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연에서 괴물로
〈경계인〉과 〈지옥〉에서의 괴물성
미스터리 장르(혹은 기능)(여기서 미스터리를 반복해서 장르 혹은 기능이라 부르는 이유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행하는 ‘미스터리’라는 발화와 장르로서의 ‘미스터리’는 구별 지어질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본문은 양자 모두를 포용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으므로 혼선이 없도록 장르과 기능으로 동시표기 하였다. - 필자 주)는 근본적으로 괴물을 포함한다. 이때에 괴물이란 괴물적 형상과 괴물적 내면 혹은 괴물적 사건 모두를 지칭한다. 그것이 유형의 것이든 아니든, 이 지독한 존재는 언제나 플롯 상의 비어있는 심연에 숨어있다. 심연을 통해 드러나는 혐오스러운 장면이 바로 괴물의 실체(이거나 그 원천이)다. 때문에 미스터리의 매혹이란 결국 괴물을 향한 매혹일 수 밖에 없다.
프랑코 모레티는 《공포의 변증법》에서 메리 셜리의 《프랑켄슈타인》과 브램 스토커의 《드라큘라》를 통해 괴물의 실체에 대해 논증한다. 그는 셜리의 괴물이 마르크스주의를 경유한 프롤레탈리안의, 스토커의 흡혈귀는 프로이트를 경유한 억압된 성적 욕망의 메타포임을 밝힌다. 모레티에 의하면 괴물들은 곧 현실의 은폐된 욕망이며 징후다. 따라서 괴물, 그리고 심연이 불안과 매혹을 동시에 유발시키는 이유는 그들이 우리 시대에는 허용되지 않았거나 혹은 은폐된 욕망의 표징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괴물의 퇴치라는 결과로 마무리되는 것은 훈육의 욕망과 연결된다. 괴물은 시대가 금지하려는 매혹적 욕망과 은폐하려는 불안을 동시에 상기시키는 불쾌한 존재다. 이 존재에 대한 퇴치 작용은 사회의 안정시킴과 동시에 지배 이데올로기의 은폐 작용을 연장한다. 결국 미스터리의 비어있는 심연과 그 해결은 시대의 욕망과 연결되어 있다. 그렇기에 한번 자문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지금 어떤 괴물을 설정하고 있는가?
〈경계인〉 괴물의 징후로부터
2022년 1월부터 8월까지 카카오 페이지에 연재된 〈경계인〉은 의문의 죽음을 겪고 영혼이 된 주현이 스스로 죽음의 경위를 역추격해간다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사건을 플롯 상의 공백으로 설정한 뒤, ‘누가’ 그러한 일을 벌였는가를 쫓는 ‘후던잇(Whodunit)’ 미스터리라 할 수 있다.
〈경계인〉의 흥미로운 지점은 저승의 시점에서 이승의 공백을 추격한다는 설정이다. 이 때에 심연의 위치를 초자연 세계가 아닌 현실에 놓았다는 점에서 일견 독특한 위치를 점한다고 할 수 있다. 앞서 설명했듯 플롯의 심연은 곧 세계가 품고 있는 불안한 괴물과 등치된다. 우리의 통상적인 인식에서 괴물은 초자연적인 존재로 상정된다. 우리에게 있어 괴물은 인간보다는 유령과 흡혈귀로 표상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본작에선, 그러한 초자연적 존재들이 현실의 심연을 추격하고 최종적으로 범인(=괴물)이 살아있는 인간임을 밝힌다. 우리의 기초적인 사고틀에서 괴물과 비괴물의 위치가 뒤바뀌게 된 셈이다.
때문에 본작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은 바로 타이틀인 ‘경계인’이 된다. 경계인은 이원화된 세계에서 양자 모두에게 속하지 못하는 존재들을 뜻한다. 작중에서는 주현의 죽음을 함께 쫓는 흡혈귀 성민으로 대표된다. 흡혈귀인 그는 인간들에게도 섞여들 수 없고 저승의 존재도 되지 못한다.
하지만 작품이 진행되며 이승과 저승뿐만 아니라 세계의 다종적 구분에 의한 경계성이 제시되며 ‘경계인’의 범주는 넓어진다. 특히 생전의 주현은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는 특성으로 사회에 쉽사리 녹아들지 못하는 ‘특이한’ 존재로 규정된다. 그는 사회의 내외부에 일정량 걸쳐있는 존재라는 면에서 경계인이다. 그리고 마지막, 주현을 죽인 살해범이며 트랜스우먼인 동혁 역시 이 작품이 범주하는 경계인에 포함된다.
미스터리는 플롯의 심연으로부터 사회의 심연으로 나아가 그 내부에서 괴물을 찾는 장르이자 기능이다. 그렇기에 〈경계인〉이 설정하는 ‘경계인’은 일종의 괴물의 전조 증상이며, 이를 통해 괴물적 존재에 대한 재규정을 목표하고 있다. 말하자면 진짜 괴물을 만드는 것은 그들이 가진 경계성인가, 아니면 또 다른 작용인가를 질문하고 있는 셈이다.
이 때에 동혁의 성정체성은 눈에 띄는 성질이 된다. 그가 트랜스우먼이라는 설정은 작중에서 주요한 참고인으로 거론되는, 성별이 다른 두 인물이 실제로는 하나였다는 반전의 요소로 사용된다. 그런면에서 이는 철저하게 장르적 이용이다. 하지만 본작이 규정하는 ‘괴물’의 조건과 규합한다면 어딘가 미심쩍어지는 구석이 있다.
〈경계인〉에서 괴물이 된 자와 그렇지 않은 자의 차이는 어디에 있는가? 성민은 과거에 흡혈귀인 자신을 거두어준 부모를 통해 인간 사회와의 호흡이 가능해 졌으며, 주현 역시 가족의 올바른 교육과 통제를 통해 사회적인 활동이 가능해졌다. 오직 동혁만이 이러한 전제조건을 클리어하지 못했다는 점은 매우 커다란 핵심이다. 그는 혈육임을 부정하는 모친으로부터 커다란 학대를 받는 동시에 주현이 소유한 ‘정상가족’의 진짜 주인이 자신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경계인〉은 매우 정확하게 한 지점을 짚는다. 그것은 ‘가족의 사랑’이라는 기재가 괴물화를 막는 처방이라는 설득이다.
▲<그림1>〈경계인〉 Ⓒ 쬬민, 누텔라, 렌카
이러한 의도와 동혁의 성정체성은 완전히 분리되지 못한다. 가족 정상성은 젠더 정치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정상가족 신화는 출산과 보육이라는 재생산 문제와 맞물려 있다는 점에서 철저히 지배 이데올로기 종속적인 개념이다. 언뜻 작 중에서 분리되어 있는 것 같은 문제들이 동혁이라는 인물을 경유해 하나로 연결될 때, 이는 무시할 수 없는 신호가 된다. 〈경계인〉은 경계의 인간에 대해 이야기하는 작품이지만 지정된 조건에서는 그들을 괴물의 영역으로 밀어낸다. 어떤 면에서는 ‘경계로부터 이쪽으로’ 돌아오길 희망하는 강한 촉구의 감각을 느끼게 한다.
〈지옥〉 본질적 괴물들까지
연상호, 최규석 콤비의 〈지옥〉에 있어 플롯의 심연은 현실의 바깥에 있다. 일단
〈지옥〉의 표면적 괴물은 사람들에게 죽음의 고지를 가져다주는 천사와 죽음을 실행하는 저승사자들이다. 하지만 이러한 초자연적 현상의 원인은 결코 작중에서 밝혀지지 않는다. 앞서 말했듯 미스터리란 이러한 플롯의 비어있는 공간 내부를 확인하기를 바라는 심연의 매료를 통해 작동한다. 하지만 〈지옥〉은 이 심연을 설정해 놓기만 할 뿐, 내부에 무엇이 존재하는지 드러내려 하지 않는다. 때문에 〈지옥〉이라는 작품의 근원인 초자연적 현상은 결코 구체성을 띄지 못한다. 인간의 관점에서 이들은 하나의 법칙이 되지 못하는 그저 무작위적인 현상에 불과하다. 〈지옥〉이 공포를 다루는 작품이라면 아마도 이러한 설정 자체가 이유가 될 것이다. 칸트가 《판단력 비판》에서 말했듯, 합목적성을 발견하지 못하는 위력적 존재는 그저 공포의 대상이 될 뿐이니 말이다.
연상호는 바로 그 지점, 거대한 자연적 공포와 마주한 인간 군상을 그리려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칸트는 또한 “이를테면 우리가 대상을 판정하되, 그 대상에 저항하고자 함에도 모든 저항이 완전히 허사가 될 것이라는 경우를 생각해본다면, 공포를 느끼지 않으면서도 공포를 주는 대상이라고 간주할 수 있다.
그래서 유덕한 사람은 신을 두려워하지만 신 앞에서 공포에 떨지 않는다.”(주석 - 임마누엘 칸트(2005), 《판단력 비판》, 김상현 역, 책세상)고 저술하는데, 이는 〈지옥〉에서 재현되는 군상들의 행위 일체와 그대로 비견될 수 있다. 말하자면 〈지옥〉의 내부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움직임은 모두 고지와 시연이라는 공포의 대상을 ‘공포스럽지 않은’ 방식으로 받아들이려는 집단적 몸부림에 가깝다. 이것이 하나의 종교적 형태로 표출된다는 점에서 연상호의 전작들 〈사이비〉, 〈부산행〉 등을 떠오르게 만든다.
또한 연상호의 세계에는 언제나 표면적 괴물성과는 다른 또 하나의 심연이 있다. 연상호의 작품군이 가진 중요한 특징이란, 집단을 이룬 인간들을 대체로 공포에 쉽게 굴복한다는 점이다. 오히려 집단으로부터 유리되어 개인화된 존재들만이 공포에 정면으로 맞설 수 있다. 그런데 연상호는 언제나 공포에 대한 대중의 집단 굴복의 발생 메커니즘을 철저하게 연막한다. 개인화된 주동 인물들이 정신을 차리면 세계가 이미 공포에 굴복한 상황에 도달해버린 이후인 것이다. 이 때에 주동 인물의 시 각으로 작품의 세계를 지켜보는 우리들에게 있어, 대중의 굴복 역시 하나의 심연으로 작동한다.
연상호가 발생시키는 이중의 심연이 작동하는 방식은 매우 독특하다. 공포의 근원인 심연은 매혹을 낳지만, 굴복의 심연은 오직 불쾌함만 을 발생시키기 때문이다. 심연이 가지는 두 가지 작동 양태가 둘로 완전히 분리되어 버린 셈이다. 이때에 근원의 심연이란 그 본질을 추적할 수 없는 대상이라는 사실이 명확해지며, 이내 자연화해버린다. 덕분에 작중에는 불쾌함을 가진 굴복의 심연만이 오롯이 작동하게 된다.
▲<그림2>〈지옥〉 Ⓒ 최규석, 연상호
그래서 연상호의 세계에서의 괴물은 어느 순간 재설정된다. 〈지옥〉의 물질화된 괴물들(천사와 저승사자)은 자연적 현상이라고 규정되어 괴물성을 상실한다. 그리고 남는 괴물은 오직 공포에 굴복한 집단화한 인간들뿐이다. 연상호의 세계 설정은 기본적으로 이러한 사실을 고발하기 위해 형성되어 있다. 연상호에 게 있어 괴물은 우리와 다른 물리적 대상이 아니라 공포에 굴복하는 우리 그 자체인 것이다.
그런데 〈지옥〉(하나를 더 거론하자면 〈부산행〉)에는 어쩐지 앞서 말한 〈경계인〉을 연상시키는 지점이 있다. 〈지옥〉은 시즌 2의 말미에 가서 이러한 괴물성을 어떻게 돌파할 것인지를 진지하게 묻고 답한다. 이때에 연상호의 답은 정확한 하나의 이미지, 바로 희생의 이미지다. 집요한 저승사자의 공격에 대해 타인이 방패가 되어 스스로 막아주는 것. 이때 연상호는 여기에 숭고한 가족의 이미지 를 이용한다. 과연 누가 타인을 위해 죽겠는가? 연상호는 답한다. 그것은 오직 가족만이 가능하다.
▲<그림3>〈지옥〉 Ⓒ 최규석, 연상호
다시금 괴물로부터
〈경계인〉은 경계성으로서 괴물의 전조 증상을 말한다. 하지만 〈지옥〉은 괴물성은 우리 모두에게 내제된 본질적 특성이라 말한다. 두 작품은 각기 다른 방향에서 괴물의 탄생에 대해 말하려고 든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 둘은 같은 지점에 도달한다. 괴물의 탄생이라는 현상의 반대편에 있는 것은 항상 ‘가족의 사랑’이라는 것이다.
로빈우드는 가드 호로비츠의 저서 《억압(Repression)》으로부터 기본 억압 (basic repression)과 과잉 억압(surplus repression)이라는 개념을 공포 장르로 끌고 들어온다. 기본 억압은 모든 문명에 있어 필수적으로 작동하는 보편적 억압을, 과잉 억압은 개별적 문화가 스스로의 안정성을 유지하기 위해 선별 작동시키는 억압을 말한다. 그는 매체에서 표현되거나 혹은 규정되는 괴물은 과잉 억압의 산물이라는 주장을 펼친다. 우드의 주장은 모레티와 흡사하다. 괴물의 선정과 퇴치라는 작동은 지배 이데올로기를 통한 훈육 효과를 목적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도리어 괴물들이 아니라 그 괴물들을 설정한 사회적 존재들에 게 질문을 던지고 싶다. 어째서 여러분은 그러한 규범을 우리에게 알리려고 하는 것입니까? 그리고 어째서 괴물이라는 대상이 그렇게 설정된 것입니까? 그래서 때로는, 도리어 괴물의 관점에서 그러니까 심연의 위치에서 작품을 다시 보고 싶어질 때가 있다. 그렇게 나와 눈이 마주치는 존재 역시 괴물의 심연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렇게 확인하고 싶어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