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만화(디지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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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과 현실의 경계에서

<지금, 만화> 17호에 커버스토리로 실린 글입니다.

2023-07-12 정명섭

최근 개봉되는 할리우드 영화의 예고편을 보면 이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되었으며……라는 자막에서부터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웹툰을 비롯해서 소설과 드라마, 영화 같은 콘텐츠들은 가상의 등장인물과 사건으로 진행되는 것이 기본 원칙이다. 하지만 상당수의 콘텐츠들이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되며, 그것을 예고편이나 인터뷰 등을 통해 적극적인 홍보수단으로 사용한다. 영화뿐만 아니라 소설과 웹툰에서도 실제로 일어난 범죄를 차용하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 이렇게 사실과 현실의 경계에 서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대중들이 소비하는 콘텐츠는 어떻게든 그 시선을 사로잡아야 한다. 그래서 다양한 방식으로 콘텐츠를 만들면서도 대중들이 좋아할만한 요소들을 흡수하는데 노력한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는 점이다. 일단, 사람들은 실제 있었던 일에 대단히 관심이 많다. 아무래도 작가가 생각해낸 가상의 이야기와 실제 벌어진 사건의 무게감이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특히, 범죄를 주제로 다루는 콘텐츠의 경우에는 더더욱 그렇다. 살인을 비롯한 범죄는 일상생활에 큰 파장을 주고 사회적으로도 물의를 빚기 때문에 대대적으로 알려지기 때문이다. 콘텐츠를 만들 때 가장 중요한 점이 바로 이야기의 배경에 대한 설명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대단히 큰 이점이 될 수 있다. 따로 설명하거나 이야기하지 않아도 독자들이 배경을 알 수 있다면 콘텐츠를 보는 진입 장벽을 낮출 수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실제 일어난 범죄를 떠 올리면서 관객들은 다양한 감정을 느낀다. 그 흐름을 따라가면서 관객들에게 현실감을 더해줄 수 있다.

 

헐리우드의 실제 사건의 영화화 사례

예를 들어 할리우드의 고전 영화인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는 보니와 클라이드라는 전설적인 무장 강도 커플을 주인공으로 하고 있다. 당시 미국 시민들은 대공황으로 다들 힘들어하던 시절, 자신들의 집을 빼앗아가는 은행을 털던 보 니와 클라이드의 강도 행각을 영웅시했다. 그리고 두 사람이 1934523, 프랭크 해머가 이끄는 경찰들에게 150여발의 총격을 받고 벌집이 된 채 사망하자 오히려 죽음을 슬퍼했다. 둘의 죽음은 1967년 페이 더너웨이와 워렌 비티가 각각 보니와 클라이드로 출연한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라는 영화의 배경이 된다. 당대에 큰 관심을 끌었던 강도 커플의 이야기가 30여년 만에 영화로 만들어졌고, 엄청난 성공을 거뒀다. 특히, 두 사람을 의적처럼 묘사하고,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는 것으로 묘사했다. 일반적인 범죄물과 다른 흐름으로 이어진 것은 당연히 실화를 바탕으로 했기 때문이다. 그 때문인지 막 대한 흥행 수입을 올린 것은 물론이고, 타임지가 선정한 100대 영화에 뽑혔다.

<그림1>〈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영화 포스터


<그림2>〈하이웨이 맨〉 영화 포스터


2019년에는 케빈 코스트너와 우디 해럴슨이 주연을 맡은 하이웨이 맨이라는 영화가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되었다. 이 영화는 보니와 클라이드 커플을 추적해서 사살한 전직 텍사스 레인저인 프랭크 해머와 그의 동료인 벤저민 골트가 주인공으로 나온다. 그 밖에도 보니와 클라이드에 관한 얘기는 뮤지컬을 비롯해서 다양한 콘텐츠로 재탄생되었다. 이것은 실화가 주는 무게감과 가치를 콘텐츠 업계에서 어떻게 받아들이고 활용하는 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할리우드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를 만들어서 공개했다. 실화를 배경으로 한 가장 대표적인 한국 영화는 살인의 추억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은 범인인 이춘재가 잡혔지만 사건이 벌어진 당시와 영화가 만들어진 2003년에는 아직 범인이 잡히지 않았던 시점이었다. 따라서 유력한 용의자가 등장하지만 범인이 체포되지는 않았다. 연쇄살인 사건의 범인이 아직 잡히지 않았다는 으스스한 설정은 당신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라는 포스터의 카피라이터에 극명하게 드러낸다. 잡히지 않는 범인에 대한 목마름은 영화 내내 지속되었고, 관객들은 그 유명한 논두렁 롱테이크 장면을 비롯해서 실화가 뿜어내는 긴장감에 푹 빠졌다.


웹툰 역시 실화라는 배경을 발 빠르게 받아들였다. 사실, 영화나 드라마보다 더 빠른 속도로 받아들일 수 있고, 주요 독자층이 사회 문제에 관심이 많은 10대와 20대라는 점을 감안하면 더더욱 그렇다. 특히, 10대와 20대는 사회적 갑질과 부조리의 피해자 혹은 대상이기 때문에 더더욱 그러하다. 따라서 사회에 물의를 일으킬만한 범죄를 주제로 혹은 소재로 다루는 웹툰들이 적지 않게 나왔다. 가장 대표적인 작품 중 하나가 바로 네이버웹툰에서 연재된 비질란테. 자경단을 뜻하는 비질란테는 주인공 김지용이 어머니를 잃고 가해자들이 가벼운 처벌을 받는 것에 분개해서 사적 재재에 나서는 것에서 시작된다. 주인공이 법에 의지하지 않고 자신이 직접 나서는 이유가 바로 가해자들이 받은 가벼운 처벌이라는 점은 범죄를 소재로 한 웹툰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다. 물론, 사적 재재에 나서는 주인공을 다룬 콘텐츠는 영화 데드 위시시리즈를 비롯해서 대단히 많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조금 다른 시점을 보여주는데 주인공 이 법에 의지했다가 좌절을 겪으면서 시작된다는 점이다. 비질란테에서도 주 인공이 어머니를 죽인 건달들이 고작 36개월 형을 받는 것에 분개해서 사적 재재에 나서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웹툰을 비롯한 모든 콘텐츠에서는 주인공이 어떤 행동에 나설 때에는 그에 걸맞는 이유가 있어야 한다. 사회 정의 같은 교과서에 나오는 진부한 얘기로는 독자들을 설득할 수 없다. 가장 선명한 이유는 바로 복수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복수는 빠르게 상황을 설명하고 보여줘야 하는 웹툰에 가장 적합한 동기이기도 하다. 자연스럽게 복수를 주제로 하는 범죄물로 이어진다.

<그림3>〈비질란테〉 Ⓒ CRG, 김규삼


우리는 TV를 통해 엄청난 범죄를 저지르고도 돈과 권력을 배경으로 가벼운 처벌을 받는 사례들을 보게 된다. 그걸 보면서 분개하고 짜증을 내게 되는데 자연스럽게 그걸 해소해줄 콘텐츠를 찾게 되는 것이다. 웹툰은 거기에 발 빠르게 대처하는 것이다. 비질란테는 몇년간 연재를 하면서 다양한 범죄들을 모티브로 했다. 조두순 사건을 비롯해서 보배드림 음주운전 보이콧 사건, 떡볶이 배달 청년 사망사고, 의정부 고교생 폭행 사건 등을 다뤘다. 자세히 살펴보면 한 가지 공통점이 보인다. 바로 10대나 20대가 피해자로 등장하는 사건들이 많다는 점이다. 아무래도 웹툰을 보는 주요 독자층과 겹친다. 이 점은 비질란테가 사적 재재에 나선다는 가장 큰 이유인 사법 불신과도 깊은 연관이 있다. 아무래도 사법부에 대한 광범위한 불신을 가장 선명하게 드러내는 것이 바로 청소년과 청년 계층이기 때문이다.

이런 지점은 웹툰의 주요 장르 중 하나인 학원물에서도 극명하게 드러난다. 민백두 유니버스의 독고시리즈 역시 강혁이 학교 폭력으로 사망한 쌍둥이 형 강후의 복수를 위해 움직이는 것이 시작이다. 형은 죽고 아버지는 소식을 듣고 오던 중 교통사고로 사망한다. 어머니까지 정신 이상으로 인해 집을 나가버리는 와중에도 강우를 죽인 범인들은 아무런 처벌을 받지 못한다. 결국 강혁은 쌍둥이라는 점을 이용해서 강우 대신 태산고에 복학한다. <독고> 시리즈의 첫 번째 무대인 태산고는 정글이나 다름없는 곳으로 묘사된다. 힘이 센 일진들이 약한 동급생들을 빵셔틀로 쓰고 괴롭히고, 말을 듣지 않으면 집단 구타를 서슴지 않는다. 강혁은 중학교 때 일진들과의 집단 패싸움을 벌였고, 이후에도 법에 의한 처벌 보다는 사적 재재가 훨씬 유용하다고 믿는다. 반면, 쌍둥이 형인 강후는 아무리 답답해도 법에 의해 처벌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림4>〈독고〉 Ⓒ Meen, 백승훈


<독고>에서는 법에 의한 처벌을 주장하던 형 강후가 사망하고, 강후가 사적 재재라고 할 수 있는 복수에 나선다는 구도로 이뤄진다. , 법적인 처벌은 현실적이지 않고 이상적인 방식이며, 사적 재재가 오히려 더 효과적이라는 설정을 보여준다. 실제로 <독고>에서는 강혁이 복수에 나선지 한 달도 안 걸려서 태산고의 일진들을 박살낸다. 사법처리를 하려고 했지만 오랜 재판과정과 솜방망이 처벌로 이어졌을 것이다.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해석의 여지가 있긴 하지만 힘이 있다면 사적 재재가 훨씬 효율적이며 올바른 방식이라는 메시지까지 전달될 수 있다. 이후, 수많은 학원물에서 비슷한 구도가 반복된다.

그것은 웹툰의 주요 소비층인 청소년과 청년들이 학교에서 직접 겪은 부조리와도 깊은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드라마로도 제작된 웹툰 <모범택시> 역시 사적 재재를 다루고 있다. 의뢰를 받은 택시 운전수가 의뢰인의 부탁을 받고 법에 의하지 않은 처벌을 한다는 내용이다. 주요 소재 역시 청년들이 자주 겪는 갑질과 괴롭힘, 그리고 동영상 유출이나 가스라이팅 등이다. 거기에 사립 학교에 교사로 들어가기 위해 뇌물을 썼다가 실패로 돌아가자 자신의 장기를 팔아서 부모의 빚을 갚아주는 청년의 모습을 통해 현대 사회의 잔혹함을 다루고 있다. 취업이 힘들어서 편법을 썼지만 그조차도 사기를 당해버리는 비참한 현실을 독자들에게 각인시켰다. 비슷한 일을 겪거나 혹은 바라봤던 청년 세대들에게는 자신이 당한 일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리 고 이런 범죄들을 제대로 처벌하지 않는 사회와 기성세대에 대한 분노가 고스란히 웹툰의 소재로 사용된 것이다.


한국의 실제 범죄 소재의 웹툰화할 때 문제점

위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 콘텐츠, 특히 웹툰은 사회적인 물의를 일으키거나 독자들이 피부에 와 닿게 느껴지는 사건들을 발 빠르게 이용했다. 실화가 주는 무게감과 그것에 대해서 독자들이 현실에서는 느끼지 못할 통쾌함을 선사해주기 때문이다. 비질란테에서는 가해자들을 사적 재재로 처벌하는 장면을 보여준다. 독고시리즈에서도 학교에서 학생들을 괴롭히는 일진들을 폭력으로 무참하게 제압하는 모습이 나온다. <모범택시>에서는 사회적 공분을 불러일으킨 성관계 동영상의 유출과 폐쇄적인 섬에서 무법자처럼 행동하면서 사람들을 괴롭히는 불량배를 등장시킨다. 모두 다 현실에서는 솜방망이 처벌을 받거나 아니면 처벌조차 받지 않고 넘어가기 때문이다. 실제 보배드림 음주운전 보이콧 사건의 발단이 된 교통사고의 가해자는 합의를 했다는 이유로 집행유예 판결을 받았다. 떡볶이 배달 청년 사망 사고의 경우에도 가해자인 트럭 운전기사는 금고 1년 형을 받고 복역하다가 풀려났다. 성관계 동영상 유출 사건에서도 가해자는 큰 처벌을 받지 않았고, 대신 피해자들이 사회적으로 매장당하고, 심지어 상심한 나머지 자살하거나 자살을 시도하는 일들이 이어졌다. 독자들은 이렇게 이해할 수 없는 상황들을 보면서 느낀 울분들을 웹툰에 나오는 사적 재재를 통해서 해소해 나가는 것이다. 잔혹한 범죄를 다루는 만큼 사적 재재의 수준도 엄청나게 강해져서 가해자들은 대부분 비참하게 목숨을 잃는다. 가해자가 당하는 사적 재재의 강도가 높아질수록 독자들의 만족감도 높아지는 것은 해당 웹툰의 댓글들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사적제재는 법치국가에서는 범죄나 다름없다. 하지만 미국의 그래픽 노블에서도 솜방망이 처벌을 받은 범죄자를 직접 처벌하는 자경단 같은 배트맨데어데블이 등장한다. 물론, 배트맨의 경우 아무리 흉악한 범죄자라도 죽이지 않는다는 원칙을 가지고 있다. 비질란테에서도 주인공 김지용의 안티 테제인 조헌 경정을 통해 사적 재재의 위험성을 언급한다. 사회를 지탱하는 법이 무시당하고 무너지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얘기하는 조헌 경정의 말에 김지용이 아무 반박도 하지 못한다. 이 장면은 사적 재재가 가지는 위험성에 대해 서 작가가 조헌 경정의 입을 통해 독자들에게 얘기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모범택시에서도 사적 재재를 시행한 주인공과 조연들이 목숨을 잃는다. 웹툰의 작가들 역시 사적 제재가 주는 메시지가 위험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나름대로의 균 형을 잡기 위한 설정들을 집어넣은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범죄를 다루는 웹툰의 주요 설정이 사적 제재가 된 것은 그만큼 독자들의 갈망이 크기 때문이다. 사법 시스템에 대한 불신과 정의가 사라졌다는 실망감을 웹툰을 통해서 해소하려는 것이다. 수요가 공급을 불러온다는 아주 간단한 법칙처럼 독자들이 원 하는 한 웹툰은 앞으로도 범죄에 대한 사적 제재를 주요 소재로 다양한 방식으로 다룰 것으로 예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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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섭

SF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