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스 판타지, 보편적이고 다양한 욕망의 발현 공간 그리고…
이야기 콘텐츠는 당대의 다양한 욕망을 담아낸다. 욕망이 무엇인지 직시하게 하고 진실을 파악하며 대리실현 해주기도 한다. 현재 웹툰계에서 당대의 욕망이 직설적으로 드러나는 장르를 로맨스 판타지로 봐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주인공의 바람이 명확하고 그것을 이루는 것으로 스토리텔링이 진행되기 때문이다. 로맨스 판타지 장르가 여성 독자를 타깃으로 하며 전대의 여성 독자 타깃의 만화가 순정이란 이름으로 불리면서 여성의 욕망을 사랑의 실현으로 국한했던 시기가 있었기 때문에, 당연히 로맨스 판타지에도 사랑 이야기가 주를 이룰 것이란 편견이 있다. 그러나 실제로 로맨스 판타지 장르 중에서 사랑의 실현이 주된 욕망으로 나타나는 경우도 있지만 커리어 실현, 힐링, 연대 등 욕망의 다양성을 확인할 수 있다. 이렇게 현재성을 파악하는 바로미터로서 로맨스 판타지 장르의 의의를 살펴볼 수 있지만, 이야기가 인류의 삶에 기여했듯이 로맨스 판타지 장르도 당대 독자들에게 삶의 참조로 기능할 수 있을지는 생각해볼 만한 의제다.
모험과 공상, 비현실적이며 낭만적인 사랑 이야기로서의 로맨스
로맨스의 원류를 따라가 보면 중세 유럽에서 발생한 기사들의 모험담(Romance), 귀족 여성의 사랑을 나타낸 이야기(Roman)에서 출발한다. 시대가 거듭 변화함에 따라 합리주의, 고전문학의 발흥, 부르주아 계급 중심으로 새로운 가치관이 형성되어 가면서, 로맨스는 허구적이며 현실성 없는 이야기로 치부되었고 근대에 이르러 현실을 반영하는 이야기로서의 가치를 소설(novel)에 빼앗긴다. 주류에 속하지 못한 로맨스의 전통은 여성 작가와 독자가 주를 이루는 소설에 이름 붙여졌다. 낭만적, 비현실적 사랑 이야기란 의미를 로맨스에 가두면서 현실감 각이 소거된 무가치한 것으로 여겨지기도 했지만, 현대의 일부 비평가들은 로맨스가 소설과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연속적인 것으로 봐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
솔직한 욕망의 발현처, 로맨스 판타지
로맨스가 여성들만의 것으로 인식된 것은 전적으로 여성들의 의도가 아니었음을 로맨스의 원류와 변천을 파악하는 것을 통해 알 수 있다. 우리나라 만화계에서 순정이란 이름이 붙여진 것과 순정만화 잡지가 만들어져 여성 작가들의 작품을 모으고 여성 타깃의 순정만화 잡지를 만든 것도 마찬가지의 전통을 갖고 있다. 그런데 로맨스 판타지는 작가나 독자의 주체성이 상대적으로 더 부각된다. 놀이를 목적으로 인터넷 기반 서브컬처에서부터 촉발된 웹소설, 웹툰 창작과 장르 클리셰 생성은 창작자와 독자의 경계가 희미했기에 욕망은 더욱 투명하게 발현되었다. 게다가 로맨스 판타지 장르의 주인공은 이미 알고 있는 세계에 회귀, 빙의, 환생해서 원하는 것을 빠르게 성취만 하면 된다. 목표를 향한 투지와 바라는 대로 이루어지는 간단명료한 세계는 욕망을 드러낼 것을 강요하는 구조다.
로맨스 판타지의 하위 장르인 육아물 웹소설 원작자가 실제의 삶에서 돌봄과 사랑을 받지 못하고 불안한 가정사를 겪으면서, 이를 대리 해소할 창구로 사랑받는 유아기의 주인공을 내세운 글을 창작했다는 사례는 로맨스 판타지 장르가 창작자의 굴절 없는 욕망의 공간임을 인식하게 한다. 굳이 창작자의 이력을 살피지 않아도, 다양한 욕망을 갖는 로맨스 판타지 속 주인공들의 면면은 지금 현실의 우리와 닮아있으면서도 제각각 다르다.
이생망에서 이루지 못한 커리어를 완성하고 싶은 욕망
〈여왕 쎄시아의 반바지〉의 주인공은 현생에서 의상 디자이너를 꿈꿨지만 패턴사로 살다가 사고를 당하고 중세 유럽의 환경과 비슷한 이세계에서 평범한 여자아이, 유리로 빙의한다. 유리가 빙의한 세계에서는 의복 디자인이 발달하지 않아서 불편하고 우스꽝스럽게 입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고 현생에서 못 이룬 꿈이었던 의상 디자이너가 되기로 결심한다. 이미 습득한 의상 디자인에 대한 지식으로 승승장구하는 유리는 정복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왕이 된 쎄시아의 편안한 의복을 만들고 사업을 번창시킨다. 이세계에서 이루지 못한 꿈을 성취해가는 유리의 모습은 대리 실현의 표본처럼 보인다.
환생에 회귀까지 했으니 어떻게든 성공하고 싶은 욕망
〈이번 생은 가주가 되겠습니다〉의 주인공은 평범하게 살다가 금수저, 피렌티아 롬바르디로 환생하지만 가문에서 인정하지 않는 혈통을 가졌기에 갖은 수난을 겪으며 고생한다. 이세계에서라도 살아남기 위해 노력했지만 결국 환생한 가문도 망하고 피렌티아도 마차 사고를 당한다. 비극적으로 끝날 줄 알았는데 어찌 된 일인지 일곱 살 시절로 회귀한 그는 롬바르디 가문을 살리고 성공하기 위해 가주가 되기로 결심한다. 피렌티아는 환생해서 이세계에서 어떻게든 적응해 살다가 회귀를 기회로 삼아 욕망을 갖고 목표를 향해 전진한 사례다. 환생에다 회귀까지 했으니 이루지 못할 목표는 없어 보인다.
▲<그림1> 〈이번 생은 가주가 되겠습니다〉 Ⓒ 앤트스튜디오, 몬, 김로아
내가 정한 기준으로 힐링하며 살고 싶은 욕망
〈악녀의 문구점에 오지 마세요〉의 주인공은 공작가의 여식 멜데니크 바벨로아 로 빙의했다. 악녀 멜데니크는 악행을 벌인 탓에 비극적 결말이 예정되어 있는데, 빙의한 주인공은 원작을 활용하면서 살아남으려고 애쓰는 대신 어린 시절부터 동경해온 문구점 주인이 되기로 한다. 앞서 살핀 로맨스 판타지 작품 속 주 인공들에 비하여 멜데니크의 욕망은 작고 소소해보인다. 멜데니크는 가주가 된 다거나 의복 사업으로 큰 성공을 해야겠다는 목표는 아니지만 자신의 욕망에는 충실하다. 욕망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깨닫고 자신의 기준으로 삶의 목표를 세운 멜데니크는 그 어떤 주인공보다 주인공답다.
▲<그림2> 〈악녀의 문구점에 오지 마세요!〉 Ⓒ 제철무, 민절미, 여로은
인생의 주인공으로 살고 싶은 욕망
〈그 악녀를 조심하세요!〉에서도 현생에서 죽은 주인공은 로맨스 소설 속 조연인 악녀, 멜리사로 빙의해서 소설의 기준이 아니라 자신이 세운 기준으로 삶을 산다. 멜리사는 원작 작가의 의도를 벗어나 주변과의 관계를 재정립한다. 원작에서는 여성 주인공인 유리가 멜리사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여러 남성 주인공들의 사랑을 받다가 결국은 황태자와 행복한 결말에 이른다. 그런데 멜리사가 생각하기에 유리 곁을 맴도는 남성 주인공들은 유리를 주체적으로 살지 못하게 만드는 주범들이다. 멜리사는 유리가 남들이 정해놓은 틀대로 살지 않고 자신의 정체성대로 살 수 있도록 돕는다. 〈그 악녀를 조심하세요!〉는 여성 주인공들 간의 연대를 통해 주인공의 임무가 무엇이며, 그동안 로맨스 장르 속 수동적 프레임에 갇혀 있던 여성 주인공의 정체성에 대해 재고찰하도록 만들었다.
▲<그림3> 〈그 악녀를 조심하세요!〉 Ⓒ 열매, 푸른칸나, 뽕따맛스크류바
현실 독자의 윤리적 관점을 투사시킨 복수와 징벌
삶의 주인으로서 살겠다는 거대한 포부와 더불어, 현실의 독자로서 느끼는 특정 클리셰나 캐릭터에 대한 불만을 해결하고자 하는 의지도 로맨스 판타지 작품에 드러나는 욕망의 하나로 볼 수 있다. 독자로서의 자신을 투사하여 현실의 윤리관을 작품 속으로 끌고 들어와서 원작 속 악인 캐릭터를 거침없이 단죄한다. 〈그 악녀를 조심하세요!〉의 멜리사가 원작 속 남성 주인공들의 데이트 폭력에 맞서 싸우는 것, 〈내 동생 건들면 다 죽은 목숨이다〉 에서 원작에 빙의한 로잘리테가 어린 동생에게 비윤리적으로 접근하는 캐릭터들에게 복수하는 것, 이밖에도 많은 작품 속에서 못된 행동을 하는 악인들에게 징벌하는 내용은 주인공의 목표 성취만큼이나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만드는 지점이다.
로맨스 + 판타지 = 로맨스
이처럼 로맨스 판타지 장르에서 나타나는 욕망은 보편적이면서도 다양하다. 삶의 주체로서의 살기로 결심하고 당당히 살아가는 보편적 욕망과 자신이 정의 내린 삶의 기준에 따른 다양한 욕망이 그것이다. 독자의 윤리적 관점을 충족시키는 스토리텔링도 당대 욕망이 반영되는 중요한 지점이다. 또 로맨스 판타지에서는 사랑만을 강조하지 않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랑은 개인의 다양한 욕망 중 하나일 뿐이며 얼마든지 선택 가능하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오히려 사랑보다는 상상과 허구로 점철된 공간임을 자각하고 주인공의 열띤 모험을 강조해서 로맨스 + 판타지의 합성어에서 판타지의 특성이 더 강조된 것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패스파인더〉나 〈접근불가 레이디〉처럼 사랑에는 관심 없는 주인공의 모험과 성취를 다룬 작품과 〈빙의자를 위한 특혜〉처럼 현대 판타 지물에서 주로 사용되는 상태창 등의 활용은 일반적으로 사랑의 해피엔딩으로 일컬어지는 로맨스보다 판타지적인 면모를 돋보이게 만든다. 그런데 되짚어 보면 애초에 로맨스가 모험과 사랑이라는 두 가지의 원류로부터 파생된 것이었으므로 판타지의 특성이 덧입혀진 것이 전적으로 새롭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수 있다.
사랑만으로 만족할 수 없는 주인공
또한 로맨스 판타지 장르에서 사랑이 이전의 순정만화들과는 다르게 등한시된 것은 사실이나,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배제된 스토리텔링만 만들어지지도 않는다.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나 〈상수리나무 아래〉, 〈엔딩 후 서브남을 주웠다〉 같은 작품들은 사랑의 가치를 되새기게 한다. 이 작품들에서 내세우는 사랑의 가치는, 〈그 악녀를 조심하세요!〉에서 멜리사가 유리에게 강요된 사랑에 진저리를 쳤던 일방적인 방식의 사랑이 아니라, 자기 주도적인 사랑이다. 사랑이 이루어지면 행복한 결말을 맞는 로맨스 장르의 공식에 더하여 남성 주인공과 대등한 관계가 될 수 있도록 자신의 일을 갖고 열심히 노력하는 모습을 보인다.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의 바이올렛이 성공한 사업가인 윈터를 떠나 경제적인 자립을 꾀했던 것이나, 〈상수리나무 아래〉의 맥시밀리언이 사랑을 이룬 후에도 마법사로서 성장한 것, 〈엔딩 후 서브남을 주웠다〉의 피오니에가 영주가 된 것은 로맨스 판타지의 주인공이 사랑에 안주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기 주도적, 자기중심적 주인공이 우리의 참조가 되기 위해서는
로맨스 판타지 속 주인공들의 다양한 욕망은 자기 주도적이며 자기중심적이다. 결국 사랑, 커리어 실현, 힐링, 연대 등의 다양한 테마는 나의 의지와 기준으로 모든 것을 주도하겠다는 선언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로맨스 판타지의 주 인공, 스토리텔링이 독자들의 욕망을 대변하는 것은 분명하다.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삶의 주인이 되고 싶은 바람은 본인을 구원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일부 작품에서 여성들끼리의 연대를 통해 본인을 구원하는 일이 타인에게까지 확장되었지만 제한적인 관계에 한해서다. 사랑을 이루고 본인의 일을 프로페셔널하게 해내지만 근본적인 사회 구조를 개혁하거나 더 큰 공동체를 위한 노력은 미미하다.
고단하고 불완전한 삶과 현실 세계에 대한 위안을 주고 충실한 즐길거리가 되어준다는 점에서 로맨스 판타지 장르는 현재의 삶에 있어 참조 기능을 일부 수행하고 있다. 그렇지만 본인을 구원하는 일이 타인을 구원하고 세계를 구원하는 일로 확장될 수 있을지, 확장된 스토리텔링이 우리의 삶의 참조로 기능하여 후대에도 가치 있게 전해질지는 아직 미지수다. 모든 이야기가 인간 삶의 참조로 기능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여전히 로맨스 판타지 속 주인공은 보편적이면서도 다양한 욕망을 가지며 조금씩 성장하고 변화하고 있다. 그 변화의 방향이 나의 외연을 깨고 더 큰 세계로 나아갈 때 옛이야기 속 주인공은 신화가 되었다. 일시적 트렌드로 인식되는 로맨스 판타지가 미래에도 기억될 이야기로 남기를 바란다면, 주인공의 성장과 변화가 어디를 향해야 할지를 고민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