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게 되면 영혼이 육신을 떠나 밖으로 나오는 일이 있기 마련이군요.”
야마토 와키의 〈겐지 이야기〉와 구아진의 〈미래의 골동품 가게〉
천 년을 내려온 고전, 〈겐지 이야기〉
《겐지모노가타리(源氏物語)》. 《겐지 이야기》는 무라카미 시키부라는 시녀가 일본 헤이안 시대에 쓴 세계 최고(最古) 소설이자 일본문학의 보배로 불리우는 작품이다. 인간의 심리를 자세히 그린 인류 최초의 소설로 널리 알려져 있다. 겐지의 생애사 중심으로 70년의 세월을 다루며 무려 54첩에 이르는 긴 분량의 대하소설이다. 지난 2008년이 탄생 천 주년(!)이었다.
20대 초반에 감히 이 대하소설에 도전했다. 《겐지 이야기》 상권을 사서 읽고 있다고 일본인 친구 토모미 짱에게 말하니 입을 떡 벌렸다.
“《겐지 이야기》는 일본문학 시간에 골머리를 앓았던 소설인데. 한국인인 네가 읽고 있다고?”
“어. 생각보다 쉽던데?”
그 친구는 혀를 내두르며 나보고 몇 번이나 대단하다고 말했다.
최근에 렌조 미키히코의 추리소설 《백광》을 인상 깊게 읽었다. 그 중 유키코의 알리바이가 기억에 남는데 바로 문화교실 《겐지 이야기》 수업이었다. 고대소설 《겐지 이야기》를 읽기 위해 난해한 고어, 와카(고대 시), 역사지식까지 이해해야 하니 수업을 듣지 않으면 정말 쉽지 않겠구나란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토모미 짱의 말을 이해한다.
이 도전은 아쉽게도 상권에서 멈추고 말았다. 대학졸업과 취직에 휩쓸려 하권은 나중으로 미뤘다. 시간은 쏜살이라 어느새 30대가 되어버렸다. 서점에 내가 샀던 《겐지 이야 기》의 하권이 없었다. 결국 완독을 포기하고 몇 년이 흘렀을 때 AK 출판사에서 《겐지 이야기》 10권짜리 만화 세트로 나온 걸 알게 됐다. 바로 구매해서 드디어 완독했다.
사랑이 깊어지면 사람은 생령이 된다
만화 〈겐지 이야기〉는 야마토 와키가 1979년부터 1994년 연재를 마칠 때까지 무려 15년 동안 혼신의 힘을 다해 그린 작품이다. 작가 스스로 “젊은 혈기 때문에 용케도 이 위대한 고전에 겁도 없이 도전했구나.”라고 말했을 만큼 고통스럽게 탄생한 작품이다. 배경의 건물이나 가구, 의상이 현재에 존재하지 않으므로 그림의 디테일을 살리는 게 제일 어려웠다고 한다. 자료와 지식이 부족해서 ‘겐지’가 붙은 것이라면 무엇이든 구해서 읽고 당시 발음으로 원문을 낭독한 테이프까지 구해 들었다고 한다. 이러한 담금질의 시간을 견디고 견뎌 소녀만화의 필터를 통과한 〈겐지 이야기〉가 탄생한 것이다.
▲<그림1>〈겐지 이야기〉 Ⓒ 야마토 와키
〈겐지 이야기〉는 간단하게 말하자면, 천황의 아들 히카루 겐지가 이 여자 저 여자 만나 서 바람을 피우는 내용이다. 겐지는 아름답고 상냥하고 똑똑하며 부유하고 지위도 높은 거의 완벽한 엄친아지만 한편, 친모가 일찍 세상을 떠나 평생 어머니를 닮은 여자들을 쫓아다니는 마더 컴플렉스의 전형과도 같은 인물이다. 가장 큰 영향을 준 세 여성은 친모인 기리쓰보 고의, 후지쓰보 중궁, 그리고 실질적인 정실부인 무라사키노우에인데 이 세 명이 공교롭게도 얼굴이 비슷하다. 〈겐지 이야기〉는 주인공이 매력적인 바람둥이인데다가 등장인물의 복잡한 심리를 섬세하게 잘 묘사하여 현대인이 보기에도 감탄할 만큼 사랑과 인생의 심오한 이치를 잘 그려낸 훌륭한 드라마이다. 특히 헤이안 시대의 우아한 연애 문화-와카를 편지로 주고받으며 마음을 전하고 아름다운 자연풍광을 보거나 음악을 들으며 함께 시간을 보내는-가 날 매료시켰다.
미인들이 수도 없이 등장하는 이 만화에서 내가 가장 깊은 인상을 받은 인물은 겐지의 애인이자 전동궁의 미망인인 로쿠조의 미야스도코로다. 겐지보다 8살 연상인 그녀는 차갑고 기품 있는 귀부인으로 겐지를 사랑하면서도 항상 품위를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식어가는 사랑에 괴로워하던 그녀는 겐지의 본처인 아오이노우에가 임신했다는 소식을 듣자 질투에 정신이 나간 나머지 생령이 되고 만다. 그 생령은 출산을 마친 아오이노우에에게 달려들어 살해한다. “사랑하게 되면 영혼이 육신을 떠나 밖으로 나오는 일이 있게 마련이군요.” 아오이노우에에게 빙의된 미야스도코로의 생령이 겐지를 비웃으며 스스로가 생령임을 고백하는 말이다. 깊은 사랑이 살아 있는 사람을 생령으로 만든다. 사랑이 생령으로 하여금 연적을 살해 하게 한다. 그만큼 사랑은 아름답지만 고통스럽기도 한 감정이라는 것을 작가는 이 장면에서 미야스도코로의 입을 빌어 말하고 있다.
▲<그림2>〈겐지 이야기〉 Ⓒ 야마토 와키
따돌림 당한 분노가 사람을 생령으로, 〈미래의 골동품 가게〉
이 생령은 구아진 작가의 웹툰 〈미래의 골동품 가게〉에도 등장한다. 〈미래의 골동품 가게〉는 이번에 부천만화대상에서 대상과 인기상을 수상했다는 소식을 듣기 전부터 주변 지인들로부터 강력하게 추천을 받았던 웹툰이다. 한동안 밀린 원고를 쓰기 바빠서 웹툰을 전혀 보지 못하다가 주변 사람들이 너나없이 찬사를 보내길래 보기 시작했다. 깜짝 놀랐다. 우선 구아진 작가가 정말 성실하게 한국 무속에 대해 사전조사와 취재를 했다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주호민 작가의 〈신과 함께〉가 한국 신화를 다뤘다면, 〈미래의 골동품 가게〉는 한국 무속을 콘텐츠 속에 잘 녹여냈다. 독창적인 한국형 오컬트 판타지로서 그림체와 스토리의 조화가 훌륭하며 이야기를 끌어가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다.
무당의 손녀 미래는 고등학교에 진학해 혜경이란 새 친구를 사귀는데, 평소 따돌림을 받던 혜경이의 분노와 원한은 결국 생령으로 현현하여 따돌림을 주도하는 친구에게 살을 날리게 된다. 미래가 자신의 모든 능력을 총동원해서 혜경이를 다시 정상으로 돌아오게 하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그림3>〈미래의 골동품 가게〉 Ⓒ 구아진
〈겐지 이야기〉에서 사랑에 대한 집착을 생령으로 표현했다면, 〈미래의 골동품 가게〉는 친구에게 따돌림당한 원한을 생령으로 표현하여 이야기 속에 녹여냈다. 사람이 원을 이루지 못한 한은 이토록 무서운 법이다. 앞으로 내 작품을 쓸 때 유념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