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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가라시 다이스케의 〈움벨트〉: 노년이라는 신세계

<지금, 만화> 16호 Essay 에 실린 글입니다. <움벨트>/글,그림 이가라시 다이스케

2023-06-07 박산호

노년이라는 신세계

이가라시 다이스케의 〈움벨트〉

일본에서 먼저 만들어지고, 이어서 한국에도 리메이크 돼 유명해진 영화 리틀 포레스트에 만화 원작이 있다는 사실 은 아는 사람이 꽤 많을 것이다. 그 원작을 그린 이가라시 다이스케. 본인이 실제로 귀농해서 살아가는 이야기를 만 화로 그려 오래전부터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작가의 단편집인 움벨트를 인터넷 서점에서 우연히 보고 주문해서 읽게 됐다.

움벨트라는 단어가 생소해 검색해 보니 독일어인 움벨트(Umwelt)의 사전적 의미는 환경이나 주변 환경을 가리키는 말로 각각의 생명체가 경험하는 환경과 세계가 달라서 그에 따른 시각과 세계관 역시 다르다는 생각을 품고 있다고 한다. 이 단어를 철학적으로 좀 더 깊이 파고 들어가는 것은 내 수준에선 불가능하지만 이가라시 다이스케의 이 단편집을 보면 그 의미를 직관적으로 알 수 있다.

▲<그림1>〈움벨트〉 Ⓒ 이가라시 다이스케


전설의 가루다가 된 할머니의 작은 날개

여기 수록된 열 편의 단편 중 나의 마음을 가장 강렬하게 사로잡은 이야기는 노년의 삶을 다룬 가루다마사 요시와 할머니. 먼저 가루다는 재 활용업체를 운영하는 두 청년이 깊은 산속에 혼자 사는 할머니가 팔고 싶은 물건이 있다고 해서 찾아가는 이야기다. 쥐들이 찍찍 소리를 내며 돌아다니고, 오래된 잡동사니들이 쓰레기처럼 쌓여 있는 낡은 집에서 그들은 가루다라는 샴 왕국의 의상을 발견한다. 그것은 젊었을 적에 가극단의 무희로 활동했던 할머니가 입었던 것.

할머니는 전설 속의 거조인 가루다가 작은 새인 인간으로 환생해 살다가 마침내 다시 아름다운 가루다가 된다는 춤을 그 청년들 앞에서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추고 싶어 한다. 노인이 그러다 쓰러지기라도 할까 봐 청년들은 귀찮아하면서도 예의상 수락하는데. 할머니가 펼친 그 짧은 공연에서 그들은 정말 작은 새가 거조로 변하는 모습을 본 것 같은 환상에 빠지게 된다.

노인은 자신이 점점 줄어드는 작은 새가 되어가면서 청년들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과 소통하지 못하게 되는 것 같다며, “죽음도 이처럼 이승과 서로 다른 세계에서 동시에 존재하는 게 아닐까.”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던진다. 그리고 이 의상은 그냥 간직하기로 하고 도시로 떠나는 청년들을 굽어보는 거대한 새의 그림자가 비치는 장면으로 짧은 이야기가 끝난다. 그 마지막 장면을 보는 순간 왠지 모르게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그런 한편으로 할머니의 이야기를 더 듣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작가는 마치 그런 내 마음을 아는 것처럼 마사요시와 할머니라는 다음 이야기를 통해 노년의 세계를 설득력 있게 그려냈다.


이야기는 이렇다. 주인공인 마사요시는 할아버지의 장례를 치른 후 할머니가 점점 작아지는 것 같다는 엄마의 걱정을 듣고, 할아버지의 1주기인 근 1년만 에 할머니를 보러 갔다가 눈에 띄게 작아져 버린 모습에 깜짝 놀란다. 만화 속에 처음 등장한 할머니는 마사요시가 허리를 한참 숙이고 봐야 할 정도로 작아져 있다. 마치 어른과 아이처럼 키 차이가 나는 두 사람.

마사요시는 할머니가 원래 이렇게 작았나, 고개를 갸우뚱한다. 아이처럼 작아진 할머니는 일상을 이어가기 버겁다. 키가 작아지면서 조리대도 손에 닿지 않고, 냉장고의 냉장실도 손을 뻗을 수 없을 정도로 사방이 높고 거대해진 세상에서 할머니는 위태위태하게 살고 있었다. 수도에도 손이 닿지 않아 생수를 잔뜩 사두었지만 인터넷은 마우스로 접할 수 있어 아직까지 그럭저럭 살고 있다. 다만 돈을 찾아야 하는 ATM기 역시 산맥처럼 높아서 손자에게 카드를 주며 돈을 찾아다 달라고 부탁한다.

그 장면을 보다 보니 마음이 저릿저릿해지면서 나의 엄마가 떠올랐다. 올해 초 엄마는 집에서 크게 다치셨다. 안방 장롱 위에 있는 뭔가를 내리려고 의자를 딛고 올라섰는데 하필 그 의자가 바퀴 달린 의자여서 핑그르르 도는 바람에 엄마가 밑으로 떨어지셨다. 그러면서 바닥에 힘껏 내동댕이쳐져서 한동안 꼼짝도 못하고 방바닥에 누워 있던 모습을 같이 사는 여동생이 시간이 한참 흐른 후에야 발견하고 나와 병원에 연락했다. 난데없는 연락을 받고 쩔쩔매는 나와 달리 동생은 놀란 와중에도 침착하게 앰뷸런스를 불러 엄마를 모시고 응급실로 갔지만 코로나 시국이라 입원도 쉽지 않았고, 가족 면회도 불가능했다. 결국 힘들게 입원한 병원에서 넘어지면서 왼쪽 팔꿈치 뼈가 부러지고, 몇 년 전에 인공 관절 수술을 받은 고관절에 금이 갔다는 진단을 다음 날에야 받았다. 수술하고 며칠 후에야 비로소 면회가 허락돼서 간병을 하러 엄마를 보러 갔다.

미리 각오는 했지만 다치면서 하반신을 움직일 수 없게 된 엄마는 무섭도록 수척하고 작아져 있었다. 당최 입맛이 없어 하루에 바나나 하나로 끼니를 때우는 바람에 순식간에 체중이 10킬로그램 넘게 줄어버린 엄마를 보면서 끝도 없는 두려움과 슬픔이 마음속을 스쳐 지나갔다. 혼자 몸으로 나와 동생을 키워낸 것도 모자라 손자까지 키워낸 엄마. 평생 낮잠 한 번 자지 않고 언제나 바쁘게 일하던 힘세고 살집 좋던 엄마의 모습은 다시 볼 수 없을 거란 직감이 들었고, 그것은 불길하게도 현실이 됐다.


나와 다른 시공간 속으로 아련하게 작별하다

다시 만화로 돌아와, 돈을 찾아온 마사요시가 할머니를 다시 찾아왔을 때 할머니는 손에 들고 놀 수 있을 정도의 인형처럼 작아져 버렸다. “나이 들면 키도 줄고 몸도 준다더니.”라고 뇌까리던 할머니는 몸에 맞는 옷이 없어 직접 옷을 지어 입지만 옷이 티슈보다 무겁다고 힘들어한다. 몸이 작아지니 계단을 오르내리기도 힘들다. 나이를 먹으면 이것저것 불편해지기 마련이라는 만화 속 할머니의 말에 관절이 아파서 계단만 보면 겁부터 내시는 엄마가 문득 떠올라 다시 마음이 아릿해졌다.

그 낙상 사고를 당한 후 엄마가 영영 하반신을 쓰지 못하게 될까봐 우리 가족은 몇 주 동안 숨죽이며 기다렸다. 다행히 엄마는 특유의 끈기와 성실함으로 재활 훈련을 열심히 받아서 다시 걸을 수 있게 됐다. 그러나 그때 빠진 체중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고, 바람만 불어도 날아가 버릴 것처럼 작고 앙상해진 엄마를 볼 때마다 아슬아슬한 마음이 들곤 했다. 저렇게 엄마 혼자 걸어 다니게 놔둬도 괜찮을까.

만화 속 마사요시도 같은 마음이 들어서 점점 작아지는 할머니에게 같이 살자고 제안한다. 그렇게 같이 지내면서 마사요시는 전과는 판이하게 달라진 할머니의 새로운 모습을 보게 된다. 이제 손가락처럼 작아져 버린 할머니는 몸이 작아진 만큼 성격이 조급해진 것 같다.

이건 단순한 나의 착각인가, 고민하는 마사요시가 할머니와 같이 누워 밤을 맞이하는데 할머니가 그런다. 어두워지면 집에 있는 많은 생물들이 내는 소리가 다 들린다고. 마치 숲속에 있는 것 같다고. 그러면서 이렇게 말한다. “나이가 들 면 보이는 방식이 달라져. 인생 경험의 산물이지.” 그러더니 할머니는 금방 쿨쿨 잠이 들어버리지만 금방 다시 잠이 깨서 발딱 일어난다. 그걸 보고 마사요시는 문득 깨닫는다. 할머니와 자신이 다른 시간 속에 살고 있다는 걸.

몸의 크기가 달라지고, 서로 느끼는 시간의 흐름도 달라진 두 사람은 점점 서 로를 볼 수 없게 되고. 어느 날 깨알처럼 작아진 할머니를 식구들은 더 이상 찾지 못해 실종신고를 낸다. 할머니는 사라지거나 죽은 게 아니라 손자와 같으면서도 서로 다른 세상에서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데. 이것이 바로 죽음인 걸까. 여전히 같은 시간과 공간에 존재하지만 서로 알아보지 못하는 것?

 

▲<그림2>〈움벨트〉 Ⓒ 이가라시 다이스케


점점 작아지면서 서로를 볼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시간이 결국 오는 것이 죽음이란 이 메시지는 슬프면서도 한편으로 소름끼치도록 정확하다. 작고 여윈 엄마와 같이 식탁 앞에 앉아 내가 좋아하는 사과나 엄마가 좋아하는 국수를 먹으며 우리는 조카에 대해, 동생에 대해, 나에 대해, 나의 딸이자 엄마의 손녀에 대해, 그리고 돈벌이와 세상살이의 지난함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지만 더는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종종 있다. 그렇게 우리는 서서히 이별을 준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면 더없이 슬퍼질 때가 있다.


필진이미지

박산호

소설가, 번역가, 에세이스트
『너를 찾아서』, 『어른에게도 어른이 필요하다』, 『단어의 배신』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