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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철의 〈제철동 사람들〉: 그래도 삶은 계속된다

<지금, 만화> 16호 Essay 에 실린 글입니다. <제철동 사람들>/글,그림 이종철

2023-06-09 천정한

그래도 삶은 계속된다

이종철의 〈제철동 사람들〉

작년에 방송된 포항 MBC 다큐 그 쇳물 쓰지 마라를 인상 깊게 보았다.

지금은 포스코, 내가 자란 포항에서는 흔히 종철, 포철이란 이름으로 불리는 그곳에서 노동자들이 빈번하게 당하는 각종 산업재해와 직업병을 조망한 프로그램이었다. 방송 이후 한국노총 포스코 노조에서 발표한 성명서에는 방송이 왜곡 편집되었다며 그동안 포스코가 지역사회에 하던 공헌사업을 일체 중단하고 지역 투자도 원천 차단하겠다는 메시지가 담겼다.

자신의 택배기사 경험을 바탕으로 까대기를 출간했던 이종철 작가가 전 작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유년 시절과 성장기를 담은 제철동 사람들을 내놓았다. 까대기출간 후 여러 채널에서 자신의 삶 속에서 경험하고 만나온 사람들을 작품에 담으려 한다는 작가의 인터뷰를 보았을 때 다음 작품도 그의 자전적 에피소드로 만화가 나오겠다 싶었다.

제철동 사람들이 나왔을 때 사실 무척 반가웠다. 나 역시 작가와 같은 제철동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동시대에 같은 공간에 살았던 사람으로서 이 작품을 보는 내내 작가의 기억과 내 기억을 비교해보았고 주인공 강이 캐릭터들에 몰입했다.

▲<그림1>〈제철동 사람들〉 Ⓒ 이종철


쇳가루와 땀내가 진동하는 제철동 사람들

포항제철이 생기면서 포철 3번 게이트 인근 마을에 직원들 주택 단지가 조성되는데 그곳이 바로 제철동(인덕동)이다. 공단이 생기기 전에는 주로 벼농사를 짓던 시골 마을이었는데 주택 단지가 들어서고부터는 마을의 절반이 도시화가 되었고 나머지는 달동네로 나눠졌다. 아버지가 포항제철이 다니는지, 하청(협력)업체에 다니는지, 그리고 주택 단지에 사는지 원주민들이 살던 안 동네에 사는지에 따라 그 집이 잘살고 못사는 경제적 신분이 극명하게 드러났다. 아이들은 그 신분에 따라 자기네끼리 친구 관계를 형성했고 들어내고 말을 하지 않았지만 누군가는 내적 우월감과 또 다른 누군가는 열등감을 갖고 자랄 수밖에 없었다. 이 부분은 이종철 작가가 좁은 길에서 상인, 농부, 하청, 일용직 노동자들이 사는 상가 마을의 풍경과 포항제철 정직원들이 사는 주택 단지의 풍경은 달랐다. 좁은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치 다른 세상이 펼쳐진 것 같았다.”라고 쓴 것에 잘 나타나 있다. 안동네 사는 아이들이 주택 단지에 있는 놀이터에는 주눅이 들어 잘 가지 않으려 했었고 서울말 쓰는 아이들을 싫어했던 일, 축구장 사용을 두고 주택 단지 아이들과 곧잘 신경전을 벌였던 일 또한 작가의 경험과 내 기억이 일치했다.

▲<그림2>〈제철동 사람들〉 Ⓒ 이종철


제철소에서 사고당하는 노동자들과 주변의 시선이 담은 제철보국편에 작가는 이렇게 쓰고 있다. “제철동에는 노동자가 많이 살았고 심심찮게 사고 소식이 들려왔다. 마을 사람들은 애써 무덤덤 하려 했다. 우린 그런 어른들의 모습을 배웠다.”

이제야 보이는 것편에는 식이 형 왼손에는 엄지손가락밖에 없었다.”는 문장으로 등장인물이 산업재해를 입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설명해주고 있다.

어릴 적, 친구 아버지가 몸에 쇳물이 튀어 사망했던 일이 있었다. 포항제철에 크고 작은 사고 소식은 친구들을 통해 빈번하게 들을 수 있었다. 때로는 그 친구 아버지의 일이기도 했고 동료의 일이기도 했지만 지금처럼 언론에 보도되는 일은 없었고 어른들은 침묵했다. 어른들은 자식들이 대학 가는 것보다 포항제철에 들어가 높은 급여와 안정된 생활을 바랐다. 그만큼 포항제철은 지역 사람들에게 꿈의 직장이자 성공의 척도가 되는 곳이었고 가족의 생계가 걸린 밥줄과도 같았다. 어쩌면 포항 사람들에게 포항제철이 그런 절대적인 존재였기에 서두에 언급한 MBC 다큐 방영 이후 포스코 노조가 밝힌 그 해괴한 대응도 설명이 될는지도 모르겠다.

주인공 강이 부모님의 가게 상주식당은 주택 단지와 안동네 그 경계에 있어서 점심 저녁으로 공단 노동자들이 식사를 해결하던 곳이었으리라. 포철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구내식당이 있어 식사는 거기서 해결을 하고 시내로 외식을 다녔기 때문에 상주식당은 주로 안동네 하청 노동자들이나 일용직 노동자들이 이용했을 것이다. 고된 노동과 가난에 찌든 서민들이 소주 한 잔으로 시린 가슴을 달래던 그런 가게들이 몇 곳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림3>〈제철동 사람들〉 Ⓒ 이종철


제철동 사람들에는 식당 아들 강이의 유년시절부터 20대까지 성장하는 동안 만난 여러 사람들이 등장한다. 평생 자영업을 해온 부모님과 식당 손님들이었을 철강공단 노동자들, 식당에서 일하던 이모들, 다방 누나들, 동네 자영업 하던 어른들, 그리고 가장 큰 영향을 주었던 친구들까지. 이종철 작가는 이렇게 사람과 노동에 관심을 가지고 만화를 그릴 수 있었던 것은 제철동에서 만난 이 들 덕분이라고 말한다. 한 소년이 어른이 되기까지, 그리고 어릴 적 꿈을 꾸었던 만화가의 길을 선택하여 지금까지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일들이 있었을까?

구성상 다 그려지지 못한 이들의 다음 이야기가 사뭇 궁금해졌다.

 

그래도 지속되는 제철동의 삶

이 작품이 여느 자전적 성장만화와 다르다고 느낀 것은 작가는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사실상 만화를 보는 독자는 철강공단 내 마을, 제철동 만의 독특한 지역성과 사회성, 그것을 온전히 삶으로 받아 안고 살아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고 듣게 된다는 점이다. 결국 작가는 사람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에서 전작 까대기와 마찬가지로, 자신을 통해 이 시대를 힘겹게 살아오고 있는 사람들을 작가의 따뜻한 시선으로 그리고 있었다.

작가의 말에 허구의 이야기가 아니라, 쇳가루 날리고 땀 냄새나는 우리의 이야기를 그리고 싶었다고 말한 것처럼 에피소드 하나하나에 땀 냄새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다. 자신의 자전적 이야기를 글과 그림으로 담았던 홍연식 작가의 마당 씨시리즈는 가족에 중심을 두고 그들의 일상과 내면을 독자들이 따라갔다면, 이종철 작가는 가족뿐만 아니라 주인공을 둘러싼 여러 사람들의 삶과 애환이 있어 독자는 장편 옴니버스를 보는 것 같다. 서민들의 일상이 그렇듯 작품에서 어떠한 인생반전이나 빅이슈는 없지만 기쁘면 기쁜 대로 슬프면 슬픈 대로 그렇게 하루를 열심히 살아가던 1980년대 우리 이웃들이 있어 꿈을 꾸며 내일을 살 수 있었다.

몇 달 전 고향마을 제철동을 찾았다. 그 동네를 떠나온 지도 30년이 지났으니 예전과는 너무 변해 과거의 모습을 찾기 어렵겠거니 했는데 우연히 내가 초등학교 때 살던 집과 골목길이 아직 남아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사람이 사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그때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가난과 우울감에 허덕이던 내 유년시절을 떠올렸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월이 지나 이렇게 나름대로 살아가고 있는 것을 보며 그래, 그래도 삶은 계속된다를 되뇌었었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이종철 작가와 제철동을 다시 찾고 싶다. 오랜 친구를 만난 것처럼 한참을 수다 떨 수 있을 것 같다.


필진이미지

천정한

문화잇다 대표, 전북대 문헌정보학과 외래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