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만화도 미스터리?’
난다의 〈도토리 문화센터〉와 순끼의 〈치즈 인 더 트랩〉
장르는 특정한 구조에 관한 기대이다. 예컨대 미스터리 장르는 범죄나 살인 사건 등의 소재로 환원되기보다 수수께끼가 있고, 복선이 있으며, 해결이 있는 안 정적인 이야기 구조에 관한 믿음 체계라고 할 수 있다. 미스터리를 펼친 독자는 혼란스러운 현상, 기이한 사건과 비밀이 점점 윤곽을 드러내어 끝내 명쾌한 답 을 얻으리라는 기대를 품고 작품을 읽어 나간다. 미스터리 독자가 수수께끼와 해답을 원한다면 로맨스 독자는 사랑의 전개와 완성을, 일상툰 독자는 공감할 수 있는 소박한 일상의 편린을 보길 원한다. 따라서 작품과 장르가 잘못 매치될 경우 작품의 완성도를 떠나 기대를 배반당한 독자의 혹평이 돌아오기도 한다. 반면, 장르를 성공적으로 혼합해낸 작품은 독자의 예상을 기분 좋게 깨트리면서 새로운 경험을 안겨주기도 한다.
난다 작가의 〈도토리 문화센터〉(이하 ‘도토리’)와 순끼 작가의 〈치즈 인 더 트랩〉(이하 ‘치인트’)은 각각 옴니버스 드라마와 캠퍼스 로맨스에 미스터리 구성과 연출을 효과적으로 차용한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두 작품은 미스터리의 다음과 같은 특성을 작품의 뼈대로 삼는다. 첫째, 미스터리는 사물의 ‘이면’을 다루는 장르다. 즉, 평범한 일상에 뒤틀림, 수수께끼, 비밀이 있음을 전 제한다. 둘째, 미스터리는 당대 법과 도덕의 ‘위반 상태’로부터 시작한다. 작가는 위반 상태를 바로잡으면서 자신의 윤리관을 피력한다. 온전히 미스터리로 분류되진 않지만, 미스터리의 위 특성에 주목하여 〈도토리〉와 〈치인트〉를 미스터리 혹은 탐정 소설로 읽어 보자.
사물의 이면: 무엇을 비밀로 구성할 것인가
〈도토리〉는 대형 쇼핑몰 건설용 재개발 부지를 차지하고 있는 지역 문화센터를 파괴하러 온 대기업 소속 고두리 부장과 “어쩌다 보니 도토리 문화센터를 지키게 된 귀엽지도 인자하지도 딱히 지혜롭지도 않은 살짝 이상한 할머니들+중년의 이야기”이다. “취미는 인간을 아둔하게 만든다”고 믿으며 워커홀릭으로서 경력을 쌓아 온 고두리 부장은 높은 매매가 제시에도 협상 테이블에 앉길 거부하는 문화센터 소속 4인방을 파악하고 설득하기 위해 사장의 특명으로 ‘취미의 성지’인 도토리 문화센터에 등록하게 된다. 자본주의의 합리성을 체화한 인물의 관점에서 문화센터는 “시에서 가장 비싼 땅 위에 모여서 가장 돈이 안 되는 걸 만들어내고 있는” 아이러니 자체이다. 이용 회원 평균 연령이 70세인 도토리 문화센터에 잠입한 고두리를 따라 독자는 중・노년 여성 각각의 사연을 아마추어 탐정의 관점에서 파헤치게 된다.
이와 같은 형식을 통해 〈도토리〉는 ‘문화센터에 다니는 주부 집단’이라는 타자화를 ‘비밀’이자 ‘열쇠’를 품은 개성 있는 여성 개인들로 주술을 풀듯 해독한다.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직업 성취를 이루었지만 예순이 넘었음에도 여전히 어머니를 향한 인정투쟁에 얽매여 있는 정중순, 가부장적인 남편을 보살피는 아내 역할을 수행하며 감정과 노동, 자신의 꿈을 착취당해 온 모미란, 행적이 묘연한 송수지 등이 그들이다. 일반적인 옴니버스 드라마로 중・노년 여성들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대신, 난다 작가는 야심 차게 이들의 삶을 비밀의 지위에 올려놓는다. 다시 말해, 〈도토리〉는 비밀을 해결하는 이야기인 동시에, 무슨 대단한 사 연이 있겠냐고 속단되는 삶들을 고유한 비밀로 만들어내는 이야기다. 이 비밀들은 여성의 신비화나 낭만화라기보다 무수한 중・노년 여성의 삶과 포개질 수 있다는 점에서 오히려 현실을 탈 은폐한다. 난다 작가의 포근한 일상툰 그림체는 드라마가 지나치게 무거워지지 않도록 현실감의 농담(濃淡)을 조절하는 한편, 다소 환상적인 위기 해소 방식을 무리 없이 만화에 녹인다.
▲<그림1>〈도토리 문화센터〉 Ⓒ 난다
〈치인트〉는 평범한 대학생 홍설과 수상한 선배 유정의 미묘한 관계를 다룬다. 유정은 잘생기고 부유하며 의젓하고 똑똑한, 일견 완벽해 보이는 사람이다. 하지만 관찰력이 좋은 홍설은 학과의 인기인 유정이 또 다른 얼굴을 가지고 있다고 확신하며 거리를 둔다. 홍설의 판단에는 유정의 은근한 괴롭힘을 비롯한 경험적 근거들이 있다. 그러던 어느 날 돌연 유정이 태도를 바꿔 홍설과 친밀한 관계를 맺으려 접근한다. 홍설은 ‘내게 호의를 표하는 이 선배를 믿어도 되는가? 유정은 정말로 어떤 사람인가?’를 질문하면서 로맨스와 스릴러 사이를 줄 타며 진실에 접근해 간다. 300화가 넘는 긴 회차에 걸쳐 순끼 작가는 회상이라는 장치를 통해 유정을 둘러싼 관계의 이면을 들춘다.
사랑을 일구는 과정과 결실에 집중하는 전통적인 로맨스와 달리, ‘로맨스릴러’로서 〈치인트〉는 사랑에 내포된 위험을 어떻게 다룰 것인지 묻는다. 장학금을 위한 학점 관리, 폭력적인 선배, 스토킹을 일삼는 동기, 공격적인 동성 사회성, 끊임없이 책임감을 요구하는 환경 등 불안 속에 있는 홍설에게 유정과의 연 애는 사치일 뿐만 아니라 불안의 원흉이자 ‘리스크’로 다가온다.
▲<그림2>〈치즈 인 더 트랩〉 Ⓒ 순끼
이 작품은 더는 순정 만화의 로맨스를 태연하게 받아들일 수 없고 캠퍼스라는 공간을 낭만화할 수 없는 현실을 반영하면서, 그럼에도 애정에 기반한 관계가 어떻게 가능한가를 질문하기 위해 전형적인 순정 만화의 남주인공을 수상한 비밀로 만든다. 의심과 증인과 증거들 속에서 끊임없이 신뢰가 무너지고 회복되는 가운데 홍설은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간다. 연애라는 친밀한 관계에 도사린 긴장에도 불구하고, 또한 홍설에게 점차 그 관계는 가장 의지할 수 있고 친밀한 것으로 자리 잡는다. 이 같은 양가성은 로맨틱한 장면인 듯 무섭고, 이면이 있을 법하나 표면이던 장면들로 〈치인트〉에서 탁월하게 연출된다.
위반 상태, 그리고 탐정이 복구시키는 것
미스터리는 살인, 절도, 실종 등 일상성이 파괴된 상태에서 출발하여 상황을 바로잡고자 한다. 규범의 파괴와 회복이라는 이 같은 운동은 질서를 보수하고 정상화하는 일이기도 하고, 진부함의 먼지를 뒤집어쓴 정의를 건져 올려 다시 공포하는 일이기도 하다. 두 작품에서 무엇이 위반 상태로 설정되며, 무엇이 복구되어야 할 질서 또는 정의로 제시되는가를 질문해 보자. 땅 소유주들의 비밀을 파헤쳐 땅을 팔게 만들고 쇼핑몰을 건설하면 문제가 해결되는가? 유정은 위험하고 이상한 사람이 맞는데, 그와의 관계를 끊고 홍설이 평화를 찾으면 문제가 해결되는가? 그렇지 않다고 말하기 때문에 두 작품은 풍부하고 흥미로워진다.
두 작품은 미스터리의 핵심 요소인 수수께끼-복선-해결의 구조를 따라가기에 ‘사이다’라고 불릴 만한 해소의 감각을 독자들에게 중간중간 선사한다. 하지만 비밀을 푸는 행위는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오히려 발단에서 제시된 ‘위반 상태’를 다시 정의하게끔 만든다.
〈도토리〉에서 잘못된 것은 물정 모르는 소유주들의 비합리성이 아니라 이들을 상처받게 하고 착취해 온 관계들이며, 또한 중・노년의 공공장을 속전속결 로 파괴하려는 개발 자본이다. 〈치인트〉에서 유정은 분명 남을 조종하는 성격과 폭력적인 면모를 지닌 위험한 인물이지만, 또한 잘못된 것은 유정을 조종하고 통제해온 아버지의 억압적 교육과 유정을 속단하고 ‘호구’로 만드는 뻔뻔한 주변인들이다. 고두리와 홍설은 상황의 외부자로서 사건을 조망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초월적인 탐정이 아니라 상황의 내부자로서 사건에 연루되고 해답을 발명해 나가는 불완전한 탐정으로 이야기를 이끈다.
〈도토리〉에서 자신이 단지 회사의 병정이며 자아 없는 직장인에 불과하다고 여기는 고두리에게 “직장인이 자아가 없다고 누가 그래. 모두가 영웅처럼 일하진 못해도 모두 다르게 일해, 고 부장. 남에겐 모래알인 일이 나한텐 바윗덩이 같을 수 있고 그럼 결국 바위를 치우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그런 인간들이 방향을 바꾸고 마는 거야.”라는 상사의 충고는 결국 다른 여성이 그의 착취적 관계를 끝내고 꿈을 이룰 수 있도록 고두리의 등을 떠민다. 아무리 홍설이 영민하고 예리하더라도 〈치인트〉가 작품 전체에 걸쳐 활용하는 회상의 방법 속에서 진실은 파편들의 합으로 추정될 뿐, 한 사람이 온전히 획득할 수 없는 것으로 표현된다. 그렇기에 홍설은 대화를 시도한다. 유정의 정체보다 중요한 것은 유정과 자신이 어떤 관계를 맺고자 하는가임을 깨달은 홍설은 유정이 제공하는 완벽한 로맨스 각본 아래 의심을 덮어두거나, 유정을 밀어내며 스스로를 피해자 정체성에 고착시키지 않고 오히려 유정의 눈앞에 자신의 상처와 피해를 끄집어내 책임을 묻는다. 그리고 나와 함께 변화하겠냐고 유정에게 제안한다. 두 작품에서 복구되는 것은 해답을 찾아 나가는 여성들의 주체성이며, 이것이 작가들이 내놓는 윤리일 것이다.
두 탐정이 각각 회복시키는 건 어쩌면 자본의 논리가 ‘착하게’ 통용될 수 있다는 환상이거나, 노력이든 증여에 의한 것이든 실력과 자원을 가진 사람은 응당 그것을 누릴 자격이 있으며 이를 침범하는 이들은 징벌받아 마땅하다는 능력주의의 신화일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아직 연재 중인 〈도토리〉의 가능성은 무궁무진하고, 완결되었음에도 독자 댓글난에서 여전히 해석과 공방이 오갈 정도로 〈치인트〉에 흩뿌려진 단서들은 풍부하다. 이처럼 익숙하게 재현된 현실과 실재 사이의 간극을 드러내는 데 최적화된 장르이자 비상식적인 상황을 통해 상식을 다시 쓰고자 하는 지극히 사회적인 장르로서, 미스터리는 그림체와 장르를 뛰어넘어, 새로운 접촉에 열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