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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서사 단편집 〈여명기〉: 만화 속 여성들의 탈코르셋 운동

<지금, 만화> 16호 Critique 에 실린 글입니다. 〈여명기〉/ 글, 그림 팀 총명기

2023-06-03 최윤주

만화 속 여성들의 탈코르셋 운동

여성 서사 단편집 여명기


순정만화 그림체와 코르셋

세상에는 연애하더니 예뻐졌다(= 요즘 예뻐졌는데 연애하냐)라는, 차라리 없는 것이 나았을 무가치한 명제가 있다. 그것의 참과 거짓 여부를 논하는 것이 이 글에서 하려는 일은 아니다. 다만 이 명제는 외형적 아름다움은 성애적 관계와 긴밀한 연관성을 가진다는 우리 사회의 익숙한 통념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또한 이런 맥락에서 이야기되는 외적 아름다움이란 타인의 시선에 종속된 것이라는 사실 역시 이 글에서 주목하는 전제다. 미에 대한 강요는 성적 대상화와 무관하지 않으며, 아주 좁은 기준의 미를 요구하는 일은 여성으로 하여금 타인의 시선에 맞춘 특정한 양식의 삶만을 살도록 제약한다. 나는 이러한 현실의 강요가 만화 속 여성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되어 왔다는, 다소 범박하지만 꽤나 합리적인 의심을 이 글의 출발점으로 삼고자 한다.

▲<그림1>〈여명기〉 표지 Ⓒ 팀 총명기


얼마 전 연구를 위해 1960년대 순정만화들을 살필 기회가 있었다. 무엇이 순정만화인가 하는 개념 정의가 생각보다 분명하지 않지만, ‘순정만화적인그림체는 여러 논의에서 공통으로 언급될 만큼 주요한 특징이다. 방금 순정만화라는 말을 들었을 때 당신이 떠올렸을 그 그림체 말이다. 큰 눈에 오뚝한 코, 갸름한 턱, 긴 머리와 늘씬한 몸, 그 몸을 둘러싼 화려한 옷차림, 커다란 눈엔 반짝이는 별이 박혀 있고 배경으로는 꽃이 만개해 있을 것이다. 미형을 강조하는 화려하고 장식적인 그림체는 남성 작가만의 무대이던 만화계에 여성 작가들의 존재를 세우고 순정만화의 흐름 자체를 바꿀 정도로 열렬한 사랑을 받게 한 매력적인 장치였다. 하지만 시대의 열기에서 벗어나 작품 그 자체로 접하니 아쉽기도 했다. 인물이 전부 동일한 방식으로 아름다워 누가 누군지 구분하기 어려웠고, 가난한 설정의 주인공이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나오니 몰입을 해치기도 했다. 단일한 형태로 고정된 작화가 서사의 걸림돌이 되기도 했던 것이다. 순정만화의 그림체가 크고 작게 바뀌고, 흑백의 출판만화에서 컬러 웹툰으로 매체를 이동하기도 했으나 의외로 그 시절의 장식적인 그림체는 현재까지도 답습되고 있다. 최근 만화에서 순정만화적 그림체를 가장 적극적으로 답습하고 있는 것은 로맨스 판타지일 것이다. 많은 작품에서 여전히 크고 반짝이는 눈에, 하얗고 깨끗한 피부, 길고 가는 팔과 다리, 화려한 드레스를 기본값으로 하며 주인공 주변에는 꽃이 만발하는 중이다.

이런 와중에 아름답지 않기로 선언한 여성 인물들이 있다. ‘여성 주연의 비 로맨스 테마 출판만화 앤솔로지여명기의 인물들이다. 엄밀히 말해 여명기가 직접적으로 선언했던 것은 로맨스가 중심이 아닌 여성서사지만, 앞서 밝힌 전제들을 고려해 살필 때 이들 작품이 기존의 여성들과 이미지적으로도 다르게 재현된 것은 필연적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이 로맨스의 여집합에 이야기의 터를 잡으며 의도했던 성적 대상화와 제한된 삶의 양식에 대한 거부는 서사 측면에 서뿐만 아니라 이미지 측면에서도 성취를 거뒀다. 작품 밖 언어를 빌려 말하자면, 현실의 여성과 함께 만화 속 여성들 또한 탈코르셋 운동(꾸밈 노동 등 코르셋으로 상징되는 여성 억압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움직임)을 시도했던 것이다.


다른 얼굴로 비로소 가능한 것들

직접적으로 탈코르셋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는 시스터후드여명기속 여성 인물들이 탈코르셋 운동을 하고 있다는 해석에 힘을 실어주는 긴요한 근거가 되는 작품이다. ‘시스터후드는 탈코르셋 운동에 동참하면서 외로운 싸움을 이어 나가던 동생 해인과 여성스럽게꾸미는 일에 열을 올리는 언니 해주의 이야기다. 머리를 짧게 자르고 불편한 옷과 신발, 불필요한 화장품들을 버리고 숏컷에 추리닝 차림으로 돌아다니자 가는 곳마다 미쳤다는 소리를 듣게 된 해인을, 그러나 주변의 누구보다 외롭고 괴롭게 하는 것은 언니 해주다. 해인은 어릴 적 미친X’ 소리를 들으면서도 기세 좋게 남자애들과 싸우며 자신을 지켜주던 언니가 불만 없이 예쁜 여성이길 자처하게 된 것이 괴롭다. 탈 코르셋 운동 중인 여성으로서 자신들에게 강요되는 사회적 미의 기준을 답습하는 여성인 언니를 보며, 가장 가까운 사람으로부터도 이해받지 못한다는 고립감과 함께 한없는 착잡함을 느낀다. 밀도 있게 전달되는 감정선 사이로 해인의 차림새가 어떠한지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시스터후드여명기의 다른 만화들과 비교했을 때 상대적으로 순정만화 그림체에 가까운 편이다. 인물들의 체형이 마르고 길쭉한 편이며 반짝거리는 눈을 포함해 이목구비, 얼굴형이 그려진 방식이 순정만화에서 곧잘 재현하는 전형적인 미인상에 가깝다. 하지만 숏컷에 화장기 없고 뚱한 표정을 지은 채 추리닝을 입고 털레털레 걷는 해인의 모습은 그다지 순정만화 주인공 같지 않다.

▲<그림2>〈여명기〉, ‘시스터후드’ Ⓒ HOSAN


그리고 이러한 인물들, 말하자면 남자 같거나’, ‘여자 같지 않은탈코 차림의 인물들이 여명기곳곳에 존재한다. ‘아구 속에는 무엇이 있나의 주인공 김영하 대리는 짧은 머리에 담백한 얼굴을 한 소년 같은 인상의 여성이다. ‘Teller’의 주인공 여은린 역시 숏컷에 중성적인 외모를 하고 있고, ‘이스파라의 마녀는 남장을 하고 군 복무 중인 여성이 주인공이다. 과반의 작품에 짧은 머리의 여성이 존재하고, 그보다 많은 여성이 사랑스럽지 않은 그저 생활인의 얼굴을 하고 있으며, 거의 모든 여성이 자기 역할에 맞춤인 차림으로 맡은 서사를 수행해나간다.

▲<그림3>〈여명기〉, ‘아구 속에는 무엇이 있나’ Ⓒ 코익


이때 그들의 외형과 성향이 유기적이라는 사실을 기껍게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한 사람의 내면과 외면에 반드시 개연성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대개 차림새란 삶의 양식을 의미하는 법이다. 의협심 높고 험한 일을 도맡는 미리암(‘노아의 방주’)이 한쪽 눈에 상처를 입어 안대를 쓰고 있음은 자연스럽다. ‘플랑크톤의 귀향의 대학원생과 태양이 뜨지 않는 도시의 조사원 크리스토는 둘 다 뚱한 표정에 안경을 쓰고 있다. 무뚝뚝하고 일 외에는 그다지 관심 없어 보이는 두 사람이 외형적으로도 닮은 것은 우연일까? 아닌 게 아니라 두 사람 다 시력이 나쁠 수밖에 없는 직종에 종사 중이고, 연구자의 덕목일 냉철한 성격이라 쉽게 웃지 않는 표정이야말로 그들답다. 오히려 이들이 주변에 꽃이 만개할 만큼 활짝 웃었다면 어색하다고 느껴졌을 것이다.

▲<그림4>〈여명기〉, ‘플랑크톤의 귀향’ Ⓒ AJS


12편의 여명기작품에 나오는 주·조연 인물을 합하면 수십 명에 달하니 그 모든 인물의 겉모습에 얽혔을 사정을 따져보긴 어렵다. 다만 분명한 것은 서로 다른 얼굴을 볼 때 서로 다른 성격이, 서로 다른 삶이 상상된다는 것이다. 이들은 서로 다른 체형과 피부색, 머리 모양과 표정을 지녔다. 그중에는 장애를 가진 이도 있고 나이가 많아 주름진 이도 있고, 정말 여성 주인공으로 는 처음인데, 끔찍하게 심각한 입 냄새를 풍기는 이도 있다. 순정만화에서 청초한 여성 주인공의 아름다움을 강조하기 위해 동원하고는 했던 꽃과 별 대신 이들에게 마땅한 것은 실제 활동 가능한 배경이다. 햇볕이 내리쬐는 하늘, 혹독한 추위가 도사리는 평야, 헤엄칠 수 있는 바다, 적막하지만 분주한 사무실이 그것이다. 다른 몸, 다른 얼굴이기에 다른 배경이 필요하고, 다른 역사가 담길 수 있다.


여명기이후의 이야기들

만화 속 여성 인물들의 탈코르셋 운동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여성 서사의 한 획을 그었다고 평가받는 고사리박사의 극락왕생이나 여명기에 참여한 하토 작가의 근작 두연씨, 잘 먹고 잘 살아요의 인물들 역시 어떻게 생겼어도 여성이다. 머리카락이 밤톨처럼 짧든, 근육이 우락부락하든, 목소리가 걸걸하든 여성이고 키가 크고 피부가 검고 살집이 두툼해도 여성이다. 물론 머리가 길거나 가슴이 크거나 선이 가는 여성도 있다. 불교 신화를 여성 서사로 재창조한 극락왕생과 비거니즘을 다룬 두연씨, 잘 먹고 잘 살아요두 작품은 ()성애적 맥락이 거의 제거된 작품으로서 성적 대상화를 거부하는 동시에 그간 차단되어온 다양한 서사의 가능성을 열어젖힌다.

한편 이성애 로맨스를 중심 서사로 하면서도 기존의 여성상과는 다른 재현을 시도하는 작품들도 존재한다. 재벌과의 인터뷰의 여주인공 지은은 까만 피부에 근육질 몸을 가졌고, 내일도 출근의 주인공 지윤은 통통한 체형의 소유자다. 그러나 이들 이야기는 몸을 여성스럽게바꿔 사랑을 쟁취한다거나 이런 몸을 가졌음에도사랑받는다는 식으로 전개되지 않는다. ‘다른몸이 서사를 좌우할 만큼 유난한 것으로 그려지지 않는 것이다. 단지 근육질의 지은은 성실히 운동을 다니고, 살집이 있는 지윤은 운동을 하면서도 떡볶이와 맥주를 즐길 뿐이다. 이들의 몸은 이들을 설명할 뿐 이들의 전부를 결정짓지 않는다.

2018년 불이 붙듯 뜨겁게 퍼지던 탈코르셋 운동이 열기가 식은 지금도 누군가의 삶에는 일상으로 자리 잡은 것처럼, 만화 속 다양한 여성의 몸도 일상적인 창작 방식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2022년 초에는 여명기2가 성공적으로 펀딩을 마쳤다. 한계 없이 다양한 몸과 얼굴을 지닌 여성서사의 여명이 매일 새롭게 밝아오는 중이다.


필진이미지

최윤주

만화평론가
2021 대한민국 만화평론공모전 대상
2019 만화평론공모전 신인부문 대상, 2020 만화평론공모전 기성부문 가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