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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츠모토 타이요의 〈루브르의 고양이〉: 매혹이 넘치는 밤의 미술관

<지금, 만화> 17호 Essay 에 실린 글입니다. <루브르의 고양이>/글, 그림 마츠모토 타이요

2023-07-09 박산호

매혹이 넘치는 밤의 미술관

마츠모토 타이요의 〈루브르의 고양이〉


10년도 훨씬 전 영국에서 딸아이와 1년 반 정도 살았다. 그때 열 살이었던 딸은 지금도 그때가 내 인생의 리즈 시절이었다고 말할 정도로 기쁨과 추억이 가득 담긴 얼굴로 회상하곤 한다. 아이가 품고 있던 여러 추억 중에서도 백미는 대영박물관에서 하룻밤 잤던 기억일 것이다.

세계 최고의 박물관을 보유한 나라답게 영국은 부모가 동반한 어린이들이 침낭을 가져와 박물관에서 하룻밤 잘 수 있게 해주는 행사를 실시하고 있었다. 영국에 가서 그 사실을 처음 알고 얼마나 놀랍고 부럽던지! 딸은 운 좋게 그 행사에 가는 친구를 따라갈 수 있었다. 그날 밤 박물관의 밤을 상상하며 내가 얼마나 설는지 모른다. 하지만 막상 다음날 돌아온 아이는 박물관 안은 추웠고, 공기는 싸늘한데다, 어두운 밤 전시실에 있는 유물들이 자기를 다 쳐다보고 있는 것 같아서 무섭고 외로웠다고 한다. 아무래도 어른이 생각하는 박물관의 밤과 아이가 실제로 체험한 박물관의 밤은 달랐던 모양이었다.

사실 박물관에서 하룻밤 자기프로젝트에 내가 설던 이유는 어렸을 때 읽었던 소설 클로디아의 비밀덕분이었다. 11살짜리 클로디아는 매일 똑같은 일상이 너무 지겹고, 외동딸이자 장녀라고 해서 집에서 차별하는(그러니까 자잘한 집안일을 자기만 해야 하는) 현실에 분노해서 가출을 결심한다. 그러나 혼자는 두렵고 외로울 것 같아 돈 많은 짠돌이 둘째 남동생 제이미를 포섭한다. 제이미는 9. 지저분하고 추운 건 딱 질색인 클로디아가 선택한 곳은 뉴욕 메트로폴리탄이었다. 숲으로 가출하는 줄 알았던 제이미는 달가워하지 않지만 자신을 회계 담당자로 임명해주겠다는 제안에 넘어간다. 거기서 두 아이가 벌이는 모험, 무엇보다 밤에 미술관 안에 있는 분수에 목욕하러 갔다가 관광객들이 소원을 빌며 던진 동전들을 우연히 발견해 생활비를 마련하는 이 남매의 이야기에 푹 빠져 지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림1>〈루브르의 고양이〉 Ⓒ 마츠모토 타이요


마츠모토 타이요의 루브르의 고양이의 첫 표지를 펼쳤을 때 영국에서 머물던 시절 딸과 같이 가본 루브르 박물관이 보이자 그런 추억과 그리움이 왈칵 쏟아졌다. 그와 동시에 박물관을 점령한 고양이들을 보고 궁금해졌다. 이렇게 귀여운 고양이들이 여기서 대체 무슨 일을 벌이는 것일까. 인간과 고양이의 이야기가 반반씩 나오는 이 작품의 주인공은 한 명이 아니다. 관객들에게 소개하고 싶은 근사한 작품이 너무 많은데 모나리자의 설명만 반복적으로 읊어야 하는 일상에 지친 가이드 세실. 신입으로 들어온 젊은 야간 경비원 패트릭과 그의 파트너인 고참 경비원 마르셀 이렇게 세 사람과 박물관에서 살아가는 고양이들이 주인공이다.


이야기는 이렇다. 새 파트너인 패트릭의 질문에 제대로 대답도 하지 않는 무뚝뚝한 마르셀이 박물관의 한 방에서 고양이들을 키우고 있었던 것. 엄밀히 말하면 오래전부터 박물관에 숨어 살았던 고양이들을 마르셀이 대를 이어 보살피고 있는 것이지만. 패트릭도 마르셀의 비밀에 동참하게 된다. 이 신비로운 이야기는 마르셀이 쫓는 그림에서 나는 소리의 미스터리를 풀어가는 과정과, 밤이 돼서 인간이 흔적을 감추면 모습을 드러내는 고양이들이 의인화된 얼굴로 돌아다니는 이야기가 반씩 섞여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신비로운 캐릭터는 사람들에게 들킬 위험을 개의치 않고 낮에도 박물관 안을 몰래 돌아다니는 일명 하얀 녀석이다. 이 희고 귀여운 새끼 고양이는 태어난 지 두서너 달밖에 안 돼 보이지만 실제로는 고양이 무리의 리더인 푸른 수염과 동갑인 다섯 살이다. 대체 이 하얀 녀석의 비밀은 뭘까.

낮에는 박물관의 좁은 방 하나에 갇혀 사는 고양이들은 보름달이 뜨는 밤이 면 밖으로 나가 공원을 뛰어다니며 밤의 즐거움을 만끽한다. 고양이지만 인간의 얼굴을 한 반인반수의 생명체들이 뛰어다니며 말하고 감정을 느끼는 모습은 기괴한 한편 흥미롭고 매력적이다. 이들을 보다보면 어느새 나도 한 마리의 고양이가 되어 밤의 공원을 훌쩍훌쩍 뛰어다니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다. 다들 그렇게 보름달의 기운과 밤의 매력에 푹 빠져 있을 때도 하얀 녀석은 무리에 섞이지 못한 채 인간의 얼굴을 한 거미와 대화를 나누며 방에 남아 있다. 실은 그 대화도 하얀 녀석을 향한 거미의 일방적인 애정이자 조언이자 친절일 뿐. 하얀 녀석은 조용히 자신의 세계에 침잠해 바깥세상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그런 그를 부르는 이상한 목소리가 있지만 하얀 녀석은 그 소리의 정체를 알아내지 못한 채 막연한 공허에 시달린다.

<그림2>〈루브르의 고양이〉 Ⓒ 마츠모토 타이요


다시 인간의 이야기로 돌아가. 마르셀 할아버지는 어렸을 때 사라진 누나가 박물관에서 그와 놀다가 점점 말수가 줄어들었고, 사람들과 잘 섞이지 못하던 누나는 어느 순간부터 성장하지 않다가 어느 날 그림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는 놀라운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래서 누나가 숨어버린 그림을 찾기 위해 지금까지 박물관에서 일하고 있으며, 그가 고양이 중에서도 특별히 아끼는 하얀 녀석도 누나처럼 그림 속을 드나드는 능력이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녀석이 다섯 살이면서도 어린 새끼의 모습을 하고 있다고. 그렇게 하얀 녀석의 비밀이 밝혀졌다. 세실과 패트릭은 마르셀 할아버지를 도와 그의 어린 누나를 찾는 조사를 시작하고, 삶에 절망해 지친 채 마냥 방황하는 하얀 녀석은 자기를 부르는 의문의 목소리를 찾아 박물관 속의 여러 그림 속을 들어갔다 나오는 생활이 반복된다. 이 신비로운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결국 알게 된다. 이것은 상실과 성장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을. 그리고 세상에 속하지 못해 고통 받는 이들의 슬픔을 다루는 이야기라는 것도. 경비원 할아버지 마르셀의 삶은 세 살 위인 누나 아리에타가 사라지면서 망가져버린다. 누나를 잃은 슬픔에 가족의 삶은 영원히 달라졌고, 누나가 그림 속으로 들어갔다는 어린 마르셀의 말을 누구도 믿어주지 않는다. 그래서 마르셀은 평생 박물관을 떠날 수 없었다. 그의 삶은 박물관에 영원히 박제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그림3>〈루브르의 고양이〉 Ⓒ 마츠모토 타이요


하얀 녀석도 마찬가지다. 녀석이 어쩌다 그림에 들어가는 능력을 갖게 됐는지 알 수 없지만 덕분에 박물관을 대낮에도 거리낌 없이 돌아다닐 수 있게 됐다. 사람들에게 잡힐 것 같으면 아무 그림 속으로나 도망칠 수 있었으니까. 그러나 영원히 도망만 다니는 삶에는 성장이 없다. 그래서 하얀 녀석은 계속 새끼로 남아 항상 공허한 눈으로 세상을 보며 삶에 절망한다. 그는 누구와도 가깝게 지내지 못한다. 자신이 있을 곳이 여기가 아니라고 느끼니까. 이토록 귀여운 생명체가 허무주의자라니 너무나 근사하면서도 슬픈 설정이 아닐 수 없다. 결국 누나의 비밀을 풀지 못한 채 박물관에서 생을 마칠 뻔한 마르셀 할아버지는 친절하고 용감한 세실의 끈기 있는 조사 덕에 누나가 들어간 그림을 찾게 된다. 그리고 천성이 다정한 하얀 녀석은 그 덕분에 목숨을 잃을 뻔한 위기를 넘기고 자신을 부르는 의문의 목소리를 따라 그림 속으로 들어갔다가 마르셀의 누나인 아리에타를 만나게 된다. 둘은 그림 속에서 같은 인간이 되어 꿈처럼 아름다운 시간을 보내지만. 하얀 녀석은 같이 그림 속을 나가자고 했을 때 아리에타는 거절하며 대신 마르셀에게 전해달라고 시계를 건네준다.


그렇게 마르셀은 누나가 그림 속에 있다는 증거를 찾아 인생을 걸었던 추적을 끝내고, 하얀 녀석은 성장한 모습으로 박물관을 벗어나 세상을 향해 나아간다. 세상에 섞일 수 없어 그림 속으로 들어간다는 이 대담하고도 놀라운 설정은 사실 하나의 거대한 비유였을 것이다. 세상살이에 지치고 같이 어깨를 스치며 지내야 할 인간이 징그러워졌을 때 우리는 상상의 세계로 들어가 잠시 쉬게 된다. 그러나 언젠가는 거기서 나와 다시 거친 세계에 부대끼면서 때로는 다치고 눈물도 흘려가며 살아야 한다. 그것이 성장이고 삶이니까. 마츠모토 타이요는 그 진리를 이토록 꿈처럼 아름다운 작품으로 그려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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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산호

소설가, 번역가, 에세이스트
『너를 찾아서』, 『어른에게도 어른이 필요하다』, 『단어의 배신』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