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양지적 순간, 하양지적 몸짓
하양지의 <안녕이 오고 있어>
〈안녕이 오고 있어〉는 이별을 준비하는 중학생 소녀들의 이야기다. 주인공 지우, 시영, 채린, 송이는 이 과정에서 서로 상처를 주기도 하지만 종국에는 우정을 재확인하고 통과의례라 할 이별을 받아들인다. 여기서 가장 기억에 남을 장면은 무엇일까. 〈안녕이 오고 있어〉는 갈등과 성숙이 조화를 이루는 성장만화의 온유한 리듬을 그려내고 있다. 그러니 굳이 특별한 장면을 뽑으려 애쓰지 말자. 대신 갈등과 성숙의 만곡 속에서 의미를 창출하는 형식에 관해 이야기하면 어떨까. 성장만화와 긴밀히 연결된 더 나아가 하양지 작품 전체를 아우르는 어떤 형식에 관해서 말이다.
구체적 형상과 추상적 캐릭터의 조화로 완성한 하양지 형식
〈안녕이 오고 있어〉에서 하양지의 형식은 무엇인가? 우선 하양지 형식은 일종의 사진적인 것이라 해두자. 흘러가는 이러저런 사건들 속에서 미묘하지만 한편으로 놓쳐서는 안 될 순간들을 정확히 포착한다. 그러니까 연속성에서 떨어져 나와 시간의 흐름을 늦추고 서는, “인파 속에서 계단을 오르내리기도, 복도를 서성이기도 하며 들뜬 마음으로 아주 중요한 일을 안고 있다는 듯이 바삐 몸을 움직이는” 일련의 순간들을 조심스레 담아내는 것이다. 필시 하양지적이라 지칭할 순간들. 그렇다면 이 순간을 다름 아닌 하양지적 형식이라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아니다. 이는 하양지적인 형식이되 아직 무언가 모자라다. 우리는 이때 “삶에서 의미란 순간적인 것이 아니며, 의미는 관계를 짓는 과정에서 발견된다.”는 존 버거의 말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안녕이 오고 있어〉 역시 그렇다.
▲<그림1>〈안녕이 오고 있어〉 Ⓒ 하양지
〈안녕이 오고 있어〉에서 정말로 나를 사로잡는 것은 하양지적 순간이라 할 특별한 장면이 아니다. 오히려 그다음 이어지는 우스개적 장면이 나를 사로잡는다. 이 두 장면 사이엔 어떤 차이가 있는 걸까. 클로즈업과 원경의 차이? 두 장면의 차이는 단 순히 물리적 거리로 환원될 수 없을 것 같다. 이보다 만화의 추상화와 관계된 카툰화의 위상차라고 하는 것이 더 옳을 테다. 하양지 작가는 감정을 고조시키는 구체적 형상의 캐릭터를 그리다가도 이어지는 장면에선 뻔뻔할 정도로 낙천적인 추상적 형상의 캐릭터를 그려버린다.
▲<그림2>〈안녕이 오고 있어〉 Ⓒ 하양지
물론 카툰화의 급격한 위상차가 〈안녕이 오고 있어〉만의 독창적 기법은 아니다. 많은 만화들이 유머를 유발하기 위해 복잡한 구체적 캐릭터와 단순한 추상적 캐릭터 사이를 자유로이 오가곤 한다. 하지만 〈안녕이 오고 있어〉에서 캐릭터의 형상이 극단적으로 전환되는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가령 “아무도 내 말을 듣지 않아.”, “학교도 모자라 집에서도 너네 얘기 듣는 거 이제 지겨워.”라고 하는 결정적 순간을 보자. 그런데 작가는 보는 이의 마음을 일렁이게 하는 바로 이 순간 자유분방한 드로잉으로 하양지적 몸짓을 도입한다. 어떤 이유에서일까. 왜 어울릴 것 같지도 않은 하양지적 순간과 하양지적 몸짓을 결합시킨 걸까. 긴장과 이완이라는 서사적 맥락에서 고찰해볼 수 있겠다. 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양지적 순간과 하양지적 몸짓의 결합이 〈안녕이 오고 있어〉의 주제를 형상화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림3>〈안녕이 오고 있어〉 Ⓒ 하양지
삶은 특별한 순간, 결정적 순간 같은 하양지적 순간만으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다. 설사 그 순간이 너무나 아름답고 그래서 우리의 마음 한편 고이 접어 간직할지라도 말 이다. 이 때문에 평범하지만 한편으로 일상을 계속 이어가는 하양지적 몸짓이 하양지적 순간과 동등하게 소중하다. 〈안녕이 오고 있어〉와 나란히 놓일 수 있는 전작 〈정순전〉의 대사를 보자. “이상하게 작별을 하고 나서야 난 벗을 잃은 게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다. 추억을 나누었으니 어디에서든 그것들을 떠올리며 여생을 보낼 수 있지 않은가···. 원래의 곳으로 돌아간다는 건 좋은 것들을 다시 볼 수 있다는 뜻과 같다.” 특별한 순간과 평범한 순간 그리고 구체적 캐릭터와 추상적 캐릭터가 쉼 없이 왕래하는 이야기. 그래서 마지막 장면 주인공 시영이는 남아 있는 친구들을 그렇게 한없이 따뜻하게 바라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