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계에 당도한 K-소녀들의 적응 혹은 탈출기
〈용왕님의 셰프가 되었습니다〉 와 〈후궁공략〉
어린 시절 나는 매일 같이 우편함을 확인하곤 했다. 누구나 알 법한 유명한 마법학교에서 입학통지서가 올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그 순수한 기대는 초등학교 졸업식이 되어서야 겨우 단념할 수 있었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던 옛말처럼 성인이 된 이후에도 종종 길을 걸을 때, 지하철을 탈 때, 하루를 마치고 침대에 누웠을 때, 다른 세계에서 눈 뜨는 상상을 하곤 한다. 하지만 마법학교 입학통지서를 기다리는 나이는 아니다 보니 이런 상상력의 공백을 다른 곳에서 채운다.
이세계물은 판타지 장르에서는 빠질 수 없는 키워드가 되었다. 특히 2010년대 이후엔 빙의, 회귀, 헌터, 아포칼립스, 등 다양한 단어와 조합되어 독자들에게 신선한 재미를 선사했다. 물론 이제는 그마저도 클리셰로 자리잡았지만, 여전히 웹툰 플랫폼 상위권에 이세계물 웹툰이 요일별로 한 자리씩 차지하고 있다. 오늘은 그 수많은 작품 중에서 두 작품을 소개하고자 한다. 부제를 붙이자면 ‘K-소녀의 특집’이라고 해두자.
K-유교걸의 손맛을 보여주는 만화
〈용왕님의 셰프가 되었습니다〉
인당수에 몸을 던진 심청이는 사실 용궁에 간 것이 아닐 수도 있다. 그렇다면 어디로 갔을까? 사실 그녀가 도착 한 곳은 전혀 다른 차원, 예를 들면 드래곤의 던전일수도 있다는 상상력에서 이 이야기는 시작된다. 문백경 작가의 웹소설을 원작으로 한 〈용왕님의 셰프가 되었습니다〉이다.
▲<그림1>〈용왕님의 셰프가 되었습니다〉 Ⓒ 문백경, 옥, 카라쿨
줄거리는 매우 간단하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모를 수 없는 전래 동화의 주인공 청이가 ‘용’궁이 아닌 베르키스라는 ‘용’이 지키는 던전에 불시착하고 그녀는 신묘한 생김새의 베르키스를 보고 그를 ‘용’왕님이라고 믿는다. 온종일 잠만 자는 무기력한 그를 위해 청이는 자신의 특기인 손맛을 살려 온갖 K-요리들을 선보이는 에피소드를 그리고 있다. 수많은 이 세계물 중에서도 이 작품을 선택한 이유는 바로 흔치 않은 힐링물이라는 점이다.
낯선 땅에 당도한 청이는 자신만의 방법으로 이 세계에 적응해나 간다. 심지어 만티코어, 리빙아머, 가고일, 골렘 등 판타지 소설에서나 볼 법한 등장인물이 그녀의 도움을 받아 동료가 되는데, 그 흐름이 마치 동화 《오즈의 마법사》를 떠올리게 해 과정마저 흐뭇하다. 거기에 눈치 없는 청이의 성격이 판타지 설정과 부딪히면서 오크족을 서유기의 저팔계처럼 용맹하고 영험한 분이라 오해한다든가, 수도원 성직자를 스님이라고 착각해 재미있는 장면들을 만들어낸다.
이 작품의 또 다른 힐링 포인트는 요리이다. 매 회차마다 등장하는 한식은 침샘을 자극하는 비주얼을 선보인다. 게다가 리빙아머의 장갑을 강판으로 사용해 감자전을 만들고, 아이스 골렘이 만든 서리로 빙수를 만드는 등 주변 환경을 적극 활용하는 주인공의 기지가 또 한 번 미소를 짓게 한다. 야무진 청이와 귀여운 그녀의 조력자들 매주 화요일 네이버웹툰에서 만날 수 있다.
▲<그림2>〈용왕님의 셰프가 되었습니다〉 Ⓒ 문백경, 옥, 카라쿨
수능 100일 남은 K-고3의 가상현실 탈출기 〈후공공략〉
수능을 100일 앞둔 웹툰의 주인공 이요나가 육성 시뮬레이션 RPG 게임 〈후공공략〉에 갇히게 된다. 심지어 게임 속 주인공 리리에게 각종 공략 루트마다 다양한 방법으로 죽임을 당하는 최종보스 악역, 황 귀비로 말이다. 이 작품이 전형적인 악녀 빙의물 클리셰로 이야기가 시작된다는 점에서 반박할 여지가 없다. 하지만 아무리 같은 요리라도 넣는 재료와 만드는 사람에 따라 천차만별의 맛을 낼 수 있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후공공략〉에서는 조연 캐릭터가 그 역할을 톡톡히 한다. 게임 설 정상 황귀비 란희의 대적자인 재녀 리리는 또 다른 플레이어 ‘한재상’으로 등장한다. 하지만 서로를 인공지능이라고 오해하는 가운데 리리의 입궁을 막아 수월하게 황후의 자리에 오르려는 요나와 게임의 원래 목적대로 란희를 제치고 황후가 되어 게임을 벗어나려는 재상이 부딪히며 벌이는 뜻밖에 기 싸움이 작품의 분위기를 설명하는 동시에 흥미를 일으킨다. 게다가 한재상이라는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그 가 사실은 요나보다 어린 남학생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보여주는 남매 같은 두 캐릭터의 케미도 관전 포인트라고 할 수 있다.
▲<그림3>〈후궁공략〉 Ⓒ 봉봉
그리고 캐릭터들이 이토록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스토리에 있다. 재녀 입궁식에서 벌어진 재녀 피습 사건으로 각 가문들의 입지와 황실과의 이해관계를 단편적으로 보여주고, 이후에는 폐위된 황후가 태후와 손잡고 등장해 피 튀기는 내명부 싸움을 예고하기도 한다. 이런 에피소드들이 웹툰 전체에 무게감을 실어주는 한편, 중 간 중간에 등장하는 게임 아이템들이 사건 해결에 도움을 주면서 이 세계물이라는 장르의 색을 유지해준다. 특히 종이학 메시지는 아이템은 후반부에 중요한 단서가 되기도 한다.
120화까지 무료로 전환된 현재 후반부 전개에 박차를 가하고 있어 정주행하기 딱 좋은 시점이라 할 수 있다. 맛있는 음식은 언제 먹어도 맛있다는 한줄평과 함께 #로맨스 판타지 #궁중 암투에 심장이 반응하는 독자에게 자신 있게 추천하는 바이다.
▲<그림4>〈후궁공략〉 Ⓒ 봉봉
다른 차원의 매력
‘쓸모없는 경험은 없다.’ 어른들에게 자주 듣던 말이다. 그리고 인생을 살면서 이 문장의 의미를 깨닫던 순간이 몇 번 있었다. 그리고 이것이 독자가 이 세계물 웹툰이나 웹소설을 좋아하는 이유와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쓸데없다고 평가받은 어떤 일이 다른 차원에서는 꼭 필요한 능력이 되는 재미있는 모순, 이를테면 아버지를 위해 허드렛일을 가리지 않고 해온 청이의 생활력과 손맛이 드래곤 던전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가 된 것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