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퍼히어로’는 〈슈퍼맨〉과 〈배트맨〉이 세상에 등장했던 1930년대부터 지금까지 늘 우리 머릿속에 있었고, 긴 시간 동안 사람들은 자신만의 슈퍼히어로를 가지거나 직접 ‘슈퍼히어로’가 되어보는 꿈을 가졌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다양한 어려움을 겪는 사람을 돕거나 다양한 빌런들을 상대하는 상상을 하며 지내게 된다. 그런데 최근 본 만화 중, 내가 그 어떤 능력을 가진 ‘슈퍼히어로’라도 해도 문 제를 해결해줄 수 힘들 것 같은 작품 속 인물을 만났으니 그게 바로 하기오 모토의 〈잔혹한 신이 지배한다〉의 주인 공 제레미이다.
▲<그림1>〈잔혹한 신이 지배한다〉 Ⓒ 하기오 모토
작품 속 제레미는 몸과 마음이 병약한 홀어머니 산드라와 함께 보스턴에 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부인과 사별 후, 영국에서 온 신사 그레그와 제레미의 어머니 산드라는 우연한 인연으로 사랑에 빠지게 되고, 그 들은 약혼에 이르게 된다. 겉으로는 80~90년대 당시, 일반적으로 상상되던 완벽한 영국 신사의 모습을 한 그레그. 그는 진심으로 산드라를 사랑했지만, 끔찍한 펠도필리아(소아성애자)이자 사디스트 (상대에게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줌으로써 성적 쾌락을 얻는 자)였고, 제레미의 어머니와 약혼하던 즈음부터 산드라를 사랑하지만 너 또한 사랑한다는 말도 안 되는 기만으로 제레미를 겁탈하기 시작한다. 처 음엔 이 모든 것을 산드라에게 말하고 이 약혼을 파혼시키며 그레그에게 죄를 묻고자 했던 제레미였지만, 그레그를 며칠이라도 만나지 못하면 자기 삶을 비관하며 금방이라도 삶을 정리할 것 같은 산드라를 보며, 하나 남은 가족마저 잃을 것이 두렵고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조언을 구할 곳도 없는 혼돈 속 15세 제레미는 이 결혼을 막지 못하고 어머니 산드라를 따라 영국의 그레그 저택으로 이사가 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제레미는 하기오 모토의 수려하고 탐미적인 만화적 연출로도 도저히 불편해서 보고 있기 힘든 나날들을 보내게 된다. 그런 제레미의 곁엔 오직 그레그의 한 마디에 세상 모든 것을 잃은 듯하다가도 세상 모든 것 얻은 듯 행복해하는 어머니 산드라뿐이다. 그래서 어머니를 잃지 않으면서도 모든 것을 되돌리거나 혹은 그레그를 처벌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자 다양한 사람들에게 몰래 조언을 구하지만 결국 사실을 알려야 한다는 말뿐, 그 무엇하나 ‘그래! 이거야!’ 하는 조언을 듣질 못하며 점점 무너져간다.
만약 이렇게 밤낮으로 피폐해진 소년이 잔혹한 신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자신을 구해달라고 한다면 그 세계 속 ‘슈퍼히어로’는 무슨 말과 무슨 행동으로 제레미를 도울 수 있을까? 그에게 어떤 방법으로 약혼 전 산드라와 함께했던 나름 행복했던 보스턴 일상을 다시 돌려줄 수 있을까? 그런 문제는 힘과 초능력으로 세상을 돕는 ‘슈퍼히어로’와는 무관한 일이니 다른 곳을 찾아보라고 해야 할까? 아무리 생 각해봐도 나는 침묵 속에서 작품의 페이지를 계속 넘길 뿐이었다.
만화 속 ‘슈퍼히어로’가 사는 세계는 생각보다 꽤 단순하다. 선과 악이 대부분 명료하고 가끔은 악의 말이 맞는 것 같다는 씁쓸함을 느끼며 개고생하는 히어로가, 모든 사건이 해결되고 나서 남은 씁쓸함을 홀로 껴안고 인내하는 것 정도에서 마무리된다. 거기에 입체적으로 빠질 수 있도록 잘 준비된 ‘슈퍼히어로’와 ‘빌런’의 비하인드 스토리가 세련되게 잘 편집된다면, 나를 포함한 우린 너나 할 것 없이 재밌는 시간을 보내곤 한다. 하지만 현실 속 ‘슈퍼히어로’라면 그런 수준의 책임과 인내에서 끝나지 않을 것이다. 결국 내가 남다른 능력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그 힘에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는 벤 파커의 조언을 넘어, 나의 능력으로 해결할 수 있었는데 상황 때문에 해결하지 못해 아버지를 잃었다는 클락 켄트의 상실감을 넘어, 사람들의 기대 속에서도 나의 능력으로 마지막 미션을 해결할 수 없다는 토니 스타크의 무력감을 넘어, 그 누구의 능력으로도 도울 수 없는 일이 너무 많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온다면, 아무리 대단한 정의감과 초능력을 가진 ‘슈퍼히어로’라고 해도 그 힘을 숨기고 그저 침묵한 평범한 삶을 선택할지도 모른다. 아니면 오토모 가츠히로의 〈동몽〉에 나오는 노인처럼 되어버릴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