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 때 대만으로 여행을 가면서 있었던 일이다. 가는 비행기와 오는 비행기 옆자리에 우연히 같은 사람이 앉았다. 알고 보니 KBS에서 스포츠 중계로 유명한 C 아나운서였다. 우연을 핑계 삼아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20대 때 어떤 경험을 많이 하면 좋을지 조언을 구했다. 세계 여러 나라를 다녀본 사람답게 “여행을 많이 다니세요. 새로운 곳에 가면 그곳의 현지 음식을 꼭 드세요. 그곳만의 특색을 느낄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이후 새로운 곳을 방문하면 가급적 현지 음식을 먹으면서 현장의 분위기를 느끼려고 노력한다. 새로운 것을 경험하는 데 여행만 한 것이 없다. 시간이 한참 지나더라도 여행지에서 먹었던 음식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현장의 분위기와 사건이 머릿속에 펼쳐진다. 다시 말해 여행의 기억은 음식을 매개로 지금 이 자리에 소환된다.
만화 〈에키벤〉은 일본의 기차 도시락을 소재로 한 만화이다. 에키벤은 기차역이나 기차에서 파는 도시락으로 역을 의미하는 에키(駅)와 도시락을 뜻하는 벤토(弁当)를 합친 말로 굳이 직역하자면 기차역 도시락이라고나 할까? 에키벤은 일본철도의 탄생과 함께 100년이 넘는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며 현재 2,500종이 넘는 도시락이 팔린다. 도시락집 사장인 주인공 다이스케는 철도 마니아이다. 다이스케는 결혼 10주년 선물로 아내에게 전국 여행 기차표를 받아 혼자 기차여행을 떠난다. 도시락을 찾아 여행하며 방문한 지역의 다양한 에키벤을 맛본다. 우리나라와 비교해 본다면 우리도 전주비빔밥, 나주곰탕과 같이 지역마다 유명한 음식이 있긴 하지만 이를 도시락으로 팔지는 않는다. 일본이나 중국처럼 기차로 하는 여행시간이 길지 않기 때문이다.
▲<그림1> 〈에키벤〉 Ⓒ 하야세 준
도시락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것이 〈에키벤〉의 가장 큰 특징이다. 1,000엔 내외의 각종 에키벤이 등장하는데 음식의 명암을 치밀하게 표현하여 흑백으로 접하는 음식이지만 독자는 보는 것만으로도 생생한 식감을 느낄 수 있다. 철저한 취재와 고증을 바탕으로 한 일본철도에 관한 다이스케의 해박한 지식도 이 만화를 풍성하게 만든다. 반면 내용 전개의 긴장감이 다소 떨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요리왕 비룡〉, 〈미스터 초밥왕〉과 같이 음식을 소재로 하는 만화가 대체로 주인공과 라이벌의 대결을 주요 플롯으로 삼는다. 〈에키벤〉은 여행을 통한 새로운 도시락과 철도 소개가 주요 내용이기 때문에 긴장감보다는 새로운 도시락을 만나는 설렘이 더 큰 매력이다.
▲<그림2> 〈에키벤〉 Ⓒ 하야세 준
2020년 초에 시작된 코로나19는 이제 일상으로의 회복을 앞두고 있다. 조금씩 국내외 여행도 늘어 나는 추세이다. 주변에 물어보면 다들 이번 겨울에는 여행 한 번 가봐야지 하는 생각이다. 겨울 여행에 눈 구경은 빼놓을 수 없다. 〈에키벤-홋카이도 편〉(단행본 4~6권)은 눈 덮인 홋카이도를 배경으로 먹거리와 볼거리를 제공한다. 홋카이도를 겨울에 여행하는 것은 생각만 해도 매력적이다. 〈에키벤〉을 보고 있으면 당장이라도 여행을 떠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그런데 생각과 현실이 다르다는 것이 문
제다. 산더미처럼 쌓인 업무 때문에 올해 겨울에는 과연 여행을 갈 수 있을지.
최기현
문화예술 분야에서 일하며 퇴근 후에 만화를 읽고 글을 씁니다. 공연, 전시를 관람하는 것과 만화 정책에 관심이 많습니다. 최근 글로는 <만화산업 중장기 계획(5차)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과제들>(2022 대한민국 만화평론공모전 우수상), 등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