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를 보다 문득 내 나이를 날 수로 환산해보고 싶어졌다. 계산기를 두드려 보니 15,000일을 조금 넘게 살았다. 1만 5천 번 해가 뜨고 졌다. 정확히는 지구가 그 수만큼 핑핑 돌았다. 41회의 공전과 1만 5천 회의 자전. 단위가 다르니 느낌도 다르다. 날 수를 보니 나 꽤 오래 살았구나, 꽤 많은 경험을 했구나 싶다. 오늘이 조금 더 가깝게 또 낯설게 느껴진다. 나의 숱한 오늘들을, 다 기억나지 않는 날들을 그러모아 살펴보고만 싶어진다.
▲<그림1>〈오늘을 살아본 게 아니잖아〉 Ⓒ 한차은
얼핏 유치한 상념에 빠진 건 〈오늘을 살아본 게 아니잖아〉 때문이다. 제목이 일단 한 몫 했다. 당연한 진실을 이렇게 표현하니 낯설다. 눈길을 잡아끌면서 인물과 서사를 잘 보듬는 훌륭한 제목이다. 주인공은 여진희, 올해 100살이 된 소설가다. 100살이면 36,500일, 나보다 갑절 넘게 많은 오늘을 산 그녀이지만 여전히 새로운 오늘은 처음이다. 30화밖에 안 되는 짧은 이야기 속에 그녀의 오늘들이 담겼다. 정확히 며칠인지는 밝혀지지 않지만, 새싹이 돋아 아주 키 작은 나무가 될 정도의 나날이다. (여기부터는 스포일러가 잔뜩 있습니다.) 그간 진희는 이사를 하고 세 번째 이혼을 하고 아들에게 돈을 뜯긴다. 뿐만 아니다. 갑작스러운 암 선고를 받아 수술대에 오르고, 9년만에 쓴 신작 소설을 출판사에 거절당한다. 이런 절망편 오늘들의 어디쯤에선가 진희는 홈닥터 로봇 엠유에게 한탄처럼 말한다. “사람이 사는 데 죽을 만큼 힘든 날이 있잖아. 신은 그런 힘든 날을 견디라고 곳곳에 장치를 걸어 두었는데, 그 장치를 발견하면 힘든 날을 견딜 수 있어.” 조금 유치하지만 그녀가 절망에 뚫은 작은 구멍이다. 그녀는 묻는다. “죽을 만큼 힘든 오늘. 신이 나에게 심어 준 장치는 뭘까?”
〈오늘을 살아본 게 아니잖아〉는 바로 이 장치에 대한 이야기다. 곳곳에 심긴 장치를 보다 낯설고 선명하게 보여주기 위해 SF 세계관 속에 이야기를 꾸렸다. 생명연장술이 보편화되어 180살까지 살 수 있게 된 미래 세계에서 진희는 70살 즈음에 생명연장술의 혜택을 입었다. 90세부터 의무적으로 사용해야 하는 인공지능 홈닥터 엠유와 함께 산 지도 벌써 10년이다. 콘센트 꼬리가 안 들어가기도 하는, 아주 늙은 로봇이다. 그리고 어느 오늘은 엠유가 그 장치 역할을 한다. 힘든 하루를 겪고 돌아온 늙은 주인에게 늙은 로봇이 말한다. “저에게 저장된 위로하는 방법을 찾아봤는데요.”, “38도로 목욕물 받아놨어요.” 진희가 가장 좋아하는 목욕 온도다.
옆집에 사는 99살 현배군도 그 장치다. 평소에는 페인트공으로 일하며 조연 배우로 영화에 출연하고 있는, 언젠가는 주연을 꿈꾸는 배우다. 그리고 소설가 여진희의 팬이다. 가장 좋아하는 작품은 《함부로 네곁에》. 배군의 삶과 너무나 닮은 삶을 사는 인물 현수가 주인공이어서다. 하지만 정작 마지막 장은 읽지 않았다. 현수의 마지막을 보면 자신이 무너져 내릴 것만 같아서다. 그런데 진희가 옆집에 이사 왔다. 오가며 마주치는 진희를, 배군은 자신의 최선을 다해 환대한다. 진희의 여러 오늘에 배군은 그 장치가 되어준다. 현수를 아낀다는 진희는 배군에게 《함부로 네곁에》 마지막 장을 읽으라 채근한다. 어쩌면 배군에게도 진희와 진희의 소설이 그 장치일지 모른다.
▲<그림2>〈오늘을 살아본 게 아니잖아〉 Ⓒ 한차은
배군 뿐만 아니다. 진희가 이사 온 은홍빌의 다른 이웃들, 진희 집의 테라스, 엄마가 사 준 책상, 식물과 백설기 등등 여러 장치가 진희와 서로의 오늘을 위해 마련되어 있다. 그리고 어쩌면 이 작품 자체가 독자의 오늘을 위한 장치다. 충분히 나이 든 이들의 고뇌와 상실, 두려움과 아픔, 다채로운 감정이 그려지는 가운데 잘 배치된 장치들이 독자의 마음을 만져준다.
내게도 이 작품은 장치였다. 이 작품을 읽고 위로받은 날들이 많다. 진희가 거의 죽은 나무를 볼 때마다 읊는 주문, “살아나라 나무야 힘내라 나무야”가 꼭 내게 하는 얘기인 것만 같았다. 병문안 가는 법을 담담하게 일곱 가지나 읊은 에피소드의 따뜻한 정보에 크게 배웠고 따뜻한 색감과 부드러운 선으로 그려진 칸마다 즐거웠다.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씀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움에 뭉클해졌다.
그리고 무엇보다, 마음 쏟아 사랑하고픈 만화를 본 게 언제던가 생각하던 무렵에 이 웹툰을 만났다. 작년 초엽 오늘, 이 작품을 만나서 만화가 다시 좋아졌다. 그때 나는 쓸거리를 찾은 소설가 진희처럼 “발견했다고, 희망을! 봤다고, 희망을!” 하고 속으로 외쳤다. 이어서 만난 〈도롱이〉, 〈집이 없어〉 올해 뒤늦게 만난 〈노루〉 등의 작품도 그랬다. 고도화된 문화 산업으로서의 웹툰 판에서, 어쩌면 잘 안 팔릴 옛날 감성, 무거운 주제 의식을 놓지 않은 소중한 작품들이다. 이 작품들 덕에 진희의 소설 속 구절처럼 “조금 더 버틸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만화 앞에 버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