 작품은 아름답고 수채화 같은 색감과 지브리애니메이션스튜디오의 그림을 연상케 하는 풍경의 묘사, 그리고 사춘기 주인공의 작고 섬세한 캐릭터의 감성으로 9.98이라는 높은 독자 별점을 받은 작품이다. 이후, 2019년도에 외전이라는 에피소드 하나를 더 추가하여 한 권의 단행본으로 출간되었고, 극장용 애니메이션 제작도 확정되었다.

특히, 단행본 도서의 경우, 모든 컷을 페이지 단위 연출에 맞춰 재조립했고, 이에 따라 많은 페이지가 조현아 작가가 다시 그렸다고 한다. 그래서, 재현과 보강이 이뤄진 특징을 가진 작품이다. 도서로 출간 시에 이러한 보강 기법을 사용했다는 것은 조연아 작가와 출판사, 모두 칭찬받을 만한 일일 것이다. 그러한 노력 때문인지, 2019년도에 한국만화영상진흥원은 연의 편지오늘의 우리만화상수상작 5편 중 1편으로 선정했다.

나는 웹툰보다 단행본에 제격인 연의 편지2020년에 접했다. 그 후 올해까지, 세 번의 여름에 한 번씩 꺼내 읽었다. 앞서 말한 나에게 그늘이 필요한 순간에 말이다. 연의 편지는 나의 치유에 결정적인 처방을 내리지는 못하지만, 선선하게 불어오는 바람처럼 위로의 조연으로 동참한다.

연의 편지에 담긴 주인공의 이야기는 여름의 시골 밥상처럼 단출하고, 슴슴하다. 그러나 쉽게 물리지 않을 에피소드와 은은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주인공은 소리라는 여학생이다. 그녀는 왕따를 당하던 친구를 도와주다가, 모두의 표적이 되고 아빠의 고향으로 전학을 가게 된다. 그러나 새로운 학교에서도 소 리는 고립된 자리에 앉는다. 후회와 불안에 마음이 무너져내리는 그 순간, 그녀는 책상 안쪽에 붙어 있던 비밀 편지를 발견하게 된다. 발신인 불명의 편지 속엔 학교와 선생님, 급우들의 특징이 적힌 편지는 소리에게 다음 편지를 찾게끔 이끌어간다. 이에 소리는 편지를 찾아 학교를 탐험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마녀로 불리는 경비원 김순이 여사를 통해 편지를 쓴 사람이 전학을 떠난 장호연이라는 친구임을 알게 된다. 소리는 그 후에도 호연이 남긴 편지를 계속 찾던 중, 국궁부 선수인 박동순을 만나게 된다. 동순은 호연과 가장 친한 친구였고, 호연이 말없이 떠나서 마음에 상처를 받은 상태다. 이제 두 사람은 함께 호연이 남겨둔 편지를 찾기 시작하고, 호연이 왜 동순에게 말도 없이 학교를 떠났는가를 알아내기 시작한다. 그리고 두 사람은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호연이 남긴 마지막 열 번째 편지를 발견하고, 호연이 있는 곳으로 향한다.

이렇듯, 연의 편지는 수수께끼를 풀어가는 과정으로 치유물 장르의 속성을 띠고 있고, 열 통의 편지를 찾는 소리와 동순의 우정과 회상을 기반하고 있다. 치유물이라고 하면, 치명적 유해물의 약칭으로 쓰기도 하지만, 정확하게는 마음이 평안해지고 위로를 받게 하는 목적을 가진 작품을 뜻하는 일본식 표기 법이다. 때로는 위안계라고도 불리는 이러한 작품은 우리나라 표현으로 힐링 장르 만화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림2>〈연의 편지〉 Ⓒ 조현아


연의 편지를 본 독자들은 이 만화가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너의 이름은을 떠올리게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연의 편지를 통해 일본의 영화감독 인 이와이 순지 감독이 연출한 러브레터을 떠올렸다. 그래서 러브레터에서 주인공 히로코가 우연히 보게 된 전 애인의 졸업앨범에 있는 옛 주소를 손목에 기록하고, 그 주소지인 홋카이도 오타루 시의 후지이 이츠키에게 도착한 한 통의 편지로 이야기가 시작되는 과정이 연의 편지에서 소리가 편지를 찾는 과정과 하나로 연결된 끈처럼 느껴지게 한다. 연의 편지가 여름의 나무 이야기라면, <러브레터>는 겨울의 하얀 눈 이야기라서 더욱 더 연결된 느낌이 든다. 이 건 매우 신기한 기분이다. 오늘의 만화가 아득해지는 영화를 생생하게 떠오르게 하다니. 그리고, 내가 대표적인 힐링 만화 장르에 속하는 타카하시 신의 장편 데뷔작인 좋은 사람을 즐겨보는 사람이기 때문일지 몰라도, 연의 편지도 우연이 꼭 필연이 될 수 있다는 것은, 그 사람이 상대를 어떻게 대하는가? 하는 마음의 결정에 달려 있음을 다시 일깨워주고 있다. 연의 편지에서 가장 인상적으 로 여기는 대사가 네가 숨처럼 내쉬던 작은 호의들을 난 평생 기억할 것이다.”이다. 이 대사는 마치 북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인사말, ’미타쿠예 오야신과 같다. 우리 모두는 연결되어 있다는 것, 이것이 연의 편지에서 소리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관계의 연결법이다.

내가 연의 편지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마지막 편지 부분에서 동순이 호연을 향해 달려가는 뒷모습 장면이다. 그 장면에서 소리 역시 인연과 운명으로 얽힌 호연을 향해 뛴다. 이 한 장면에서 나는 가슴이 뛴다. 적잖게 나이를 먹은 나에게 어울리지 않는 가슴뜀을 주다니. 그래서 연의 편지가 좋다. 그리고 다시 되돌아올 수 없는 학창 시절에 대한 그리움과 함께, 나에 의해, 그에 의해, 우리에 의해, 의도하던, 의도하지 않았던, 아쉽고 안타깝게 사라진 그런 사람과의 관계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한다. 잠시 사람들에게 질려서 그늘에 쉬고 있어 도 다시 사람들 곁에 가야 하는 것이 삶일 것이다. 그런 삶에 그늘의 바람처럼 위로를 주는 만화가 연의 편지.


필진이미지

하원준

영화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