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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모토 히데오 원작, 시미즈 다카시 영화 〈호문쿨루스〉: 원작의 ‘선’을 넘지도, 지키지도 못한 영화화의 한 사례

<지금, 만화> 15호 '만화 vs 영화' 에 실린 글입니다. <호문쿨루스>/글, 그림 야마모토 히데오

2023-05-27 박수민


야마모토 히데오의 만화 호문쿨루스는 이렇게 표현하는 안일함과 게으름을 굳이 피할 필요 없이, 한마디로 말해서 걸작이다. 고대 연금술이나 파우스트같은 근대 독일 문학에서 찾아봄직한 호문쿨루스(Homunculus)’라는 생소한 개념을 가져와서, 뇌의 압력을 줄여 숨겨진 감각을 연다는 금단의 수술 트리퍼네이션(Trepanation, 두개 골 천공술)’을 통해 현실에 구현한 설정부터 충격이었다. 일본 만화다운 선정적인 설정으로 시작하지만 결과적으로 작품은 주인공과 캐릭터들 간의 묵직한 심리드라마인 동시에, 앙상한 내면을 숨긴 채 외면에만 집착하는 세태를 반영한 통렬한 사회극이기도 했다.

이야기 도입부를 강렬하게 시작하긴 쉽다. 1화가 충격적이어야 팔리는 건 만화 나 시리즈물이나 마찬가지라 요새는 다들 그렇게 하지만, 회를 거듭할수록 예측 불 가의 전개로 독자의 얼을 빼놓는 이야기는 몇 안 된다. 충격적 설정은 설정으로만 머물고 캐릭터들끼리 지리멸렬하게 대립하느라 약속된 테마는 흐릿하게 넘어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매회 허를 찌르던 전개가 어느 순간 어떤 선마저 뛰어넘어 인간은 도대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하고, 가장 피하고 싶은 답을 내고 떠나는 작 품은 손에 꼽힌다. 야마모토 히데오가 만화라는 매체를 통해 일생동안 해오고 있는 작업이 그렇다. 그의 만화는 언제나 선을 넘는다.

<그림1>영화 〈호문쿨루스〉


<그림2>만화 〈호문쿨루스〉 Ⓒ 야마모토 히데오


어떤 기준의 한계를 넘어설 때, 인간관계 등에서 허용한 범위를 넘는 행동을 할 때 우리는 곧잘 선을 넘는다고 말한다. 그의 대표작 킬러 이치부터가 선을 넘는 이야기였다. 내부 붕괴를 목적으로 야쿠자 항쟁에 외부 킬러를 심는 액션물로 보였던 만화는 어느 순간 선을 넘어 이상심리와 이상성애를 아우르는 극한의 사랑이야기로 변했다. 가학과 피학의 폭력을 성욕과 이어버린 이 미친 만화를 본 이후로 나 는 액션의 순수한 공방(攻防)적 쾌감을 편하게 즐길 수 없는 몸이 되어버렸다. 최신 작 히카리맨조차 틴에이저 슈퍼히어로 장르의 안전한 선을 넘어 캐릭터와 독자에게 진짜 폭력의 위협과 공포를 느끼길 요구한다. 정서적 결핍이 있는 소년이 운 좋게 슈퍼파워를 얻어 영웅이 되는 이야기가 아니라, 신체 일부가 영영 잘려나가 불구가 된 후에야 진정한 결핍을 채울 가능성을 찾는 이야기. 이렇게 선을 넘는 것이 야 말로 야마모토 히데오의 작가로서 테마일지 모른다.

영문 제목으로 우리에게 더 익숙한 이치 더 킬러(Ichi The Killer)는 원작의 폭력을 검열의 한계에 도달한 영상으로 재연한 동시에 이 버전만의 재해석에도 성공한 훌륭한 영화화였다. 세계의 장르 팬들에게 컬트적인 인기를 끈 이 영화의 긍정적 악명은 원작만화 또한 내수용의 선을 넘게 해주었다. 일본영화계가 투자 리스크 분산을 위해 이른바 제작위원회식 만화 원작 양산의 매너리즘에 빠지기 전에 이미, 만화원작과 영화작가의 매칭이 적절하다면 얼마든지 원작 IP를 세계적으로 확장할 시너지를 만들 수 있음을 증명한 사례다. 미이케 다카시 감독의 이치 더 킬러는 제멋대로 각색한 것 같으면서도 의외로 원작의 본질을 놓친 지점이 없는 영화 였다. 원작의 지나친 표현 수위를 낮추지도, 위험한 테마를 회피하지도 않았다. 원작이 선을 넘었다면, 영화화 역시 선을 넘어야 한다. 만화책을 사보는 소수의 독자 를 넘어 극장에 찾아올 더 많은 관객에게 어필하기 위한, 일종의 하향평준화식 각색은 여기 없었다.

호문쿨루스가 영화화된다는 소식을 접하고 오오!” 육성으로 외친 나는 영화화를 맡을 감독이 누구인지가 가장 궁금했고, 확인한 시미즈 다카시의 이름에 일단 기대를 품었다. 지난 세기말부터 2000년대 초까지 , 착신아리, 주온시리즈로 대표되는 일본 호러는 세계적인 인기를 끌었고 로컬 호러를 글로벌하게 구축하는 방법에 있어 우리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다. 살인마만큼 무서운 원혼의 세계가 열린 것이다. 시미즈 다카시는 이 중에서 주온의 창시자이자 시리즈의 주인으로 할리우드 진출도 이뤄냈던 감독. 그의 연출로 20214월에 먼저 자국에서 개봉한 영화 호문쿨루스는 넷플릭스를 통해 세계에 공개되었다.

고급 호텔과 노숙자 공원 사이의 도로에 작은 자동차를 세워둔 채, 어느 쪽 선도 넘지 않고 자진해서 홈리스 생활 중인 의문의 남자 나코시 스스무(아야노 고). 어느 날 그에게 인간에 대한 연구가 목적이라는 화려한 외모의 청년 이토 마나부(나리타 료)가 나타나 트리퍼네이션(영화에선 두부 천공술이라 번역)을 제안한다. 수술을 받은 후 나코시는 한쪽 눈을 가리고 인간을 보면 상대의 뒤틀린 내면이 형상화되어 나타나는 감각을 얻는다. 이토는 이 형상을 호문쿨루스라 이름붙이고, 계약상 일주일 간의 연구가 시작된다. 뒤섞인 실재와 환상 속에서 나코시는 이 형상들의 실체가 사실, 대상에 자기 자신을 투영한 것임을 깨닫는다.


<그림3>영화 〈이치 더 킬러〉 Ⓒ 야마모토 히데오


<그림4>〈히카리맨〉 Ⓒ 야마모토 히데오


영화는 원작의 도입부 전개를 대략 비슷하게 따라가는 듯 보인다. 그러나 나코시가 이토의 제안을 수락하는 과정을 충동적으로 그려 오히려 원작에서 마련했던 개연성을 왜 날렸는지 의구심을 품게 만든다. 이토가 하필 나코시에게 수술을 제안한 이유 역시 모호한 것이 신경 쓰였는데 아니나 다를까, 영화를 중반부터 원작과 다른 전개로 비틀면서 그 동기를 평범한 반전으로 소모해버린다. 이 영화화의 첫 번 째 패착은 이토 캐릭터를 어설픈 빌런으로 만든 것이다. 정해진 빌런이 따로 없으면서도 원작의 전개가 흥미진진했던 이유는 이야기의 화자인 나코시가 주인공인 동시에 빌런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을 알기 위해 주변을 침범하고, 두개골을 뚫은 구멍의 두께를 벌려나간다. 나코시가 자신의 내면에서 정말로 무엇을 숨기고 있는지가 밝혀져야 할 메인 미스터리인데, 영화는 이걸 안일하게 다루는 두 번째 패착 을 저지른다.

세 번째 패착. 트리퍼네이션 없이도 상대의 호문쿨루스를 볼 수 있었던 나나 코의 등장은 나코시의 숨겨진 과거와 함께 원작의 결말로 향하는 중요한 기점이 었다. 그러나 영화는 원작에 없던 또 다른 나나코를 만들고, 나코시와 관련한 숨겨진 과거에 겨우 교통사고를 집어넣는다. 원작에서 나나코와 나코시의 서로에 대한 기억 상실은 우연한 사고가 아니라 철저한 의도였다. 서로의 내면을 볼 수 있었던 연인이 끝내 거짓된 외면을 선택해 헤어진 사연이 영화에선 통째로 사라졌다. 호문쿨루스란 나코시 자신의 내면이 대상에게 전이(轉移)된 것이고, 이 일그러진 형상들이 다시 나코시에게 역()전이하는 원인을 알고자, 마침내 직시해야 했던 텅 빈 내면의 못생긴 맨얼굴도 영화에는 없다. 이 지경이 되니, 영화는 결말로 갈 길을 잃어버린다.

각색 작업을 감독 포함 세 명의 작가가 했음에도 이렇게 된 건, 아무래도 구현하기 어렵고 또 관객이 이해하기 어려울 거라 지레 짐작하여 하향평준화식 각색을 하면서 원작의 중요한 테마를 저버린 결과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이토록 각색을 헤맨 결과가 나름대로 괴작도 아니고, 그냥 평작조차 안 되는 영화화의 시도에 그쳤다. 나는 영화가 원작의 선마저 넘어주길 기대했다. 주인공이 그토록 외면에 집착한 이유 가 못생긴 자신의 실제 외모 때문이라는 단순명쾌하면서도 너무나 허탈한 진실 이상의 것을 기대했다. 그러나 영화는 원작의 선도 지켜내질 못했다. ‘인간이란 도대체 무엇인가?’에 대한 원작의 선 넘는 고민이 생략된 영화는 실사로 보면 근사할 거라 기대한 만화의 명장면들마저 우스꽝스럽게 만들어버렸다. 그나마 원작에 충실했던 장면인데 영화와 함께 감흥이 팍 식어버린 것이다. 낫으로 손가락을 베는 로봇 야쿠자 소년은 유치해졌고, 기호의 모래 괴물 여고생은 오해하기 좋은 장면으로만 소모 되고 말았다. 영화로만 접한 관객이 원작을 그저 그런 작품으로 오해하지나 않았으면 하고 바라게 될 줄이야.

현대 영화의 거장들은 대부분 호러로 커리어를 시작했다. 호러에서 캐릭터와 관객의 심리와 감정을 조율하고 통제하는 능력은 언젠가 장르영화 전체에서 빛을 발하게 되어 있기 때문. 미이케 정도로 미친 것 같진 않아도 그 역시 나름대로 다카시라서 기대했건만, 시미즈 다카시의 호문쿨루스는 내게 대표적인 미스매치의 사례로 남을 것 같다. 원한 품은 귀신보다 인간의 내면이 훨씬 더 무섭다는 것을, 안타깝 게도 이 호러 감독은 증명해내질 못했다. 아쉬움의 망상이지만 야마모토 히데오의 위대한 만화를 제대로 영화화하려면 큐어, 회로, 절규의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 정도는 모시고 왔어야 했던 것 같다. , 어쨌거나 넷플릭스에 팔았으니 제작사가 큰 손해는 안 봤을 테고 그럼 된 건지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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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민

만화평론가, 시나리오 작가
<탐독의 만화경>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