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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건의 〈여자친구〉: 우리는 여자친구가 필요해

<지금, 만화> 15호 '만화 속 인생 명대사 명장면' 에 실린 글입니다. <여자친구>/글, 그림 청건

2023-05-24 이한솔


청건 작가의 여자친구는 레진코믹스에서 연재되었던 웹툰으로, 본편 내용뿐만 아니라 작가의 후기까지 이 될 정도로 큰 인기를 얻은 작품이다. 순정만화풍의 화려한 작화, 독자들이 공감하기 쉬운 학원물 장르, 독특한 개그 코드까지. 이 작품의 인기 요소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무엇보다 가장 매력적인 것은 바로 작가의 명확한 의도와 메시지, 그리고 명대사들이다.


<그림1>〈여자친구〉 Ⓒ 청건


네이버웹툰 중 여신강림연애혁명등이 늘 최상위권의 인기를 누리는 것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시피학원 로맨스는 언제나 대중들에게 친근한 장르 중 하나다여자친구라는 제목을 살펴보았을 때에도 이러한 익숙함이 느껴진다이 웹툰 역시 고등학교에서의 로맨스 요소를 보여줌으로써 착실히 대중성을 담아내는 작품인 것처럼 보인다적어도 초반부에는.

여자친구는 총 3부작으로 이루어진 이야기로서, ‘허영이의 시점에서 잘생긴 선배 백 빛나’, 같은 반 친구 최한나를 묘사하는 것으로 1부가 시작된다세 사람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향하는 감정을 통해 일종의 삼각관계를 이루는데이는 언뜻 일반적인 로맨스 문법에 따르는 구도처럼 보이기도 한다기존의 학원 로맨스 작품들을 떠올려보았을 때제 목의 여자친구란 허영이와 최한나가 이루어낼 목표를 의미하리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림2>〈여자친구〉 Ⓒ 청건


백빛나는 제법 이상적인 남자친구에 부합하는 캐릭터다. 학교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잘생긴 선배. 작품 의 첫 등장에서부터 계속해서 오로지 최한나만을 바라보는 순정파. 그러니 독자들은 (1부의 미묘한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이런 질문을 익숙하게 떠올리게 되는 것이다. 과연 누가 백빛나의 여자친구자리를 쟁취해 낼까. 어느 인물이 여자친구 역할을 맡음으로써 진정한 주인공의 자리를 차지할까. 하지만 3부에 이르러 백빛나가 최한나에게 열렬한 사랑을 고백했을 때, 백빛나와 독자들에게 돌아온 대답은 이렇다. “사라져 주세요.” 이 잔혹하고 산뜻한 거절과 함께 백빛나는 작중 서사에서 사라지며, 최한나의 대사, 표 정, 몸짓을 통해 유쾌한분위기가 극대화된다. 이때 기존의 러브라인은 완전히 무너지지만 여자친구는 오히려 본격적으로 이 작품만의 매력을 보여주기 시작한다. “자살해”, “엄마 딸 또라이야ㅋㅋ등등과 같이 인터넷에서 로 자주 보이는 명장면도 바로 최한나의 고백 거절 에피소드부터 등장하는 장면들이다. 이렇게 밈이 된 장면과 대사들은 (언뜻 다소 괴팍하고 폭력적인 듯한) 개그코드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모두 동일한 주제를 담아내며 서사를 구성한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작품 극후반부에서 최한나가 내뱉는 대사를 통해 보다 명확하게 전달된다. 마침내.


<그림3>〈여자친구〉 Ⓒ 청건


남자친구는 됐어.

나는여자친구가 필요하다고.

왜 모르니? 왜 몰라. 알아줘. 알아달란 말이야.”

 

최한나에게 여자친구란 스스로 되어야 할 역할이 아니라, 자신에게 필요한 존재다. 다소 심심하게 느껴졌던 제목 여자친구, 한나의 독백을 통해 비로소 작품에 가장 적절한 제목이 된다. 남자의 여자친구가 되는 것만을 마땅하게 여기는 세계 속에서, 남자친구가 아닌 여자친구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은 얼마나 외롭고 간절한 호소인가! 왜 모르니, 왜 몰라, 알아줘, 알아달란 말이야. 거듭 반복되는 부탁은 허영이를 향한 대사인 동시에 화면 너머 독자에게 전달되는 메시지다. 그러니 독자인 우리들은 그 메시지를 곱씹고, 일종의 말버릇으로 삼고, 밈으로 활용함으로써 최한나에게 대답하게 되는 것이다. 이제 알고 있다고. 여전히, 그리고 언제나 우리에게는 여자친구가 필요하는 걸.


필진이미지

이한솔

만화평론가
2020 만화·웹툰 평론 공모전 신인부문 가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