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거대한 SF의 성실함에 관하여
봉봉의 〈동쪽으로〉
겨울 여행을 떠날 때 함께 할 만화로는 아무래도 장편이 제격이다. 활기가 넘치는 여름과 달리 한겨울의 버스(혹은 기차)는 히터에 막 데워진 공기와 함께 수마를 쫓지 못한 사람들로 가득하다. 오롯이 나만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시간을 후룩 지나가게 하는 건, 역시 거대하고 웅장한 서사뿐이다.
카카오웹툰 〈동쪽으로〉는 인류의 문명이 허물어지고 시체(좀비)가 창궐하는 미래에, 소문 속의 파라다이스를 찾아 동쪽으로 떠나는 네 명의 총잡이의 이야기를 그린 만 화이다. 탄탄한 세계관에 더해 화려한 색감과 화면 밖으로 튀어나올 법한 역동적인 씬(scene), 그리고 재앙 이후의 모습을 담은 쓸쓸하고 정교하며 아름다운 매 컷의 배경을 모두 갖춘 이 작품은 한마디로 성실하다.
사람이 좀비로 변하는 재앙 속에 주인공이 살아남는, 일명 좀비 아포칼립스는 더는 신선한 소재가 아니다. 소설, 영화, 만화나 게임 등 다양한 매체는 물론 역사물이나 타임리프물 등 마찬가지로 다양한 장르와 혼합되어 상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형태의 서사가 끊임없이 개발되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좀비 장르의 포화 속에서 〈동쪽으로〉가 택한 길은 바로 SF(Science fiction)다.
▲<그림1> 〈동쪽으로〉 Ⓒ 봉봉: 왼쪽부터 오르카(푸른색 머리), 돌로레스(분홍), 반고(주황), 노바(노랑)
그런데, SF를 표방하는 많은 작품이 종종 빠지는 함정으로 소재의 소품화(小品+化)가 있다. 그들 작품은 독특한 과학적 상상력과 함께 과학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사회적인 문제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을 제시하는데 우수함을 보이지만, 슬프게도 자신들이 자신 있게 내놓은 세계관과 사회적 통찰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지 대답하는 일에는 실패한다. 그리하여 그들 작품의 신선한 소재는 잠깐의 흥미를 끌 뿐 다른 무엇으로 대체되어도 무방한 장식품이며, 사회적 통찰은 이전부터 반복되어 온 메시지의 답습에 불과하게 된다.
▲<그림2> 〈동쪽으로〉 Ⓒ 봉봉
이와 달리 좀비 아포칼립스와 혼합된 봉봉 작가의 SF 〈동쪽으로〉에서 과학적 공상은 부차적이지 않은 결정적인 것으로서 이야기의 중심에 당당하게 자리한다. 우연에 기반한 외계 물질과 우리와도 무관하지 않은 초인공지능의 등장이라는 개연적인 환경, 그리고 닥쳐온 재앙에 맞서는 적극적인 행위와 함께 개별 등장인 물의 뚜렷한 목표 의식이 한데 어우러진 서사는 어느 한데 침체하여 공회전하는 일 없이 지금까지의 연재분에서 밝혀지지 않은 진실을 향해 역동적인 연출만큼이나 힘차게 나아간다.
더불어, 작품에 등장하는 수많은 오마주도 감상 포인트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했던 편인 ‘오즈의 마법사’(파라다이스는 에메랄드 성에, 주인공들은 각각 꼬맹이, 로봇, 사자, 허수아비에 비유된다)를 포함하여 에피소드 다수에서 어딘가 익숙한 설정(주로 SF에 관한 것)이 등장하며 감상에 재미를 더한다. 수많은 SF를 섭렵한 사람이라면 이러한 장치들을 찾으며 마찬가지로 SF를 사랑한다고 밝힌 작가와 공통된 재미를 나눠도 좋겠다.
근래의 웹툰·웹소설의 회차는 과거와 비교해 확연히 늘어났지만, 그것이 세계관의 크기와 항상 일치하지는 않는 것 같다. 여기에 옳고 그름은 없겠지만, 혹시라도 광대한 배경에서 수많은 주·조연들이 각자의 목표를 위해 협력하고 다투는, 그리하여 기존의 정의를 ‘수정’하고 끝내 진정 바라는 바를 찾아가는 여정이 취향이라면 자신 있게 〈동쪽으로〉를 권하고 싶다.(더불어 같은 작가가 최근 동일 플랫폼에서 근래 웹툰 및 웹소설에서 유행하는 회귀 설정을 SF의 방식으로 해석한 작품인 〈후궁공략〉을 완결했다. 〈동쪽으로〉가 마음에 들었다면 마찬가지로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