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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로맨스 장르가 지녀야 할 미래 지향성은 무엇인가?

<지금, 만화> 16호에 커버스토리로 실린 글입니다.

2023-06-08 백은지

한국 로맨스 장르가 지녀야 할 미래 지향성은 무엇인가?

2022년 현재, 대한민국은 로맨스 웹툰의 시대다. 일상에 지친 평범한 여자 주인공은 웹소설 속 캐릭터로 빙의되거나, 불의의 사고 후 회귀를 반복한다. 간혹 억울한 누명을 쓴 주인공이 어린 시절로 회귀하거나, 다른 캐릭터로 빙의하여 이 세계(異世界)로 가기도 한다. 그곳에는 황제와 황녀, 왕자와 공주, 귀족 가문의 화려하지만 가혹한 삶이 기다리고 있고, 주인공은 그들의 원수나 자녀, 혹은 연인이나 친구가 되어 예정된 자신의 미래를 바꾸고자 노력한다. 다른 한쪽에서는 사내 연애로 바쁘다. 안 좋게 시작된 남자 주인공과의 인연은 예측불허로 흘러가고, 여자 주인공은 온갖 시련과 라이벌을 이겨내고 그와의 사랑을 쟁취한다. 간혹 고등학교나 조선시대로 그 배경이 바뀌기도 하지만, 로맨스 속 여주인공은 가혹한 시련을 이겨내고 사랑을 쟁취한다.

이렇듯 지금 우리는 로맨스의 홍수 속에 살고 있다. 그러나 한국 만화에서 로맨스가 로맨스로 온전히 불리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오랜 기간 한국 로맨스는 순정만화라는 이름으로 불리다가, 웹툰의 시대에 이르러 비로소 자신의 본래 이름을 되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한 발짝 한 발짝 성장하던 한국 로맨스 웹툰은 어느 순간 원작 웹소설에 갇혀 버렸고, 독자들도 슬슬 빙의와 회귀, 이세계를 배경으로 한 로맨스 판타지에 지쳐가고 있다. 또한 로맨스 웹툰의 전성시대라고 하지만 역설적으로 영상화를 기본으로 하는 OTT 플랫폼 시장에서 로맨스 판타지 장르는 외면받고 있다.

그렇다면 한국 로맨스 웹툰의 시대, 한국 로맨스가 지녀야 할 미래 지향성은 무엇인가. 여기에서는 과거 순정만화부터 현재까지 로맨스 웹툰의 흐름을 알아보고, 앞으로 한국 로맨스 웹툰이 지녀야 할, 미래 지향성에 대해 이야기해 보도록 한다.

 

로맨스로 규정하기에 너무 컸던 1980~90년대 한국 순정만화

커도 너무 컸다. 로맨스, 일명 사랑 놀음이라고 규정하기에 1980~90년대 한국 순정만화는 너무도 거대한 세계와 가능성을 품고 있었다. 1980년대의 혹독한 검열과 사랑 타령’, ‘기형에 가까운 과한 그림체라는 악의 섞인 편견 속에 서도, 한국 순정만화는 자신의 운명에 맞서 싸우는 주체적 여성을 그리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간혹 그것은 거대한 역사적 소용돌이 속에서, 광활한 우주 공간에서, 또는 현실의 삶 속에서, 또는 한국 고대 역사 속으로 자리를 옮기며 재현되었다. 본래적 의미인 순수한 정을 그려낸 만화라고 규정하기에 1980년대 한국 순정만화는 순수한 정이상의 것을 담아내기 시작했고, 로맨스로 제한하기에 너무도 방대한 여성 서사를 쏟아내고 있었다.

1990년대로 넘어와 한국 순정만화는 다양한 장르와 결합하면서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1990년대 새로운 세대의 감성을 감각적인 연출로 담아내면서, 여성 독자를 넘어 남성 독자들에게도 열광적인 지지를 받았다. 화이트, 나인같은 준 성인 여성 독자 대상의 만화잡지가 창간되면서, 한국 순정만화는 여성의 일상적 삶뿐 아니라, ()과 사랑, 동성애자 등 성소수자를 넘나들며 그 외연을 넓혀 나갔다. 만화 연구가들도 순정만화라는 용어가 한국 순정만화를 규정하기에 너무 오래된 용어라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하지만 청소년 보호법이 발효되면서 검열이 다시 시작되고 만다.

2000년대 초중반, 검열의 역풍 속에 서도 한국 순정만화는 , 하백의 신 부, 탐나는도다, Feel So Good,

씨엘, 파한집, 루어같은 주옥같 은 작품들을 내놓으며, 그 명성을 이어 나갔다. 하지만 시대는 종이가 아닌 웹 을 선택했고, 2003년 포털 사이트에서 웹툰이 서비스되기 시작하면서, 순정 만화는 종이만화에서 웹툰으로의 탈피를 요구받았다.

<그림1>〈별빛 속에〉 Ⓒ 강경옥          <그림2>〈불의 검〉 Ⓒ 김혜린                 <그림3>〈아르미안의 네 딸들〉 Ⓒ 신일숙


웹툰의 시대, 일상으로 온 로맨스

2000년대 초중반 웹툰 시장은 네이버웹툰과 다음 만화속세상이 주도했다. 웹툰의 태생 자체가 일상툰이었기에, 초창기 포털 사이트는 이전 잡지만화 시대 때처럼 성별이나 장르로 세션을 구분하지 않고, 요일별로 웹툰을 연재하면서 장르 구분이 모호해지기 시작했다. 만화잡지 중심으로 순정만화와 소년만화를 분류하던 구분점이 희미해지고, 전통적인 순정만화 그림체가 다변화되면서 그림체에 의한 구분도 사라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모호함 속에 로맨스라는 장르가 도드라지기에 너무도 많은 장르가 초기 웹툰에 태동하고 있었고, 세로 스크롤의 제약은 로맨스의 아름다운 미장센과 섬세한 인물의 감정을 전 하기에 한계가 많았다.

웹 환경에 적응하기 시작한 로맨스 웹툰은 2010년 전후 본격적으로 인기 를 끌기 시작한다. 순끼의 치즈 인 더 트랩, 232연애혁명, 한경찰의 스피릿 핑거즈, 상하의 연놈, 야옹이의 여신강림와 같이 대학교나 중·고등 학교에서 벌어지는 로맨스를 담아낸 작품들이 큰 사랑을 받았다. 다른 한편에 선 추혜연의 창백한 말과 같이 전통적인 순정만화 그림체와 문법을 지닌 로맨스도 사랑을 받았다. 그런가하면 20대 여성의 일과 사랑을 깜찍한 상상력으로 다룬 이동건의 유미의 세포들과 외모 중심의 편견에 맞서 진정한 사랑을 이루는 기밍기의 내 아이디는 강남미인같은 작품들도 드라마화되며 큰 인기를 끌었다.

위에 언급한 작품들의 특징은 로맨스를 다룸에 있어 일상적 삶을 지향하고 있다는 것이다. 치즈 인 더 트랩은 대학 생활의 로맨스뿐 아니라, 대학 새 내기의 대학 생활과 고초를, 연애 혁명, 스피릿 핑거즈, 연놈은 학교라는 공간에서 벌어지는 학원 로맨스에 중점을 두고 있다. 유미의 세포들은 직장인 유미가 연애를 통해 자신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짐으로써 성장하는 모습을, 내 아이디는 강남미인에서는 성형미인 강미래가 외모 중심의 세계에 맞서는 내용을 다루고 있다. 이처럼 웹툰의 시대에 이르러, 한국 로맨스 만화 는 일상적 삶 속에서의 여성의 사랑을 다룸으로써, 비로소 로맨스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그림4>〈내 아이디는 강남미〉 Ⓒ 기맹기          <그림5>〈연애혁명 Ⓒ 232

<그림6>〈유미의세포들〉  이동건                 <그림7>〈치즈인더트〉  순끼


노블코믹스의 시대, 로맨스의 판을 바꾸다.

20134월 야심차게 오픈했다가 한 차례 고배를 마신 카카오페이지의 웹툰 서비스는 2014년 웹소설과 웹툰 서비스를 시작으로, 2015년 웹소설을 웹툰화한 코미컬라이징 작품을 노블코믹스라는 브랜드로 런칭하면서 도약의 서막을 열었다. ‘선물함’, ‘기다리면 무료같은 공격적인 마케팅으로 노블코믹스가 잇따라 좋은 성적을 내고, 2016년 연재를 시작한 노블코믹스 김비서가 왜 그럴까(원작 정경윤, 만화 김명 미)2018년 드라마로 제작되어 소위 대박을 치면서, 카카오페이지의 노블코믹스는 웹툰 시장을 선점하기 시작했다. 이 당시 노블코믹스 시장을 견인한 인기 장르는 바로 로맨스였다. 카카오페이지의 주요 독자층인 20~30대 여성 독자는 로맨스 만화를 결제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고, 이들의 열렬한 지지 속에 로맨스 웹툰은 성장을 거듭할 수 있었다.

흥미로운 점은 이 당시 인기 로맨스 웹툰 대부분이 웹소설을 원작으로 한 빙 의나 회귀를 소재로 했다는 것이다. 인소의 법칙(원작 유한려, 만화 아현), 황제의 외동딸(원작 윤슬, 만화 리노), 이세계의 황비(원작 임서림, 만화 이영유), 그녀가 공 작가로 가야했던 사정(원작 밀차, 만화 고래), 버림받은 황비(원작 정유나, 만화 인하) 같이 빙의나 회귀, 타임 슬립을 통해 이세계를 배경으로 한 로맨스 판타지물이 인기를 끌었다. 다른 한편에서는 김비서가 왜 그럴까(원작 정경윤, 만화 김명미) 성 공 이후, 사내 연애를 소재로 한 오피스물도 인기의 한 축을 담당했다.

웹소설을 원작으로 한 노블코믹스의 성장은 웹툰 제작 전문 스튜디오 설립을 가속화했다. 웹소설 시장에서 인기가 검증된 웹소설이 끊임없이 안정적인 스토리를 공급하면서, 일정 퀄리티를 유지하면서 빠르게 제작할 수 있는 웹툰 스튜디오의 설립은 어쩌면 필연적인 것이었다. 인기 있는 소재인 빙의와 회귀를 소재로 한 로맨스 판타지는 끊임없이 양산되었고, 독자들이 이 소재에 피로감을 느낄 즈음, 터지고 말았다. 전 세계적으로 코로나19 팬데믹의 공포가 시작된 것이다.


코로나 시대, 한국 로맨스가 해외 판로를 뚫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세계 경제는 위축되었지만, 비대면 서비스가 활성화되면서 한국 웹툰은 해외로 판로를 넓히며, 2의 도약을 시작했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이 발간한 2021 하반기 및 연간 콘텐츠 산업 동향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국내 만화산업 매출은 전년 대비 24.0% 성장해 콘텐츠 분야 가장 높은 증가세를 보였으며, 해외 수출면에서도 34.4% 성장하며 명실상부 K-콘텐츠의 대표 주자임을 증명해 내었다. 네이버의 라인망가는 북미에서, 라인망가보다 3년 늦게 진출한 카카오의 픽코마는 일본 앱마켓 시장에서 각각 1위를 차지하는 등 한국 웹툰의 저력을 보여주었다.

흥미로운 것은 해외 수출을 주도한 주요 장르 중 하나가 바로 로맨스라는 것이다. 여신강림과 모랑지의 소녀의 세계, 상수리나무 아래(원작 김수지, 만화 나무, P)는 북미뿐 아니라 스페인과 태국에서도 큰 인기를 끌었고, 재혼황후(원작 알파타르트, 만화 히어리, 숨풀)는 미국, 태국, 대만, 프랑스, 스페인에서 최고 인기작 중 하나로 인기 몰이를 하며 해외 수출을 견인했다.

사실 한국 웹툰의 해외 수출은 조석, 강풀을 위시하여 오래전부터 이루어졌다. 하지만 한국적인 색채가 강하게 가미된 병맛, 드라마 장르였기에 세계의 벽을 넘는 데 한계가 있었다. 로맨스 장르의 무국적성은 세계의 벽을 넘어, 한국 웹툰이 사랑받을 수 있는 새로운 판로를 만들어 주었다. 일명 사랑 타령이 전 세계에 통한 것이다.


한국 로맨스의 미래 지향성

2022년 현재, 한국 웹툰은 로맨스에 점령되었다고 해도 무방할 만큼, 다양한 플랫폼에서 주력 장르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하지만 그 호황만큼 위기가 여기저기서 감지된다. 대박 난 소재와 장르가 유행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빙 의, 회귀, 이세계을 위시한 로맨스 판타지 장르의 편중 현상은 너무 오랜 기간 그 피로도가 지나치게 누적되었다. 빙의, 회귀, 이세계 소재의 로맨스 판타지 가 카카오페이지를 떠나 네이버웹툰을 점령했을 때 느꼈던 그 아찔함은 로맨스 장르가 더 이상 창작이 아닌, 공정(工程)의 영역에 도달했음을 눈치챘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 로맨스에 필요한 것은 공정이 아닌 창작이다. 웹소설 원작이 아닌, 로맨스 웹툰만의 오리지널 스토리가 필요하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OTT 매체가 확장되면서 웹툰은 원 소스로서의 가장 중요한 자원임이 입증되었다. 하지만 이세계를 배경으로 한 로맨스 판타지 장르는 웹툰의 영상화에 제 약이 될 수밖에 없다. IP(지적재산권: Intellectual Property) 확보의 중요성이 급부상하고 있는 지금, 한국 로맨스 웹툰이 2차 저작권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빙의, 회귀, 이세계 소재의 웹소설에 기댈 것이 아니라, 다양한 소재의 오리지널 스토리 창작이 우선되어야 한다.

한편, 17, 18금 로맨스 웹툰의 인기도 심상치 않다. 네이버웹툰이 최근 18금 로맨스 웹툰을 다음의 카카오페이지는 17금 로맨스 웹툰 연재를 늘리며, 주 독자층의 확대를 모색하고 있다. 문제는 18금 로맨스가 아니라 지나친 선정성이다. 카카오페이지는 이미 오래전부터 아슬아슬한 수위의 15금 웹툰을 서비스하며 논란이 일었다. 네이버웹툰과 카카오페이지가 한국 웹툰 시장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며, 다양한 연령대가 쉽게 접근할 수 있는 플랫폼인 만큼, 좀 더 조심스러운 접근이 필요하다.

다시 돌아와 로맨스 홍수의 시대다. 그 홍수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과거 한국 순정만화가 지녔던 다양성과 고민에서 그 답을 찾아야 할 것이다.


필진이미지

백은지

서원대학교 웹툰콘텐츠학과 교수
만화 비평가
만화 스토리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