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만화(디지털)

초기화
글자확대
글자축소

시엔 BIS, 키쿠이시 모리오의 〈변경의 노기사 발드 로엔〉: 겨울 여행, 긴 겨울밤을 책임져 줄 식도락 기사의 이야기

<지금, 만화> 17호 '이럴 땐 이런 만화 l 겨울여행을 떠나고 싶을 때 가져가고 싶은 만화'에 실린 글입니다. <변경의 노기사 발드 로엔>/글 시엔 BIS, 그림 키쿠이시 모리오

2023-07-17 김경훈

겨울 여행, 긴 겨울밤을 책임져 줄 식도락 기사의 이야기

시엔 BIS, 키쿠이시 모리오의 〈변경의 노기사 발드 로엔〉


겨울의 밤은 길다. 그것은 여행 중이라도 크게 다르지 않다. 때문에 겨울 여행의 절반은 숙소에서 맞이하는 밤이 될 수밖에 없다. 필자가 겨울 여행에서 숙소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겨울 여행에서 맞이하는 밤의 편안함이 여행의 만족감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다만 안락한 숙소를 찾았음에도 계속되는 고민이 있다. 바로 이 긴 겨울밤을 과연 어떻게 보낼 것인가 하는 고민이다. 낮 동안 꽁꽁 얼었던 몸을 녹여주는 포근한 침구의 감사함도 잠시뿐이다. , 아직도 많이 남은 이 밤을 어떻게 보낼지 고민하게 되는 것은 비단 필자뿐만은 아닐 것이다. 만약 이 글을 읽는 독자분이 성인이라면 가볍게 술을 한잔할지도 모르겠다. 여행지에서 마시는 술은 나름대로의 정취를 가진다. 하지만 지나친 음주는 건강에도 좋지 않음은 물론, 다음날의 일정을 생각하면 절대 과음할 수는 없다.

만약 성인이 아니라면 선택지는 더욱 좁아진다. 큰마음을 먹고 떠난 여행에서 여전히 스마트폰만을 볼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이것은 더 이상 겨울 여행이 아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겨울 여행이란 만족스럽게 보낸 숙소에서의 밤이 있어야만 비로소 완전해진다. 스마트폰이나 티비를 본다는 것은 낮 동안 마주했던 겨울 여행의 풍광, 그리고 그 안에서 마주하게 된 내면의 감정들을 무위로 돌려 버리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러한 측면에서 변경의 노기사 발드로엔은 겨울 여행에서 맞이하게 되는 긴 밤을 만족스럽게 완성시켜줄 수 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림1> 〈변경의 노기사 발드 로엔〉 Ⓒ 시엔 BIS, 키쿠이시 모리오


이 여행에 목적지는 없다. 여행 끝에서 죽기 위한 여정인 것이다.”라는 작품의 첫 대사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작품은 여행, 그리고 삶의 반추라는 테마를 가진 작품이다.

작품은 인민의 기사라고 불리며 평생을 인민을 위해 봉사한 노기사의 은퇴 이후를 다룬다. 이러한 소개만을 본다면 매우 쓸쓸할 작품으로 생각될 수도 있다. 삶의 끝 지점에서 자신의 삶을 반추하는 여행이란 의례 그런 이미지를 가지기 떄문이다. 물론 이러한 쓸쓸한 정취가 겨울밤 이루어지는 독서에는 제법 어울리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작품은 발드로엔의 여정이 끝을 위한 여정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임을, 쓸쓸함보다는 여행이 전해주는 설렘에 주목한다.

이 작품은 여행이 주 테마이지만 큰 이야기 줄거리와는 별개로 여행의 설렘을 독특한 방식으로 전달한다. 작중 발드로엔의 식도락이 바로 그것이다. 발드로엔이 도착하는 도시, 혹은 새로운 인물들과의 만남에는 항상 음식이 등장한다. 이 음식들은 지역의 특산물이거나, 혹은 그 사람만의 독특한 레시피로 만들어진 음식들이다. 발드로엔이 새로운 음식을 만날 때마다 묘사되는 맛 평가는 여느 요리만화에 뒤지지 않는 것이 이 작품의 독특한 지점이다.

<그림2〈변경의 노기사 발드 로엔〉 Ⓒ 시엔 BIS, 키쿠이시 모리오


작중 필자에게 가장 인상 깊었던 음식은 바로 위직이라는 생선에 대한 것인데, 민물생선이라는 점, 기름기가 많다는 점에서 연어를 연상시키는 이 생선에 대한 묘사는 책을 덮은 뒤 자연스럽게 연어구이를 찾게 만들 정도였다. 아마 이 글을 읽는 독자분들 역시 발드로엔의 식도락을 보고 있노라면 낮 동안 미처 먹지 못했던 여행지의 음식이 자연스럽게 떠오를 것이다. 물론 발드로엔이 여행을 떠나면서 겪는 모험담 역시 이 식도락에 대한 묘사만큼이나 흥미로운 것은 당연하다.

겨울 여행의 밤은 길다. 이는 다시 말해 여행 동안 풍경을 마주할 수 있는 시간이 짧다는 말이기도 하다. 비록 낮의 여행은 끝이 났지만 숙소에서 지내는 밤에도 우리는 여행이 계속되길 바란다. 일상에서 벗어나 떠나온 여행의 지속을 바라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겨울은 우리에게 그렇게 친절하기만 한 계절은 아님을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변경의 노기사 발드로엔은 발드로엔의 여정을 통해 겨울 여행지의 밤과 여행이 계속되길 바라는 우리의 바람을 훌륭하게 충족시켜 출 수 있는 작품일 것이다.


필진이미지

김경훈

만화평론가
2020 만화·웹툰 평론 공모전 신인부문 우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