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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친밀한 시각적 연금술, 그래픽 전기
- 〈비비안 마이어-거울의 표면에서〉와 〈아나이스 닌-거짓의 바다에서〉를 중심으로
홀로코스트 당시 가족의 시련을 다룬 아트 슈피겔만의 〈쥐〉나 이란에서의 유년 시절 회고록인 마르잔 사트라피의 〈페르세폴리스〉처럼 만화를 활용해 인생 이야기를 전달하는 것은 이미 하나의 장르로 확립된 예술이라 할 수 있다. 지난 세기말부터 다큐멘터리 만화의 영향으로 회고록 형식의 만화 역시 꾸준히 발전해 왔고, 특히 최근 몇 년 동안 전기 형식의 만화의 인기가 높아지고 있다. 대 중은 언제나 영감을 주거나 주목할 만한 인물을 찾고 있으며, 수백 페이지에 달하는 전기에 비해 만화는 이러한 인물들의 삶에 더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것처럼 여겨진다. 그래픽 전기 또는 그래픽 회고록이라고도 하는 전기 만화는 역사, 정치, 예술, 과학 또는 엔터테인먼트 분야의 유명 인물 등 실제 인물의 삶과 경험을 묘사하는 데 중점을 둔 만화책의 한 장르다. 그래픽 전기는 전기적 스토리텔링과 시각 예술의 요소를 결합하여 주제의 삶에 대한 시각적 내러티브를 제시하지만, 몇몇 냉소적인 사람들에게 그래픽 전기는 ‘만화로 된’ 위인전을 읽는 것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과연 그래픽 전기를 그저 위인전의 ‘축약판’이라 고 할 수 있을까?
전혀 그렇지 않다. 그래픽 전기는 그간의 슈퍼히어로 서사에서 벗어난 세련된 변화의 일환이다. 간결하고 접근하기 쉬우며 심지어 경쾌하기까지 하지만 인물에 대한 연구의 무게가 부족한 경우는 드물다. 오히려 20페이지 분량의 텍스트가 필요한 장면 설정을 몇 페이지의 아트워크로 완성할 수 있고, 한 장의 스플래시 페이지로 특정 시간의 특정 장소의 광경, 소리, 냄새를 떠올리게 하는 그래픽 전기는 한 사람의 삶을 인간적으로 조명하는 독창적인 휴먼 코미디의 비전을 제시한다. 그래픽 전기의 대중적 인기에 힘입어 그간 주목 받지 못했던 인물들이 만화로 재조명되고 있는 것 역시 긍정적인 문화 현상이라 할 수 있다.
퍼즐을 맞추는 재미 - 〈비비안 마이어-거울의 표면에서〉
〈비비안 마이어-거울의 표면에서〉는 비비안 마이어의 사진을 바탕으로 재구성된 그래픽노블이다.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린 파울리나 스푸체스는 마이어의 사진 중 비교적 잘 알려진 스무 장의 사진을 고른 뒤 가상의 이야기를 덧붙여서 그림으로 표현했다. 전기를 쓴다는(그린다는) 것은, 한 사람에 대한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것과도 같다. 역사가나 연구자와 달리 그래픽 아티스트는 실제 인물에 대한 주관적인 해석과 창의적인 결정을 내릴 수 있고, 이는 독자들에게 새로운 해석의 여지를 제공한다. 이 과정에서 시각적 요소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인물에 대한 스토리는 일러스트레이션, 패널 레이아웃, 말풍선, 캡션의 조합을 통해 전달되는데, 그래픽 전기 속 아트워크는 대상 인물의 삶과 환경에 생동감을 불어넣어 독자가 이야기에 몰입할 수 있도록 돕는다.
▲ 〈비비안 마이어-거울의 표면에서〉 ⓒ 파울리나 스푸체스
그래픽 전기는 종종 주인공과 가까운 지인의 관점을 채택하여 주인공의 생각, 감정, 동기에 대한 개인적인 통찰력을 제공한다. 그리고 이러한 주관적인 관점은 주제의 성격과 경험에 대한 더 깊은 이해를 제시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비비안 마이어’라는 이름은 흑백의 이미지로 각인되어 있지만, 스푸체스는 구아슈와 수채 물감을 사용하여 야수파를 연상시키는 대담한 색의 팔레트를 펼쳐 보인다. 마이어의 실제 삶과 작품 속의 가상 세계를 교차시키는 과감한 연출을 통해, 자신만의 해석으로 마이어의 흑백 사진에 대한 경의를 표하는 이 젊은 작가는 디테일에 대한 감각, 경쾌하고 밝은 색감과 둥글고 부드러운 선을 통해 거칠고 무딘 연극처럼 여겨지던 마이어의 삶을 부드럽게 풀어낸다.
▲ 〈비비안 마이어-거울의 표면에서〉 ⓒ 파울리나 스푸체스
콤팩트한 형식이라고 해서 연구가 필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래픽 전기 작가들은 기 출판된 전기는 물론 일기와 서신, 신문 기사 등 광범위한 자료를 참조한다. 그래야 독창적인 재창조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흩어진 퍼즐 조각들 마 냥 여러 개의 서사를 켜켜이 펼쳐놓은 장면들을 보면, 일반적으로 알려진 비비안 마이어가 아닌 ‘나의’ 비비안을 창조하기 위해 스푸체스에게 얼마나 많은 연구와 고민이 필요했는지를 가늠할 알 수 있다. 소설과 전기 사이의 여러 층위로 읽어낼 수 있는 작품이지만, 비비안 마이어의 삶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과거와 현재, 현실과 소설 사이를 오가는 여정을 따라가기가 다소 벅찰지도 모르겠다. 일부 대화는 리듬이 끊기고 부자연스러우며, 약간 흐트러진 것처럼 보인다. 어떤 구절은 그늘지고, 복잡하며, 신비로운 마이어의 인생 마냥, (지나칠 정도로) 수수께끼처럼 다가오기도 한다. 하지만 스푸체스는 흩어진 퍼즐 조각을 맞추지 않고 그저 한데 모으거나, 혹은 다시 흩트려 버림으로써 마이어의 예술 세계를 더욱 직관적으로 비춘다.
색의 파편과 판타지 - 〈아나이스 닌-거짓의 바다에서〉
〈비비안 마이어-거울의 표면에 서〉가 실제 예술가의 삶과 작품 사이를 오간다면, 〈아나이스 닌- 거짓의 바다에서〉는 예술가의 삶 과 환상의 경계를 유영한다. 주인 공의 인생에서 일어난 사건을 발생한 순서대로 제시하며 전 생애를 다루는 일반적인 전기와는 달 리, 이 작품은 주인공의 삶을 일련의 핵심 순간으로 요약한다. 만화책의 지면이 제한되어 있기때문에 그래픽 전기는 모든 세부 사 항을 다루기보다는 주인공의 인생에서 중요한 순간이나 기간에 초점을 맞추는 경우가 많다. 만화는 몇 페이지에 걸친 설명 없이도 예술과 텍스트의 결합을 통해 한 인물의 삶을 핵심적인 요소의 모음으로 요약할 수 있는데, 여러 차례 이사를 다니며 2개 대륙, 3개 언어 사이에서 성장한 아나이스의 유년 시절을 담은 장면들이 그 대표적인 예다.
▲ 〈아나이스 닌-거짓의 바다에서〉 ⓒ 레오니 비쇼프
8년에 걸쳐 완성된 이 그래픽 전기에서 레오니 비쇼프는 아나이스 닌을 자신감 넘치면서도 불안해하는, 공감할 만한 인간으로 묘사함으로써 다른 매체나 문학 작품이 효과적으로 해낼 수 없는 과업을 달성한다. 주제의 이야기를 형성하고 일관된 내러티브를 만드는 데 도움이 되는 중요한 사건과 경험을 통해 이루어진 빼어난 시각적 스토리텔링은 독자들의 본능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키고, 주인공의 심리적 여정에 대한 이해를 도모한다. 비쇼프는 파리 교외의 고급 저택에서 은행가의 아내로 고뇌에 찬 삶을 살던 아나이스의 고군분투를 집중적으로 조명하기 위해 1930년대라는 시대적 배경을 선택했지만 시대적 표현은 미묘하며, 색상은 최면에 걸린 듯한 느낌을 더한다. 자신의 자리를 찾기 위해 작가가 되고자 했던 아나이스에게 어린 시절부터 써오던 일기는 탈출구이자 덫이기도 한 이중적인 매개체다. 양차 대전 사이 파리에서 유행한 아르누보와 아르데코에서 영감을 얻은 비쇼프는 다양한 시각적 기법을 사용하여 주인공의 복잡한 감정을 탐구하고, 그녀의 내면에서 피어오르는 관능을 감지할 수 있게 해주는 내밀한 자아의 존재를 끊임없이 환기시킨다.
그래픽 전기에서 작가는 독특한 색상 팔레트와 패널 레이아웃을 사용하거나, 초현실적이고 추상적인 이미지를 통합하면서 등장인물의 내적 생각, 감정 또는 심리 상태를 전달한다. 비쇼프의 경우 여러 가지 색의 색연필을 사용해 색의 파편들을 무작위로 섞음으로써, 아나이스 캐릭터에 필요한 판타지와 예상치 못한 느낌을 연출하고, 특히 그녀의 글에서 나오는 감정과 관능을 포착하고자 했다. 이렇게 완성된 그래픽 전기는 캐릭터의 정신적 상태를 들여다볼 수 있는 창 을 제공하고, 독자는 대화나 내레이션으로 표현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캐릭터의 심리에 대한 통찰을 얻는다.
▲ 〈아나이스 닌-거짓의 바다에서〉 ⓒ 레오니 비쇼프
그래픽 전기 작업은 건조하고 지루한 위인전을 써내려 가는 것이 아니라, 주인공의 감정선을 따라가며 자신만의 길을 찾기 위한 그들의 투쟁을 보여주는 것이다. 20세기 가장 매혹적인 인물들을 다룬 두 작품에서, 작가는 엄격한 전기적 사실에서 벗어나 예술가의 감정에 더 집중하고, 객관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는 흑백 사진(비비안 마이어)이나 일기(아나이스 닌) 속 목소리에 동참한다. 이들 은 때때로 인물의 연대기나 특정 사건에 대한 접근 방법을 바꾸는 장난을 치기도 하는데, 작품에 유동성을 부여하는 이러한 연대기적 유희는 특정 인물을 도덕적이거나 병리적인 관점에 가두려고 했던 그간의 시선에 비해 훨씬 더 흥미로운 방식으로 인물의 삶에 생명을 불어넣고, 창작을 통한 또 다른 해방을 기념한다. 객관적인 해석과 분리됨으로써 인물에 더 가까이 다가가게 하는, 역설의 예술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