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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만화가 단편집〈여자력〉: 가이드가 없는 세계를 여행하는 법

<지금, 만화> 16호 '이럴 땐 이런 만화/ 이세계(異世界)로 여행을 떠날 때 갖고 갈 만화' 에 실린 글입니다. 〈여자력〉/글, 그림 AJS, 골왕&자룡, 고사리박사, 김이랑, 뼈와피와살

2023-06-15 박민지

가이드가 없는 세계를 여행하는 법

젊은 만화가 단편집〈여자력〉

소환, 빙의, 회귀보다 위험부담이 적어서일까, ‘이세계로의 여행은 두려움보다 설렘이 앞선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 세계 여행자는 다카하시 루미코 작가의 만화 이누야샤의 주인공 카고메다. 카고메는 전국시대 무녀의 환생자로 우물을 통해 현대와 전국시대를 왕래할 수 있다. 모험일지언정 든든한 동료가 있고, 돌아올 가족의 품이 있는 카고메가 부러웠다. 위험도 이별도 없는 여행일지라도 이 세계로의 여행엔 가이드가 없다. 모든 판단은 여행자의 몫이며, 나를 믿고 나를 넘어설 용기가 필요하다. 그런 이유로 이세계 여행자에게 추천할 작품으로 다섯 작가의 단편 만화를 엮은 옴니버스 만화 여자력(女自力)이 떠올랐다. 인터넷도 전기도 없는 곳으로 간다면 가방에 넣어갈 수도 있다.

▲<그림1>〈여자력〉 Ⓒ AJS, 고사리박사 외


여자 스스로의 힘으로 전진하는 여자력

2000년대 초 일본에 여자력(女子力)’이란 신조어가 등장한다. ‘여성이 자신의 삶을 향상하는 능력이 라는 의미인데, 남성에게 매력적으로 어필해야 한다는 전제가 깔린다. ‘로 바꾸자 女子//自力으로 읽히며 전혀 다른 의미가 되고 기존의 것을 풍자한다. 그렇다고 만화 여자력이 여성 독자만 재밌게 읽을거리는 아니다. 성별을 떠나 캐릭터가 겪는 고민은 지극히 인간적이며 보편적인 공감대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먼저 AJS 작가의 함안군 가야리 땅문서 실종사건의 모사랑은 기억재생 사무소에 찾아가 증조할머니가 남겨주신 땅문서를 찾아달라고 의뢰한다. 어린 시절의 기억은 단편적으로 남을 뿐 새로운 기억에 밀 려 잊히기 마련이다. 모사랑은 눈앞에 펼쳐진 기억의 실체를 마주하며 잊고 있던 증조할머니의 사랑과 마음 한 구석에 자리 잡은 부채의식을 발견한다. 현재를 살게 하는 건 추억의 힘이란 말처럼 좋은 기억이 필요할 때가 있다. 모사랑의 추억여행에서 눈을 뗄 수 없을 것이다.

골왕&자룡 작가의 야사의 홍무위는 어린 시절 부모를 잃고 떠돌이가 됐지만, 거짓말을 간파하는 능력 덕분에 현상금 사냥, 사람 찾기, 심부름꾼 등을 하며 수완 좋게 살아간다. 그러나 그것은 위장된 삶이며 홍무위는 혼자만 알고 있는 진실을 증명하려 한다. 누가 뭐래도 자신의 사명을 다하려는 홍무위의 액션은 절절했고, 그 결과가 무엇이든 자신에게 진실한 홍무위의 모습이 인상 깊었다. 색다른 무협 액션 만화가 반가웠다.

▲<그림2>〈여자력〉 Ⓒ AJS, 고사리박사 외


고사리박사 작가의 조용한 세상의 미소속 조미소는 우리가 고만고만하게 약해빠졌던 시절이 그립다. 세상 모든 사람에게 각기 다른 초능력이 동시에 발현되지만, 통제능력이 없어 자멸했기 때문이다. 조미소에게도 초능력이 생기긴 했지만 별 쓸모가 없다. 폐허가 된 세상은 사악한 힘의 논리가 지배하고, 조미소는 동생과 위태롭게 떠돌며 고뇌한다. ‘나 같은 게 뭘 할 수 있을까?’ ‘동생을 지킬 수 있을까?’ 자신을 끊임없이 의심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용기를 내고, 제목의 함의가 절정부에 멋지게 구현된다.

김이랑 작가의 바람이 불면은 송민아, 이선형 두 여고생이 등장한다. 이선형은 초능력을 컨트롤하는 게 서툴러 세상에 나가길 꺼리고, 송민아는 타인의 평가를 의식하며 가식적으로 행동한다. 흔히들 10대 시절을 질풍노도의 시기라 해서 감정이 해방된다는데, 두 사람은 공통적으로 감정을 억제하는 성향이 크다. 억눌린 감정은 서로에게 폭발하고 선형은 더 꼭꼭 숨어버린다. 송민아는 이선형을 밖으로 끌어낼 수 있을까? 십대 특유 질풍노도의 진수를 느낄 수 있다.

▲<그림3>〈여자력〉 Ⓒ AJS, 고사리박사 외


뼈와피와살 작가의 죽음으로부터는 죽음을 앞둔 할머니 루비가 젊을 때 마녀로 몰려 마을에서 쫓겨난 친구 다야에게 납치당하며 시작된다. 다야는 천리안을 갖고 있어 루비의 죽음을 미리 알고 오래전에 한 약속을 지키러 왔다. 그러나 루비는 순리에 맞게 죽는 것을 방해하는 다야가 불편하다. 두 친구의 마지막 여행은 거듭된 반전으로 상상 이상의 감동을 선사한다. 명랑한 할머니들의 마지막 여행은 유쾌했고, 초능력도 우정도 젊은이의 전유물이 아님을 보여준다.

만화 여자력의 캐릭터들에게 모든 순간이 두려움과 마주하고 극복하는 과정이다.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은 제각각이지만 그 모습은 반짝이고, 삶에 영감을 준다. 발견하지 못했을 뿐, 용기는 이미 마음속에 있다.


필진이미지

박민지

만화평론가
2021 만화평론공모전 신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