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왕눈이가 되살아나지 않고서야…
김용키의 〈악몽의 형상〉
작품명보다 이름부터 떠오르는 캐릭터를 만나는 것은 창작자로서 정말 큰 축복일 것이다. 아무리 좋은 이야기를 만들어도 수용자의 기억에는 결국 캐릭터로 함축되고 나머지는 휘발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 캐릭터가 다시는 등장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속편을 만들어야 하면 이만한 저주가 없다. 21세기 최고의 빌런이라 평가받는 〈다크나이트〉(2008)에서 히스레저가 연기한 ‘조커’를 생각하면 단번에 이해되는 상황이다. 조커를 대체할 새로운 빌런을 출연시키거나 다른 배우가 같은 역할을 맡아도 히스레저의 조커가 아우라를 획득하면서 모두 아류작 취급이 된다.
김용키 작가의 〈악몽의 형상〉(2022)을 66화까지 읽은 감상평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이제 ‘왕눈이’라고 하면 〈개구리 왕눈이〉(1973)의 왕눈이보다 〈타인은 지옥이다〉(2018)의 203호 거주자가 먼저 생각날 만큼 성공적인 악당 캐릭터를 만들어 냈지만 굳이 3부작을 하면서까지 ‘왕눈이’를 포기하지 못한 것이 김용키 작가에게 독이 된 것은 아닌지 우려가 비춰진다. 왜냐하면 〈악몽의 형상〉은 전작인 〈타인은 지옥이다〉, 〈관계의 종말〉(2020)을 정리하는 입장에서 가장 큰 세계관을 형성하고 있지만 스릴러로서의 긴장감이 전무하기 때문이다.
김용키 작가는 주인공이 고립될 수밖에 없게 만드는 과정이 부자연스럽다. 폭행으로 인한 트라우마를 가진 ‘발암’ 캐릭터가 함정에 빠지도록 자초해야지만 이야기가 진행될 수 있기 때문에 독자들은 주인공의 행위를 인내해야 한다.
〈타인은 지옥이다〉에서 윤종우는 군 시절 겪은 부조리 때문에 폭력성향을 갖게 되었는데 그 때문에 옆방 사람들과 마찰을 피하지 않았다. 〈관계의 종말〉에서 심규현은 학창시절 폭행을 당했기 때문에 애인이 위험에 노출되는 상황이라는 걸 인지하지 않고 가해 학생들과 술자리를 갖는다. 대신 그 작위성을 감추기 위해 자극적인 장면과 그로테스크한 인물 외형을 다양한 앵글과 클로즈업을 활용해 표현한다. 그렇게 초반은 어떻게든 넘어가서 주인공들이 공포 장르의 필수인 고립된 장소에 갇히기만 하면 작가의 강점인 스릴러적 긴장감이 십분 발휘된다. 그런데 〈악몽의 형상〉은 두 작품과 방향이 다른 작품이다. 전작들의 주인공은 도망치려는 자, 악당은 쫓는 자였다면 이번 작품은 그 반대로 주인공이 악당을 추적하는 방향이다. 도망칠 때는 생존이라는 가장 강력한 본능을 부연할 필요가 없지만 추적을 할 때는 왜 그 위험을 감수하고 추적을 하는지 확고한 동기가 필요하다.
윤종우의 경우, 고시원 살인 사건 이후 9년 동안 가해자인 203호, 왕눈이의 환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쭉 사회부적응자로 살아갔다. 그러던 중 또 다른 피해자인 정다은이 도와달라는 연락을 받게 되었고, 마지막 가족인 친형까지 세상을 떠나면서 윤종우는 트라우마에서 벗어나기 위해 정다은을 도와 왕눈이의 과거를 캐기 시작한다. 또 다른 피해자인 정다은은 펜션 살인 사건의 유일한 생존자로서, 당시 경찰에 신고하기 위해 도망쳤지만 결과적으로 자기 혼자만 살아남았고 당시 남자친구였던 심규현의 실종에 대해 죄책감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남자친구의 마지막을 알기 위해 왕눈이의 과거를 추적하기로 결심했으며 또 다른 피해자인 윤종우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물론 이 과정도 전작들처럼 자연스럽지는 않다. 형사가 한 살인 사건을 보고 9년 전 사건이 생각나서 윤종우와 정다은을 참고인 자격으로 도움을 요청했는데 9년이 지난 지금 왕눈이의 후예들이 살인 활동을 재개했던 건지, 9년 동안 동일범들의 살인 사건이 죽 있었는데 9년이 지난 어느 날 갑자기 형사가 느낌이 온 건지 정확하지 않다. 또한 여전히 정신적인 고통에 시달리는 피해자에게 경찰이 시체 사진을 아무렇지 않게 보여준다거나 주인공 일행에게 경찰 정보망에서 정보를 빼내 넘겨주는 등 부자연스러운 설정들이 있어 경찰을 의도적으로 비하한 것이 아닌가 하는 댓글조차 있다.
▲<그림1>〈악몽의 형상〉 Ⓒ 김용키 : 김용키 작가의 작품은 카메라 앵글을 쉬지 않고 움직여 불안함을 연출한다.
다음으로 그 동기를 계속 불태울 수 있는 땔감이 필요하다. 주인공이 쫓기는 입장에서는 도망치지 않으면 죽기 때문에 주인공의 생명을 위협할 수 있는 악당을 폭력성을 지속적으로 보여주면 되겠지만 주인공이 쫓는 입장에서는 보다 많은 장치들이 필요하다. ‘어째서 주인공만이 진실을 추적해야 하는가?’, ‘만약 진실을 파헤치지 않으면 어떤 위험이 발생하는가?’, ‘진실을 파헤칠수록 주인공은 어떤 위협을 받게 되는가?’ 등의 물음이다. 〈악몽의 형상〉은 이 물음에 대한 대답으로 왕눈이를 소환시킨다. 9년 만에 나타난 왕눈이의 후예들이 왕눈이의 의지를 이어 살인을 저지르고 있다는 설정이다. 9년이나 지났기 때문에 경찰들은 살인사건은 9년 전부터 다시 조사하려는 의지가 없고 주인공들은 9년 전에 죽은 왕눈이의 악몽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 으며 살인을 저지른 자들은 왕눈이와 같은 보육원 출신으로 그의 말을 거부하지 못하고 살인을 저지른 자들이다. (66화 기준으로 정확한 이유가 밝혀지지 않았다.) 제목처럼 악몽의 형상이다. 그런데 서두에 밝힌 것처럼 문제는 이 매력적인 빌런이 작중 이미 죽은 자라는 점이다.
아무리 어떤 악당을 데리고 와도 그들의 평가는 왕눈이의 아류, 왕눈이보다 못한 수준으로 평가되기 때문에 긴장감이 떨어진다. ‘강이’라고 하는 ‘살인자들의 밤’의 리더가 왕눈이의 후계자로 지목되었지만 왕눈이보다 더한 악당으로 설정되지 않았다. 하물며 왕눈이가 자기 후계자로 꼽은 사람은 주인공 윤종우이다.
▲<그림2>〈악몽의 형상〉 Ⓒ 김용키: 66화 다은의 대사 중
66화 시점에서 윤종우는 세계관 최강이 되어서 그를 위협할 수 있는 인물이 없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 물론 주인공이 악당보다 강하면 안 된다는 것은 아니다. 영화 〈아저씨〉(2010)의 경우, 주인공 ‘차태식’이 종우와 마찬가지로 최강자로 설정이 되어있지만 차태식이 서두르지 않으면 소미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데드라인이 설정되어 있다. 그런데 〈악몽의 형상〉의 경우, ‘살인자들의 밤’이 살해를 저지른다고 해서 주인공에게 큰 위협이 되지 않는다. 윤종우와 정다은이 왕눈이의 진실을 추적하는 플롯과 ‘살인자들의 밤’이 왕눈이의 의 지를 이어 살인을 저지르는 플롯은 완전히 별개인 구조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 진실을 파헤치지 않으면 어떤 위험이 발생하는가?’, ‘진실을 파헤칠수록 주인공은 어떤 위협을 받게 되는가?’라는 질문이 무색해진다.
결국 〈악몽의 형상〉은 회를 거듭할수록 긴장감이 전무한 작품이 되어버렸다. 62화에서 “막막하네요. 또 어디서부터 찾아야할지…”라는 다은의 대사가 꽤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타인은 지옥이다〉가 88화였던 점을 비추어 볼 때 62화는 이미 중반 이상인 지점일 텐데, 아직까지 스릴러로서 궤도에 오르지 못하고 있다. 종우가 몸을 키우고 덥수룩한 머리를 자르고 다은의 어머니를 만나 트라우마를 극복하려는 의지를 보이고 있지만 그만큼 진실에 다가간다거나 강력한 적의 등장이 아직까진 없다. 결국 독자들도 피로감을 느끼게 되었는지 매화마다 작위적인 설정에 대해 지적하거나 다은의 비정상적인 민폐 행위에 대해 비꼬는 댓글로 가득하다.
작가 스스로 ‘지옥’ 시리즈의 최종장이라 말한 만큼 왕눈이, 황복자 그리고 보육원에 얼마나 대단한 진실을 숨겨 놓았는지 궁금한 건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도 독자를 옥죄는 구속 장치가 존재할 때 유효하다. 어질러진 퍼즐 조각을 모았을 때 얼마나 대단한 그림이 나올지도 중요하지만 그 조각을 반드시 모아야만 하는 동기부여가 더 필수적이다. 퍼즐 맞추기가 방학숙제였으면 하는 이유라도 필요하다. 여전히 부족한 서사를 보충하기 위해 쉬지 않고 움직이는 컷과 괴기스러운 인물의 클로즈업으로 긴장감을 채워 넣고 있지만 죽은 왕눈이가 되살아나서 프레디 크루거처럼 종우와 다은을 위협하지 않는 이상 이 작품의 숨을 불어넣는 방법이 존재할지 우려스럽다. 부디 최종장이라는 말처럼 유종의 미를 잘 거두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