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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복의 〈와인의 세계, 세계의 와인〉: 와인에는 정답이 없다

<지금, 만화> 17호 '만화 속 인생 l 명대사 명장면'에 실린 글입니다. <와인의 세계, 세계의 와인>/글, 그림 이원복

2023-07-21 이봉호

와인에는 정답이 없다

이원복의 〈와인의 세계, 세계의 와인〉


와인 시장도 유럽의 문화 우월 주의가 지배하고 있었던 거야.”

지인한테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었다. 모 재벌가에서 한국어나 영어가 아닌 프랑스어로 대화를 나눈다는 내용이었다. 대화의 품격을 유지하려고 유럽 귀족의 삶을 흉내낸다는 의미였다. 여기에 와인을 추가해 보자. 20세기까지만 해도 한국에서 와인이란 상류층이 향유하는 일종의 문화 소비재였다. 이제 와인은 동네 마트나 편의점에서 부담 없이 마실 수 있는 국민술이 되었다. 이런 현상은 여타 국가에서도 프랑스 와인이 득세하던 1970년대 중반까지 줄곧 이어진 현상이었다. 그렇다면 1970년대 중반에는 어떤 사건이 있었을까. 1976, 미국 독립선언 200주년을 기념해 파리에서 프랑스와 미국 와인을 비교하는 블라인드 시음회가 열린다. 결과부터 소개하면 최고의 레드 와인과 화이트 와인 모두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생산한 와인이었다. 이를 계기로 프랑스 와인에 대한 신화가 조금씩 무너지기 시작한다.

<그림1> 〈와인의 세계, 세계의 와인〉 Ⓒ 이원복



비단결 같고 향기로우며 섬세하고 완벽한 맛과 향으로 와인의 왕으로 불리지.”

와인 열풍이 대단했던 시절이 떠오른다. 각종 와인 동호회가 생기고, 손님이 주문한 요리와 어울리는 와인을 추천해주는 소믈리에라는 직업이 알려지기 시작한 시절 말이다. 필자 역시 10년 전까지만 해도 와알못이었다. 어쩌다 마트에서 1만 원대에 구입한 모스카토 다스티의 달달함을 즐기는 정도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드라이한 레드 와인의 매력을 알게 되었고, 마음에 드는 테이블 와인을 박스로 구입해보기도 했다. 위에 소개한 와인은 로마네 콩티다. 수백만 원에서 수천만 원을 호가하는 로마네 콩티를 마셔보지는 못했다. 상상만 해도 현기증이 나는 프랑스산 명품 와인을 마실 기회가 있을까. 지금으로서는 이 와인을 직접 구경한 정도로 만족하는 수밖에 없다. 언젠가는 시음의 기회가 올지도 모를 일이다. 때론 원하는 순간을 기다리는 과정이 삶에 의미와 가치를 선사해주기도 한다.

 

“19세기부터 키안티는 레드 와인, 특히 토스카나 레드 와인을 상징하는 말이 되었어.”

작년에 집에 방문한 지인에게서 소중한 선물을 받았다. 토스카나에서 생산한 2012년 산 테스타마타(Testamatta)가 선물의 정체였다. 필자가 마셔 본 최고의 와인이었다. 당시의 느낌을 표현하자면 와인 속에 또 다른 와인이 숨어 있는, 그야말로 특별한 경험이었다. 게다가 와인 라벨에는 운영자가 직접 그린 아름다운 작품이 시야를 어지럽힌다. 그는 붓질을 하면서 자신이 만들어낸 와인의 세계를 마음껏 상상했을 것이다. 20만 원에 육박하는 이 와인을 다시 구입하기엔 부담이 적지 않아서 당시의 추억만을 간직하고 있다. 대신 5만 원 이하의 토스카나 와인을 즐기는 중이다. 프랑스에 비해 가치가 떨어진다는 이미지가 강했던 이탈리아 와인이지만 각고의 노력 끝에 이젠 당당히 세계의 와인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존재로 우뚝 섰다. 특히 키안티 지역은 대부분이 부드러운 구릉지로 포도 재배에 이상적인 환경이다 보니 이탈리아 전역에 가짜가 범람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그림2〈와인의 세계, 세계의 와인〉 Ⓒ 이원복


복잡하고 어려운 유럽 와인 라벨에 비해 알아보기 쉽도록 와인 품종을 명기하는 방법 을 택했어.”

역사와 전통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 서유럽은 와인에 있어서도 비슷한 특징을 보인다. 와인 라벨이 대표적인 예인데 원료인 포도 품종을 내세우지 않는 표기법이 와인 초보자에게 혼란을 가중시킨다. 어떤 분야이든지 후발 주자는 선두 주자의 장단점에 익숙한 법이다. 미국, 칠레, 호주로 대표되는 신대륙 와인은 이러한 유럽 와인의 빈틈을 파고든다. 소비자가 알아보기 쉽도록 와인 품종을 라벨 중심부에 부착한 것이다. 여기에 프랑스식 와인 제조기술을 도입하여 유럽 와인에 크게 뒤떨어지지 않는 경쟁력을 갖추기 시작한다. 영화 와인 미라클은 신대륙 와인의 세계를 흥미진진하게 묘사해 준다. 일명 파리의 심판이라 불리는 1976년 와인 시음회 사건을 자세하게 다루고 있으니 와인 애호가에게는 꼭 봐야 할 영화가 아닌가 싶다. 누군가가 미국 와인을 돌직구에 비교한 적이 있다. 그래서인지 요즘도 미국 와인에는 좀처럼 손이 가질 않는다.

 

칠레 와인의 가장 큰 매력은 무엇일까?”

먼나라 이웃나라시리즈로 유명한 이원복 화가. 그는 세계사 못지않게 와인에 대한 사랑이 대단한 작가다. 소개하는 와인의 세계, 세계의 와인에는 로마네 콩티 생산지역에서 기념사진을 촬영한 저자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는 칠레 와인의 경쟁력을 가성비에서 찾는다. 콧대 높은 프랑스산보다 저렴한 칠레 와인의 특징이 한국에서도 나타난다. 소위 국민 와인이라 불리는 몬테스 알파는 동네 대형마트에 가면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저가 칠레 와인의 경우, 유통이나 보관이 유럽 와인에 비해 허술하다는 소문이 있다. 하지만 이런 경우는 상당수의 저가 와인이 겪어야 하는 통과의례라고 여기는 와인 전문가도 있다. 이런 선입견을 차지하더라도 가성비가 나쁘지 않은 칠레 와인은 와인 초보자에게 부담없이 다가갈 수 있다. 스페인 와인 역시 프랑스 와인에 비해 가성비가 괜찮은 와인으로 통한다.

<그림3〈와인의 세계, 세계의 와인〉 Ⓒ 이원복


와인에는 정답이 없다. 내 스타일이 바로 정답!”

아로마, 프루티, 시트러스, 피니시, 스파이시, 우디, 디켄팅. 초보자 입장에 서는 단어만 봐도 와인의 세계로 진입하기가 부담스러울 정도다. 하지만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조금씩 와인의 매력에 빠져보는 것은 어떨까. 사실 모든 종류의 술은 자신의 스타일이 우선이다. 아무리 비싼 술이라도 자신의 취향을 만족시켜주지 못한다면 돈낭비에 불과하다. 누군가에게 자랑하기 위해 마시는 술이 아니라면 자신의 스타일이 무엇인지를 먼저 파악해야 한다. 이를 게을리하면 광고나 입소문에 속아 그저 그런 와인만을 접하기 때문이다. 어떤 삶이든 자신이 원하는 무엇을 파악하는 일은 쉽지 않다. 그러기에 는 너무나 많은 유혹과 자극이 현대인을 포위하고 있다. 와인 역시 마찬가지다. 와인에 대한 근거 없는 원칙들은 자신을 중심으로 재구성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만 세상의 많고 많은 와인의 세계를 여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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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봉호

대중문화평론가, 칼럼니스트, 작가
『음악을 읽다』, 『취향의 발견』, 『독서인간의 서재』, 『음란한 인문학』, 『나쁜 생각』, 『광화문역에는 좀비가 산다』, 『나는 독신이다』, 『제9요일』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