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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할 수 없다면 비틀어라. 추리, 미스터리 장르에서의 클리셰 사용법

<지금, 만화> 17호에 커버스토리로 실린 글입니다.

2023-07-17 홍정기


판에 박은 듯한 문구, 또는 진부한 표현을 가리키는 문학용어 클리셰(Cliche)는 영화 좀 봤다는 마니아들을 넘어 이제는 진부함, 전형적인 수법을 뜻하는 대명사로 대중들에게 깊이 각인된 단어이다. 영어도 아닌 낯선 프랑스어가 우리 곁에 이토록 깊이 자리매김한 배경은 영화 속에서 찾을 수 있다.

청춘남녀가 주인 모를 낯선 집에 들어간다. 남녀가 한데 어울려 떠들썩하게 즐기던 중 갑자기 미모의 여성이 벌떡 일어나 샤워실로 향한다. 중요부위를 겨우 가릴 정도의 손바닥만 한 천 쪼가리를 한 올 한 올 벗어 던지는 여성. 눈을 감고 샤워기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을 온몸으로 느끼는 여성의 샤워커튼에 불현듯 검은 그림자가 드리운다. 커튼 밖 낯선 존재를 눈치챈 여성이 비명을 지르기 위 해 숨을 들이키지만 커튼 밖 이방인은 비명을 토해낼 틈을 주지 않는다.’ 샤워부스 안 여성은 어떻게 되었을까. 또 다른 예를 들어보자.

총탄이 난무하는 전쟁터. 죽음의 사신과 가장 가까운 전장에서 느닷없이 이제껏 소중히 간직한 낡은 사진 한 장을 꺼내는 병사. 사진 속에는 아리따운 여성 이 혹은 귀여운 아이를 앉고 웃음 짓고 있다. 전쟁이 끝난 뒤 행복한 재회를 꿈꾸는 병사. 하지만 병사가 머무는 초소에 고막을 찢을 듯한 폭음이 인다.’ 병사는 애타게 그리던 애인을 만날 수 있을까.


미스터리 영화와 추리 소설의 클리셰

이 같은 장면들은 등장인물의 죽음을 암시하는 사망 플래그로서 영화를 보는 관객에게 미리 마음의 준비를 시키는 대표적 클리셰라 할 수 있다. 결국 클리셰란 이제껏 수많은 작품을 통해 입증된 공식이자 가장 효과적이고 효율적인 대중적 코드인 셈이다.

이런 클리셰가 가장 빈번히 사용되는 장르가 공포영화이다. 청각과 시각으로 관객을 놀라게 만들어야 하는 공포영화에서 이제껏 축적된 클리셰의 공식은 가장 극명한 효과를 보이는 장치로 사용된다. 식상함과 신선함 사이에서 창작자는 고민에 빠진다. 잘 알려진 흥행코드를 따르자니 예측이 가능하고 클리셰에서 벗어나는 순간 대중의 반응은 천차만별로 갈리며 모험이 시작된다. 캐빈 인 더 우즈는 공포영화의 클리셰를 영리하게 비틀어 신선한 충격을 안겨준 대표적인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공포영화에 뿌리박힌 고정관념을 역으로 이용하여 반전의 묘미를 선사하는 것이다.

<그림1>영화 〈캐빈 인 더 우즈〉 포스터


비단 영화에만 국한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사실 소설 중 추리소설만큼 클리 셰를 역으로 이용하는 장르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독자들의 뇌에 깊이 박혀있는 클리셰일수록 반전의 효과를 주기엔 더없이 안성맞춤이다. 추리소설의 반전이란 독자들의 고정관념을 비틀어 깨트리고 그로 인한 카타르시스를 선사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기 때문이다. 완벽하게 속일수록 독자들은 오히려 찬양하고 칭송한다. 독자와 작가와의 치열한 두뇌 싸움에서 승기를 거머쥐기 위한 사전작업. 그 순간 진부하게만 보이던 클리셰는 작가가 숨겨놓은 회심의 반격을 위해 공고히 쌓아놓은 복선으로 새롭게 환골탈태한다.

클리셰의 쓰임이 가장 빛을 발하는 장르는 오직 텍스트로만 진정한 반전을 선사할 수 있는 서술트릭이다. 서술트릭은 크게 인물, 배경, 시점 트릭으로 나눌 수 있다. 작가는 오직 독자를 속이기 위해 의도적으로 제한된 정보와 편향된 서술만을 반복한다. 그중, 인물 트릭의 경우 1인칭 시점으로 제한시켜 독자와 주인공을 동일한 시선으로 사건을 바라보게 만든다. 하지만 동일인이라 믿었던 주인공이 사실은 타인이었다는 사실이 인물 서술트릭에 흔하게 쓰이는 방식이다.(물론 반대상황도 가능하다.) 1인칭의 서술자는 보통 주인공일 것이라는 클 리셰를 교묘하게 이용한 셈이다. 교차 서술을 통해 시간, 배경 등을 속이는 서술 트릭도 자주 쓰인다. 시간 서술 트릭 역시 각 시점의 사건들이 동일 시간대에 벌어지고 있다는 보편적 클리셰를 역으로 이용한다. 개인적으로 시점 클리셰를 가장 효과적으로 이용한 서술 트릭으로 우타노 쇼고의 벚꽃 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를 꼽는다. 서술 트릭하면 절대 빠지지 않는 작품으로 언급되는 작품이다.


클리셰가 장르 그 자체

장르 자체가 클리셰인 장르도 있다. 일본 추리소설의 단골 소재인 밀실 트릭은 장르 자체가 클리셰인 경우이다. ‘창문과 방문이 안에서 잠긴 아무도 출입할 수 없는 고층의 방. 이 방 한가운데에서 등에 칼이 꽂힌 채 죽어있는 시신 한 구. 들어갈 수도 나갈 수도 없는 방안에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 홀연히 사라진 범인은 어떻게 침입한 것인가.’ 밀실살인은 불가능해 보이는 밀폐된 환경 속에서 현장에 범인이 남긴 작은 단서를 추리하여 범인과 살인방법을 유추하는 추리소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단골 장르이다. 그런데 밀실에 침입할 정도의 범인이라면 사건 현장을 자살로 꾸밀 수 있지 않을까? 굳이 보란 듯이 피해자의 등에 칼을 꽂아 넣어 경찰이 수사하게 만들 필요가 있을까. 왜 밀실사건이 일어난 건물에는 CCTV가 없을까. 환풍기 혹은 창틈의 공간을 완벽한 밀실이라 할 수 있을까.

밀실 트릭 작품을 보면서 이런 의문을 재기하는 독자는 아무도 없다. 밀실이라 볼 수 없는 작은 결점도 너그럽게 이해한다. 독자가 이 현실성 없는 설정들 을 모두 납득해주기 때문이다. 결국 밀실 트릭을 위한 설정 자체가 클리셰이며 독자와 작가 사이에 암묵적으로 이루어진 룰이라 볼 수 있다. 밀실자체가 장르가 돼버린 지금 기존 밀실의 클리셰를 깨기 위한 작가들의 노력은 계속되고 있다. 밀폐된 방에서 벗어나 절벽이나 강 등으로 단절되는 보다 큰 공간. 즉 드넓은 광장에서 살인이 벌어지는 광장 밀실은 밀실이라는 공간적 클리셰를 역으로 이용한다. 눈 위에 찍히는 발자국을 이용한 눈 밀실, 사람의 시선과 심리에 의한 심리적 밀실, 피해자를 밀실 안으로 집어넣어 트릭을 완성시키는 역밀실도 마찬가지의 변형사례이다. 광장 밀실 작품으로는 본인이 집필한 전래 미스터리나무꾼의 위기를 예로 들 수 있다.


무인도에 지어진 대저택. 그리고 이 저택에 모인 청춘남녀. 느닷없이 몰아친 천재지변에 통신이 두절되고 섬을 빠져나갈 수 있는 배는 끊긴다. 각자의 방에서 하룻밤을 묵은 사람들은 다음날 거실에 모이지만 어김없이 투숙객중 결원이 발생한다. 이어서 결원의 방을 찾아간 여성의 찢어지는 비명소리가 저택을 뒤흔든다.’ 방안에 있던 이가 참혹한 시신으로 발견되었으리라는 건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으리라. 좀 더 나아가보자.

외부인의 침입이 불가한 잠긴 방안에서 발견된 시신. 이른바 밀실살인이 벌 어진다. 투숙객중 누군가가 범인일지 모른다는 불신과 불안감은 팽배한다. 결국 모두가 모여 감시를 해도 모자랄 판에 투숙객들은 각자의 방에서 밤을 보내고 범인이 마음껏 활개칠 판을 마련해준다.’ 바로 옆방에서 동료가 참혹하게 사망하는 살인사건이 발생하지만 저택안의 사람들은 연쇄살인범과 마찬가지로 감정이 결여된 사이코패스라도 되는 듯 아무렇지 않게 잘 먹고 잘 잔다.

명탐정 김전일, 명탐정 코난등을 통해 우리에게 익숙한 추리소설의 하위 장르 클로즈드 서클의 대표적 클리셰이다. 탐정이 등장하는 클로즈드 서클의 틀이 마련된 1920년 아가사 크리스티의 오리엔트 특급 살인을 시작으로 현재까지 무려 백년이 넘도록 클로즈드 서클의 클리셰는 반복, 진화하고 있다. 언제나 사건은 무인도에서 벌어지는 틀에 박힌 환경적 고립의 클리셰를 영리하게 벗어난 작품이 있다. 이마무라 마사히로의 시인장의 살인이다. 언데드 좀비의 존재는 단순히 섬 밖으로 나갈 수 없는 무인도 고립에서 한발 더 나아가 물리면 감염되는 역동적 고립으로 뒤바꿔 놓는다. 무인도에 고립된 사람들 모두를 사망시켜 버린 뒤 비로소 사건이 시작되는 시라이 도모유키의 그리고 아무도 죽지 않았다는 아가사 크리스티의 클로즈드 서클 대표작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의 전원 사망 클리셰를 역으로 차용한다.

<그림2>아가사 크리스티의 《오리엔트 특급 살인》과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수많은 클로즈드 서클 중 가히 추리소설의 캐빈 인 더 우즈라 부를 정도로 기존 클리셰를 철저하게 전복하는 작품이 있다. 바로 인기 TV추리 프로그램에 참석한 패널들이 클로즈드 서클의 저택에서 벌어지는 불가능 살인사건의 트릭을 맞추는 후카미 레이이치로의 미스터리 아레나이다. 폭우로 오도 가도 못하는 저택에 갇힌 사람들과 연쇄살인마. 범인을 맞추기 위해 벌이는 패 널들의 가설 배틀은 이제껏 보아온 거의 모든 클로즈드 서클의 공식이자 클리셰를 무차별적으로 조롱한다. 마니아일수록 느끼게 되는 곤혹감은 어느새 기묘한 쾌감으로 변모시킨다. 기존 클리셰를 조롱하는 발칙함으로 과감히 승부수를 띄운 셈이다.


스릴러 소설의 클리셰 사용법과 의미

경찰 소설과 스릴러에도 어렵지 않게 클리셰를 찾을 수 있다. 영미권 경찰 소설 속 주인공들은 모두가 결혼에 실패했고 알코올 중독자로 묘사된다. 대표적으로 요네스 뵈(일단 노르딕 스릴러도 영미권이라 쳐주자.)의 그 유명한 해리 홀레를 떠올 린다면 쉽게 이해될 것이다. 영미권 심리 스릴러의 여주인공들은 하나같이 독한 신경안정제에 취해 곤경에 빠지는 설정이다. 결국 결정적 범죄 장면을 목격하고 신고하지만 환각으로 치부되거나 본인조차 자신의 기억을 믿지 못하는 바보 같은 상황이 연출된다. 납치범에게 납치된 여주인공은 최소한 한 번 이상의 탈출 기회를 얻지만 공격을 가해 쓰러진 납치범에게 마지막 일격을 가하지 않아 다시 붙잡히는 어이없는 실수 장면 역시 어김없이 등장한다.

이제까지 추리소설의 하위 장르 속 클리셰들을 살펴보았다. 추리 소설의 클리셰는 여타 매체의 클리셰와는 조금 달리 생각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비록 반복되는 식상한 설정일지 모르나 이 같은 클리셰의 공식이 빠져버린 추리소설은 독자의 긴장감을 유지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허를 찌르는 반전의 묘미 또한 감소시킨다. 우리는 칼날을 걷는 듯 위태로운 여주인공, 완벽해 보이지만 내면의 상처를 가진 탐정을 통해 인간적인 연민을 느끼고 손쉽게 캐릭터에 감정 이입한다. 그렇게 차근차근 쌓아올린 클리셰의 조각들 사이에 숨겨진 작은 단서와 복선으로 예상했던 결말을 전복하는 반전의 묘미를 만끽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피할 수 없다면 비틀어라. 좋은 추리소설은 익숙함(클리셰)으로 독자를 유인한 뒤 낯선 반전으로 뒤통수를 갈겨야 한다. 무수히 쏟아져 나오는 추리 소설 사이에서 독자의 기억 속에 각인되기 위한 방법을 찾아 해매는 창작자의 고뇌는 오늘도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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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정기

추리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