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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정만화, 로맨스 판타지, 그리고 여성의 젠더적 갈등: 승우, 한윤설의 〈시월드가 내게 집착한다〉와 LICO, 성소작의 〈내 남편과 결혼해줘〉

<지금, 만화> 16호 Critique 에 실린 글입니다.

2023-06-15 손유진

순정만화, 로맨스 판타지, 그리고 여성의 젠더적 갈등

승우, 한윤설의 〈시월드가 내게 집착한다〉와 LICO, 성소작의 〈내 남편과 결혼해줘〉



막장과 사이다, 한국의 스낵컬처를 떠올릴 때 자주 등장하는 정서일 것이다. 그만큼 많은 독자들에게 사랑받고 동시에 평가절하 당하는 장르가 소위 로판’, 로맨스 판타지이다. 이 장르의 대표적인 예시로 들 수 있는 작품은 전자의 경우 시월드가 내게 집착한다, 후자의 경우 내 남편과 결혼해줘이다. 두 작품은 모두 가부장적인 폐습으로 주인공을 괴롭히는 그의 가족에게 주인공 이 연애의 성사를 통해 정당한 복수를 내리는 내용으로 요약될 수 있다. 일련 의 과정에서 남자주인공에 대한 의존성이 부각되고 있는데, 이 전형성은 기존의 순정만화에서도 자주 발견되는 플롯의 특성이라 볼 수 있다. 이렇듯 서사에서 연애 상대로서 남자주인공의 큰 비중과 시댁의 큰 영향력은 로판으로 하여금 가부장제에 기댄 정상 가족 중심적 이데올로기의 재생산이라는 혐의를 갖게 하기도 한다.

로맨스 장르의 가장 큰 특징은 여성 독자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크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로맨스물과 여성의 상관관계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어째서 가족과 로맨스, 그리고 여성은 하나의 장르 아래 묶여 호명되고 있을까

기존의 순정만화 문법을 살펴보자. 주인공은 라이벌, 혹은 악역의 여성 캐릭터와 주된 갈등을 겪으며, 부가적으로 자신의 안녕을 해치는 인물들과 다툼을 벌이기도 한다. 이러한 고난들을 처치해 나가면서 일종의 보상적 성격으로서 남자주인공과 사랑의 결실을 맺게 된다. 즉 순정만화에서 중요한 한 축이 로맨스이기는 하나, 주변과의 심리적 갈등이 이야기를 만드는 토대가 된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섬세한, 또는 현실적인 심리묘사 또한 순정만화의 주된 특징으로 여성 주인공이 시련에 마주하며 겪는 슬픔, 혼란, 고통들에 대한 생생하고 몰입 적인 표현들이 그 인기 요인일 것이다.

▲<그림1>〈시월드가 내게 집착한다〉 Ⓒ 한윤설, 승우 ▲<그림2>〈내 남편과 결혼해줘〉 Ⓒ 성소작, LICO


나는 순정만화를 두고 여성적인 장르라 부르고자 한다. 작품의 핵심이 되는 갈등이 지극히 젠더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젠더적이란 표현은 젠더 간의 갈등이라는 뜻이 아니라, 작품에서 표현하는 갈등의 양상이 젠더에 고유적이라는 의미이다. 예단이라고 할 수 있겠으나, 남초 인터넷 커뮤니티의 주류 공감대 가 나는 이렇게 특이한경험을 겪었다에 기대고 있다면, 여초의 경우 내가 인간 관계에서 이러저러한 경험을 겪었다는 쪽에 가깝다. 시댁의 괴롭힘, 연인의 부족함, 친구와의 다툼 등이 게시물의 주요 테마가 되는 만큼 여성적인 갈등, 여성적인 경험은 관계적인 내용을 중심으로 사유된다. 그 원인에 대한 정확한 분석에는 조심스러운 접근이 필요할 것이나, 적어도 순정만화와 인터넷 커뮤니티의 연관성을 생각해보았을 때, 관계적 형태의 갈등이 중시되고 있다는 점은 정확하게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이런 것이다. 평범하고 상식적인 삶을 사는 나를 실없는 이유로 교묘하게 따돌리거나 훼방 놓는 인물을 조우하는 것은 여성에게 있어(아마 젠더 무관한 경험일 수도 있지만 순정만화의 문법에 입각했을 때 그러하다는 것이다) 보편적으로 공감 가능한 경험일 것이다. 또한 이러한 문제 상황에서 전적으로 의지할 만큼 가까운 관계를 원했던 경험도 그러하리라 생각된다. 이것이 여성으로서 겪는 젠더적 갈등이며 여성 장르의 핵심적인 정서라 이야기하고 싶다. 이러한 맥락으로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인 <치즈 인 더 트랩>에 대해 생각해보자. 악의 없이 성실히 사는 여주인공과 그를 질투하고 해코지하는 여성 인물, 그리고 그가 여성이라는 이유로 하대하거나 겁박하는 악역 조연들이 지속적으로 충돌한다. 이 흐름 속에서 여성 주인공은 왜 하필 나한테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한다. 그는 누군가를 먼저 괴롭히거나 적대한 적이 없는데, 알아서 잘 먹고 잘 사는 씩씩한주인공에게 사람들은 자꾸 질투로 해코지를 하기도 하고, 연애감정으로 접근했다가 폭력을 휘두르거나, 남성으로서 혹은 가장으로서 권위적인 언행을 보이고, 자기 이익을 챙기기 위해 교묘하게 괴롭히기도 한다.


일련의 고난 속에서 주인공은 지지적인 가족, 혹은 친구들 그리고 연인의 존재를 갈망하게 된다. 무조건적으로 자신의 편에 서서 나서줄 그런 존재 말이다. 악역들과의 분투를 과정으로 하여 주인공은 진정으로 자신을 위하는 궁극적인 내 편으로서 남자주인공을 쟁취한다. 즉 순정만화는 악역들에 대해 서사를 부여 하고 이를 주인공으로 하여금 극복하게 하면서 우리가 품는 왜 평범한 나한테 이런 일들이 생기지?”라는 의문을 가상적으로 해결해주고, 보상하며, 카타르시스를 제공해주는 것이다(이러한 점에서 치즈 인 더 트랩은 일부 독자들에게 반감을 사기도 한다. 왜냐하면 여성적 전형성에 거리감을 갖는 독자층은 이러한 양상의 관계적 갈등에 공감을 느끼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동시에 순정만화적 갈등이 얼마나 여성적인 것인지에 대한 방증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이러한 메커니즘이 전적으로 관계성에 기반하고 있기에 그 갈등과 해소 모두 주인공이 맺은 관계들과 동치된다. 주인공을 괴롭히는 인물이 작품의 갈등이 된다면 그 해소는 주인공을 도와주고 사랑하는 인물이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로맨스 장르에서는 가족적 인물들의 등장이 필연적일 수밖에 없고, 친정, 시 댁과 주인공의 관계 양상이 중요하게 다뤄질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한 명의 사람에 있어 가장 가까이서 사랑과 미움을 나누는 인물들은 바로 가족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맥락에서 주인공의 결혼, 혹은 연애가 의미 있게 묘사된다. 파트너 인물을 가장 의지할 수 있는 가까운 존재로 두기 위한 장르적 장치가 결혼이기 때문이다. 정리하자면 여성 독자가 중시하는 관념에 대한 공감대의 형성, 그리고 관계를 통한 정서적 해소에 집중하는 것이 로맨스 장르의 주된 골자라 할 수 있겠다.

현재의 로맨스 판타지는 매우 충실하게 이를 계승하고 있다. 혹자는 의문을 가질 수도 있다. 페미니즘이 이슈화 되는 시기에 왜 로맨스 장르에서의 가족주의가 강화되고 있는가? 이는 결국 여성독자의 욕망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독자들이 무엇을, 왜 욕망하는지에 대한 분석이 로맨스 장르의 명암에 일관적인 해 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내 남편과 결혼해줘에서 주인공은 잘못된 결혼으로 남편과 시댁에게 가정폭력을 당하고 끝내 죽음을 맞이한다. 모종의 이유로 십년 전의 자신이 된 주인공은 가부장적인 남편에게 복수하고 자신을 무조건적으로 지지해주는 상대를 새롭게 맞이한다. 이를 통해 현재 여성독자들이 겪고 있는 현실의 문제가 젠더적이라는 것을, 이에 대한 돌파구로서 새로운 형태의 파트너상을 갈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여성서사라는 장르에서 이 문제는 다른 방식으로 다루어질 수 있으나, 적어도 관계를 조명하고 탐구하는 로맨스에서 바람직한 파트너상을 도모하는 작업이 갖는 의미가 퇴색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지적은 가능하다. 왜 하필 남자친구인가? 시월드가 내게 집착한다에서 주인공은 자신을 살해한 남편과 양모에게 복수하고자 계약결혼을 감행하고, 내 남편과 결혼해줘의 주인공은 자신을 지켜줄 존재로서 남자 주연을 선택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두 작품 모두 남성 주인공 이외에도 여성 주인공을 지지하고 조력해줄 인물들이 다수 등장한다는 점이다. 그들의 모든 도움에도 불구하고 남자 상대만이 가장 중요한 구원의 수단으로 주어지는 것은, 오히려 관계를 탐구하는 로맨스의 문법에 전도적인 결과를 불러올 위험이 있다. 나쁜 남자, 혹은 남자 때문에 주인공을 위협하는 나쁜 여자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그와 정확히 대칭되는 지점에 있는 대체제를 구하는 것이 타당한지에 관한 문제이다. 왜냐하면 단순히 문제 지점을 다른 인물로 채우는 것을 근본적인 해결로 볼 수 있는지는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독점적인 연애, 2인 연애, 혹은 연애감정이 관계상에 고질적인 문제를 야기하고 있는 것이라면 이 문제는 알아서 잘하는 남자 주인공만으로는 해결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왜 하필 연애인가?’를 먼저 살펴보고 탐구할 때가, 로맨스 장르에도 다가왔다고 할 수 있다. 웹툰 극락왕생은 이에 대한 문제를 적극적으로 지적한다. 여성 서사만화의 대표격이라 할 수 있는 작품 중 하나인 극락왕생은 여성 간의 연대를 강조 하는 작품으로, 여성이 갈등상황에 직 면했을 때 로맨틱한 관계에 기대지 않아도 충분히 도움을 주고받으며 해결할 수 있음을 설파한다. 특히 주인공 자언이 과거의 연애를 바탕으로 로맨스에 대한 필요성이 보편적이지 않음을 깨닫는 장면이나, 로맨스에 집착하며 자기파괴적인 모습을 보이는 문수를 비판적으로 조명하는 장면에서 이러한 메시지가 극대화된다. 이러한 면에서 로맨스는 긍정되어야 할 뿐 아니라 객관적인 분석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겠다.

언뜻 보기에 순정만화, 그리고 로맨스에서 지속적으로 제기되는 문제의식, “왜 여자들은 나를 질투하고 남자들은 나를 사랑한다는 이유로 괴롭히는가?”는 유치하고 평면적으로 여겨질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문법이 대중들에게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진다는 사실은 이 물음이 좀 더 고차원적인 언어의 권위를 빌려올 필요를 역설한다. 독자들이 어떻게 그러한 경험들에 지속적으로 노출되는지, 이 상황에서 그들이 무엇을 탈출구로서 원하는지, 이 문제를 보편에 소급시켰을 때 어떠한 문제로 환원되는지 계속해서 묻고 구체화하는 것이 로맨스 연구의 필요성이자 의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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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유진

만화평론가(2019 만화평론 공모전 신인 부문 가작 수상)
텍스트의 의미를 중심에 두고 글을 쓰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