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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지, 서말, 나무, P의 〈상수리나무 아래〉: 욕망의 폭풍우 속에서 로맨스 판타지

<지금, 만화> 16호 Critique 에 실린 글입니다. 〈상수리나무 아래〉/ 원작 김수지/ 글 서말, 나무, 그림 P

2023-06-01 주다빈

욕망의 폭풍우 속에서 로맨스 판타지

김수지, 서말, 나무, P상수리나무 아래



올해 초 1998년을 배경으로 한 청춘 로맨스 드라마 스물다섯 스물하나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솔직하게 말하면 로맨스물을 크게 즐기는 편은 아닌데 쉽게 주인공에 감정 이입하고 스토리에 몰입하는 편이라 며칠간 마음 이 뒤숭숭하기 때문이다. 드라마가 방영 당시 주변의 권유에도 흔들리지 않았는데 온라인에서 김태리의 모습을 본 뒤 빠져들어 당장 드라마를 정주행했다. 드라마를 보며 든 생각은 이 드라마, 로맨스가 아닌데?’라는 생각이었다. 로맨스라기보다는 주인공 나희도의 성장물에 가까웠다. 드라마에서는 백이진과의 연애 스토리 뿐만 아니라 희도가 겪은 고통을 이겨내는 모습, 라이벌인 고유림과의 갈등을 해소하는 과정 등을 로맨스와 동일한 비중으로 다뤄냈기 때문이다.

이는 단지 스물다섯 스물하나만에 국한된 스토리 전개 방식은 아니었던 듯하다. 언제라고 꼭 집어 말할 수는 없겠으나 언젠가부터 로맨스물이 단순 로맨스에만 집중하지 않게 됐다. 노블코믹스 로맨스 판타지 장르의 대표작인 재혼 황후, 하루만 네가 되고 싶어역시 각 작품의 여주인공이 자기 삶을 개척해 나가는 성장에 집중했다. 이는 로맨스 판타지의 주요 독자층인 여성의 욕망이 변화했음을 의미한다. 모든 이야기가 독자의 욕망을 반영하는데 신데렐라나 콩쥐팥쥐와 같은 구비문학에서는 신분 상승에 대한 욕망이 강했다. 이야기가 만들어진 시대에는 신분제가 견고했으며 여성은 스스로 높은 신분에 오를 수 없었기에 높은 신분의 남성에게 선택받는 이야기가 주로 등장했다. 이런 로맨스 플롯은 오늘날에는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간주했다. 여성 독자들은 더욱 진취적으로 자신들이 자신의 사랑을 쟁취하고 능력을 펼쳐 성과를 인정받기를 보다 적극적으로 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 다룰 작품인 상수리나무 아래도 위의 두 노블코믹스와 동일하게 이러한 시류를 잘 드러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게다가 조금 더 진취적인 방식을 취하고 있다.

▲<그림1>〈상수리나무 아래〉 Ⓒ 김수지, 서말, 나무, P


주인공인 맥시밀리언(이하 맥스)은 공작 영애이지만 말을 더듬는 장애를 갖고 있다. 극복하기 어려운 장애를 가진 주인공은 쉽게 선택할 수 있는 캐릭터가 아니다. 독자가 몰입할 수 있는 주인공은 본인과 비슷하거나 혹은 동경할 수 있는 대상이어야 한다. 이러한 결함은 오랜 기간 축적되어 온 사회적 인식으로 독자들이 주인공의 매력에 빠져드는 데 더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한다. 작품에 독자를 빠르게 매료시켜야 하는 작가 입장에서는 꽤 부담이 있는 설정이다.

스토리에서 주인공이 장애를 가졌을 경우 이 지점이 두 주인공의 사랑을 가로막는 장애물로도 작용한다. 그리고 끝내 장애를 극복함으로써 주인공 간의 갈등이 해소되고 멋진 사랑의 결실을 보게 되는 게 지금까지 전개된 로맨스물의 흔한 이야기였다. 맥스의 성격이 형성되는 데 큰 영향을 주었던 크로이소에서의 생활에서는 이러한 결함이 맥스의 활동을 제약하는 요인이 됐다. 더불어 맥 스가 아버지로부터 학대받게 된 가장 큰 이유이기도 했다. 그러나 아나톨에서는 맥스의 언어장애가 맥스의 삶을 전혀 방해하지 않는다. 모두 맥스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불편하거나 더 나아가 의도적으로 배려하려는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이는 아나톨에서 맥스가 사람들의 인식을 극복하는 과정을 통해 독자에게 또 한 번의 인내를 부탁하기보다는 곧장 스스로의 발전으로 나아갈 수 있는 배경을 만들었다 볼 수 있다.

특히 남자 주인공인 리프탄은 맥스가 말을 더듬는 점을 전혀 문제 삼지 않는다. 이야기 초반 맥스는 본인의 이러한 상황 때문에 리프탄에게 버림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러나 리프탄은 3년이 지난 뒤에도 맥스에 대한 마음이 변함없었고 그녀를 자신의 성으로 데려간다. 또 단 한 번도 맥스가 가진 콤플렉스를 언급하거나 위로하지 않는다. 리프탄의 행동은 독자로 하여금 리프탄이 맥스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고 있다는 인식을 심어준다.

페미니즘이 화두에 오르면서 많은 여성이 탈코르셋을 주창했다. 이는 타 인이 만든 미의 기준에 자신을 끼워서 맞추려는 모습을 중세 시대 여성이 풍만한 가슴과 얇은 허리를 만들기 위해 코르셋이라는 의복을 착용했던 것에 빗 대어 만들어진 단어이다. 이렇게 탈코르셋을 말하는 여성이 있는 한편 스스로를 뼈말라족이라 칭하는 여성도 등장했다. 마른 몸을 예쁜 몸이라고 생각하는 미의 기준에 본인을 맞추기 위해 식이장애를 유발할 정도로 마른 몸을 지향하는 집단을 이르는 말이다. 이러한 시대에 자기 모습 그대로를 사랑해주는 남성은 여성 독자의 욕망을 완벽히 겨냥한 캐릭터라 할 수 있다. 남성 주인공이 가진 특징의 변화는 있는 그대로 사랑받고 싶은 여성 욕망을 보여주는 한 가지 요소라 할 수 있다.

▲<그림2>〈상수리나무 아래〉 Ⓒ 김수지, 서말, 나무, P


이렇듯 상수리나무 아래는 주인공인 맥스와 리프탄을 통해 로판물의 주요 독자층인 여성의 욕망 변화를 낱낱이 보여준다. 그러나 여전히 지난 로판물들이 가진 한계를 뛰어넘지 못하고 있기도 하다. 맥스와 리프탄의 관계가 수평적이기보다는 상하관계로 여성이 남성에 속한 존재로 인식되는 것이다. 이러한 장면은 리프탄이 맥스에게 본인의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에서 많이 드러나는데 장소를 고려치 않고 사랑을 티 내 맥스를 당황하게 만드는 점이 그렇다. 리프탄은 당황스럽고 불편해하는 맥스의 감정을 고려하기보다는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는 것을 더욱 중요하게 여긴다. 많은 독자는 이러한 한계를 중세라는 배경이 가진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치부한다. 또 맥스가 완전히 거부하지 않았기에 그녀 역시 동의한 것이라 이야기할 수 있다. 그러나 맥스라는 캐릭터의 설정상 오랜 기간 아버지로부터 학대당한 기억으로 자존감이 많이 낮은 상태라는 것과 리프탄의 표정이나 행동을 유심히 살피고 혹여나 리프탄에게 버림받을까 봐 불안감을 느끼는 점, 리프탄이 보이는 폭력적인 모습에 큰 공포를 느끼는 점 등을 생각한다면 리프탄과 맥스의 관계가 온전히 평등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설정에 한 가지 이해의 여지를 두자면 로맨스의 진전을 위해서가 아닐까하는 생각을 하곤 한다. 상수리나무 아래는 맥스와 리프탄의 연애에만 집중하고 있지 않다. 지금까지 업로드된 54화 중 두 인물이 온전히 하루를 보낸 시간이 거의 나오지 않는다. 또한 최근 화에서 리프탄은 토벌을 명목으로 약 일주일간 성을 떠나서 있었고 그 기간 맥스는 마술을 익힌다. 맥스가 마술을 익히려는 이야기가 몇 화에 걸쳐 전개되지만, 맥스의 사랑 이야기는 단편적인 순간들이 한 회차에 몇 개의 칸으로 빠르게 전개된다. 잔잔한 감정을 주고받는 장면은 로맨스에서 중요한 순간이겠으나 독자에게 지루함을 일으킬 수 있다. 따라서 작가는 이러한 장면을 삭제하고 두 사람의 사랑을 속도감 있게 표현해 독자에게 지루함보다는 강렬함을 남긴다. 소극적이고 내성적인 맥스를 대신해 이 사랑 이야기에 속도를 내는 역할로 저돌적인 리프탄이란 인물이 설정됐을 테고 그랬기 때문에 앞에서 이야기했던 문제점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림3>〈상수리나무 아래〉 Ⓒ 김수지, 서말, 나무, P


그러나 이러한 말들이 맥스의 감정을 존중하지 않는 리프탄이란 캐릭터에게 면죄부를 주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많은 독자는 남주인공의 자기중심적인 태도에 불편함을 느끼고 있음을 표현했다. 독자 욕망의 변화가 기존 로판 스토리를 변화시켜 상수리나무 아래가 나올 수 있었던 것처럼, 지금 상수리나무 아래가 가진 문제점은 이러한 독자의 욕망이 더욱 강렬해질 때 또 다른 작품에서 변화한 형태로 나타날 것이다. 상수리나무 아래는 물론 언급한 것처럼 아쉬운 점도 있었으나 지금까지와는 다른 로맨스 판타지의 변화된 스타일을 잘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를 가진다. 또한 아쉬운 부분 역시 앞으로 등장할 로맨스 판타지를 쓸 작가들에게 생각할 지점을 남김으로써 가치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사랑받고 자기 능력으로 인정받고 싶은 독자라면 상수리나무 아래를 선택하는 것에 후회는 없으리라 생각한다. 날이 쌀쌀해지는 겨울 따뜻한 실내에서 마음이 따뜻해지는 로맨스 판타지를 읽어보는 건 어떨까?


필진이미지

주다빈

만화평론가
2020 만화·웹툰 평론 공모전 신인부문 대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