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서’, 다른 말로 ‘규칙’이다. 더 막중한 느낌을 담은 언어로는 ‘명령’이다. 군대 에서 이 세 단어가 지니는 무게는 그곳에서 살아내고 있는 군인들에겐 ‘목숨’의 무게와 같다.
질서, 규칙, 명령에 미세한 균열이 생기면 군인의 목숨에도 균열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런 상태를 지속하다가 어느 순간, 사소한 외부의 충격이 가해지면 순식간에 모든 것이 파괴된다. 목숨을 내놓고 살아야 하는 공간이지만, 그곳에 서 지내는 군인들은 실상 느끼지 못한다. 그래서 더 쉽게 사람의 목숨이 날아 가는 곳이다.
▲<그림1>〈민간인통제구역〉 Ⓒ OSIK
남과 북을 통틀어 이렇게 위험한 곳은 수없이 많다. 그중에서도 적과의 긴장 상태가 최고조로 유지될 수밖에 없는 ‘민간인통제구역’ 안이라면 더더욱 저 세 단어가 지니는 무게감은 절대적이다.
웹툰 〈민간인 통제구역〉은 군대 내의 질서가 깨지는 순간, 인간들의 내외 면이 파괴되는 과정을 적나라하게 펼쳐 보이는 작품이다. 병영을 배경으로 한 여러 작품 중에서도 특히 이 작품은 지나칠 정도로 진지하고 눅눅하며 무겁다. 그렇지만 작품 전반을 지배하는 이 진지함과 눅눅함은 독자들에게 집 중력을 요구하고 흡입력을 선물하는 기능을 한다. 그리고 접근 방식은 한없이 처절하다. DMZ GP의 폐쇄된 공간에 배치된 청년들은 겉으로는 혈기왕성한 젊은 남자들로 보이지만 사회의 여러 인간 군상들이 그렇듯, 나약하고, 사 악하고, 이기적이고, 진실을 가리는 수법엔 더없이 민첩하고 명민하다. 겉으로 드러나는 가혹행위나, 작중 캐릭터들 사이의 불협화음은 의외로 다른 작품에 비해 표현이 절제된 편이다. 이 점이 오히려 이 작품에 팽팽한 긴장감을 더해주는 요소이다.
고문관 조충렬의 우발적인 실수로 비롯된 전방 4사단 14연대 수색중대 2소대의 북한군 사살 사건은 순식간에 걷잡을 수 없는 수렁으로 빠져든다. ‘조 폐급’이란 무지막지한 별명으로 불리던 고문관 조충렬은 GP 내의 질서의 균형을 가까스로 유지하는 조건이었다. 병영 내의 모두가 그를 멸시하고 위험 요소로 인지하고 있었다. 조충렬의 존재는 위험했지만, 그 자체가 파괴력을 가지지 못했기에 안심했다고나 할까. 하지만 북한군 리준택의 등장으로 순식간에 질 서는 파괴된다. 이제 이들에게 부여된 임무는 적을 감시하고 아군을 지키는 것이 아닌, 수렁을 무사히 빠져나와서 움푹 팬 수렁의 입구를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게 덮는 일이다.
▲<그림2>〈민간인통제구역〉 Ⓒ OSIK
OSIK 작가는 흑과 백의 농도로 묘사되는 치밀한 그림 안에 민간인통제구역 안에서 벌어지는 모든 위험한 일들과 거짓말과 선동들을 버무려낸다. 그리고 작화에 표현되는 모든 동작 효과선의 사용은 철저하게 절제됐다. 그에 맞춰 적절하게 배치되는 효과음은 캐릭터들의 선명한 동공들과 어우러진다.
지금까지는 적은 글은 웹툰의 옷을 입은 작품 〈민간인 통제구역〉의 미덕을 설명한 것이다.
웹툰으로 보아온 작품을 종이책의 실체감을 가진 모습으로 모두 만날 수는 없다. 웹툰이 출판만화로 탈바꿈해서 독자들에게 다가가는 데는 갈수록 시간과 비용의 투자가 커지는 게 요즘의 환경이다. 이 작품의 태생은 데이터가 아닌 종이 만화다. 화지에 그려진 그림을 하나하나 스캔해서 데이터로 변환해 웹툰으로 독자들과 만났던 것. 그리고 지금 세로 스크롤 이미지의 웹툰이 세련되고 소장하기에도 딱 좋은 ‘만화책’으로 변신했다. 이 작업을 통해 처음 작가의 손에 서 그려지고 새겨진 모든 이미지는 출판만화의 페이지 연출로 재현되었고, 그 결과물은 매우 성공적인 모범 사례를 만들어냈다.
이 작품이 ‘2021 부천만화대상 신인만화상’을 수상한 것은 당연한 기본 옵션이고 이 작품이 출판 편집자의 기획과 윤색 그리고 북디자이너의 노고를 통해 ‘2022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책’의 하나로 선정된 것은 ‘만화책’이 흔히 받기 어려운 명예로운 훈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