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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배기사〉 넷플릭스 시리즈의 배송 사고 - 만화 〈택배기사〉 vs 드라마 〈택배기사〉

<지금, 만화> 제18호(2023. 7. 5. 발행) 만화 VS 드라마 수록기사

2024-02-06 조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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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배기사넷플릭스 시리즈의 배송 사고

- 만화 택배기사vs 드라마 택배기사

  포스트 아포칼립스 장르는 세계관이 핵심이다. 아포칼립스적인 사건이, 그 이후의 세계상과 사회상이, 그리고 부족하고 결핍된 자원에 대한 사람들의 욕망 등이 세계관의 세부 요소다. 이 요소들이 잘 설정되었다면 절반은 잘된 이야기다. 나 머지 절반은 주요인 물들이 그 세계 속에서 살아남거나, 그 세계를 극복하는 등의 중심 서사를 잘 구축하는 것이다. 두 절반이 각 각 잘 만들어지기만 해도 괜찮은 포스트 아포칼립 스물이 탄생한다. 그리고 그 결합이 성공적이기까지 하면 그때는 10년 넘게 회자되는 작품이 된다. 하지만 두 절반이 다 아쉽고 결합도 느슨하다면?

▲ 〈택배기사〉 ⓒ 이윤균

▲▲ 드라마 택배기사포스터

  2023년 5월 발표된 넷플릭스 시리즈 택배기사가 그 예라 하겠다. 투믹스에서 연재되었던 완결 웹툰 택배기사(이윤균, 2016~2019) 를 원작으로 한 포스트 아포칼립스 드라마다. 편당 50분가량씩 6부작, 전체 시간 은 약 4시간 반 정도다. 원작 웹툰 택배기사는 원래 89화 구성이지만, 현재 네이버웹툰에서 재연재 중으로 2023년 63일 현재 36화까지 공개되었다. 재연재 전에 전부 감상하지 못한 탓에 웹툰 택배기사에 대한 논의는 36화까지의 내용을 바탕으로 한다.

포스트 아포칼립스의 절반: 세계관과 시대

  이후 추가로 밝혀지는 세계관 설정이 더 있는지는 모르지만, 웹툰 택배기사의 아포칼립스적 사건은 명시적으로 드러나지 않았다. 잦은 모래바람과 오염된 공기로 인해 사람들 대부분이 집에만 머무르고 택배기사가 자원을 노리는 헌터들을 피하거나 무찌르며 생필품을 배달한다는 세계상과 사회상이 초반부 장면을 통해 보여질 뿐이다. 반면 드라마는 혜성 충돌로 포스트 아포칼립스 세계가 도래했음을 택배기사 5-8의 목소리로 초입부터 읊조린다.

  “그날 이후 대부분의 대륙은 바다에 잠겼고 한반도는 사막으로 변했다. 생존자는 단 1퍼센트. 그들을 위해 새로운 발명과 질서가 필요했다. 오염된 공기는 옥시아늄을 산소로 변환시키는 거대한 에어 코어를 만들게 했고 부족한 자원은 QR코드를 통해 사람들을 일반, 특별, 코어로 분류해 나눠지게 했다. 하지만 선택받지 못한 사람들은 난민이라는 이름으로 비참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 〈택배기사〉 ⓒ 이윤균

  이런 상세한 세계관 풀이는 계속 이어져서 일부 난민들이 자원을 갈취하는 헌 터가 되었고, 택배기사는 헌터의 위협에서 산소 등의 생필품을 지켜내고 배달하는 존재라는 점을 설명한다. 여기에 QR코드(시민권) 없는 난민들이 되고 싶어하는 것이 택배기사라는 정보까지, 장장(!) 3분 가까운 시간을 세계관 설정을 전달하는 데 할애한다. 아포칼립스적 사건, 세계상, 사회상을 거의 모두 담았고 택배기사라는 존재와 난민들의 욕망까지, 상상할 틈도 없이 모두 설명해 버린다.

  새로운가 하면 그렇지도 않다. 폐허가 된 세계에서 무언가를 배달하는 인물의 이야기로 좁힌다면 중편소설 지옥의 질주(로저 젤라즈니, 1969)나 게임 데스 스트랜딩(코지마 프로덕션, 2019)이 떠오른다. 계급 분류, 자원 분배의 불평등 등 의 사회상은 설국열차, 매드맥스등에서 이미 익숙하다. 표절이라거나 베꼈다는 말은 아니다. 특별한 설정이 아닌데 그것을 설명적으로 배치하고 소화한다는 것이 아쉽다는 말이다. 극에 녹여내어 보여줄 때 그 구체성이 더 인지될 수 있는 설정을 요약된 내레이션 문장으로 미리 보여주는 것은 작품에 대한 기대감을 갉아먹는 일이다.

  내레이션 내용 중에는 덧없이 구체적인 지점도 있다. 드라마 속에서 혜성 충돌이라는 아포칼립스적 사건은 특별한 의미를 드러내지 않는다. 핵전쟁, 기후재앙, 과학의 부작용 등 어떤 사건이었다 해도 상관없을 설정이다.(필자 주 옥시아늄이 혜성 충돌 이후 지구상에 존재하기 시작한 특수 광물이었다면 의미가 있을 테지만, 드라마는 이 를 잘 설명하지 않는다) 내레이션으로 설정을 설명하기로 선택했으니 무엇이든 세계의 계기를 드러내야 했을 테지만, 꼭 혜성 충돌이었어야 했을까.

  〈매드 맥스설국열차처럼 선구적이고 잘 만들어진 포스트 아포칼립스 세계관을 떠올려 보자.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는 구체적으로 핵전쟁을 언급하지 않는다. 이 정보는 전작들과 외부 배포자료를 통해 전달된다. 그래서 더 보편적인 재난 상황으로 받아들일 수 있고 상상이 틈입할 여지가 있다. 영화 설국열차는 지구온난화에 대한 과학적 대응이 실패해 역으로 빙하기가 왔다는 설정이다. 1984년에 발표된 설국열차의 만화 원작은 이유가 다르다. 냉전 중 기후 무기를 잘못 사용한 결과, 빙하기가 닥친 것이다. 그 시대의 위기의식을 반영했다. 그런데 기후 위기의 시대에 기획된 드라마 택배기사는 이 시대와 거리가 먼 재앙을 굳이 초장부터 확고히 명시하고 시작한다. 현실과의 거리두기일까?

  그렇다고 보기에는 현실을 상기시키는 이후 장면이 문제적이다. 드라마 속 거대기업의 대표인 빌런 류석은 난민 인구수를 줄이기 위해 백신을 활용한다. 백신을 맞고 죽어가는 사람들. 그 속에서 한 조연은 이렇게 외친다. “백신 맞으면 죽어!” 빈약한 상상력이란 말도 부족하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드라마가 백신음모론을 상기시키는 장면을 보여준다는 것은 직무 유기이거나 의도적인 조롱인 것만 같다.

  웹툰 택배기사의 세계관을 드라마가 차용하며 구체화하거나 변경하는 일은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앞의 예들처럼 변경점이나 말하기 방식이 오히려 부정적인 효과를 낼 때다. 문제는 주요 인물에서도 비슷하게 드러난다.

나머지 절반: 주요 인물의 이야기

  인물 면에서 드라마는 원작 웹툰에 엄청나게 많은 변화를 가했다. 변화는 삭제와 수정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웹툰의 주요 조연들 및 관련 서브플롯의 삭제, 그리고 주요 인물들의 수정이다. 전자는 웹툰보다 이야기를 압축했어야 했을 드라마로서는 불가피한 선택이라 이해할 수 있다. 그래도 너무 많이 사라졌 다. 험상궂은 인상이지만 누 구보다 착한 아저씨 좀비’, 매 드 사이언티스트 포지션인 정 박사, 선도 악도 아닌 강자 검귀 등 비중 있는 많은 인물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렇게 확보한 분량은 중심인물들을 수정해 보여주는 데 사용된다. 소녀에서 소년 으로 변한 사월의 문제는 다른 평자들이 다뤘으니 두 인물만 검토하자.(참고 남지은, 산소 권력 다룬 택배기사’, 끝과 끝으로 갈렸다, 한겨레, 2023.5.1. 5. / 정유미, 원작의 장점을 살리지 못한 총체적 난국, IZE, 2023.5.15.)

▲ 〈택배기사〉 ⓒ 이윤균

  우선 5-8. 웹툰의 1/3 지점까지 5-8은 주인공 사월의 조력자 역할이다. 하지만 존재감이 강하고 가족과의 장면 등 그만의 서브플롯도 소소하게 그려진다. 드라마의 5-8은 메인 주인공이다. 김우빈을 캐스팅한 만큼 드라마의 얼굴이며 세계관 최강자로 설정되어 있다. 그런데 문제는 5-8에 대해 드라마가 종반 직전까지 거의 알려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전체적인 서사를 끌고 가는 역할을 맡은 인물인데 베일에 싸여 있다. 그저 택배 기사들 사이에서 최강자로 인정받고 있고, 난민 해방을 위해 택배기사들로 구성된 블랙 나이트라는 레지스탕스를 꾸리고 있다는 점 정도만이 그려진다. 사월이 블랙 나이트와 함께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는 둘의 서사가 겹쳐서 5-8의 개별적 존재감도 옅어진다. 세계관 최강자라는 설정은 설정뿐이고, 액션으로 드러나는 장면은 거의 없다. 그러니 이입하기도 감탄하기도 어려운 캐릭터로 밋밋하게 서사를 이어갈 뿐이다.

  5-8이 존재감이 덜해 문제라면, 류석은 쓸데없는 존재감이 문제다. 로뎅의 조각 지옥의 문앞에 앉은 류석은 드라마의 최종 빌런으로서 온힘을 다해 세계를 망치려 한다. 문제는 이 황폐한 세계에 류석 외에는 제대로 된 빌런이 없다는 점이다. 세계를 어떤 빌런 하나가 망칠 수도 있다. 타노스 같은 당위와 혁명적 의도를 지닌 빌런이라면 납득간다. 하지만 어지간해서는 세계를 망치는 것은 복수의 각계각층 각양각색의 보통 빌런들이다. 특히 택배기사처럼 난민을 향한 혐오와 차별을 그리는 드라마라면 그것을 문화로 그렸어야 했다. 밖에 나가지 못하니 온라인에서라도, 혹은 일반 구역이나 특별 구역의 평범한 악한 한둘이라도 조연급으로 등장시켜 혐오와 차별이 만연한 모습을 그릴 수는 없었을까? 류석 하나에 모든 악함을 몰아주는 것은 세계까지 단순화하고 만다. 다양한 악인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드러내는 차별과 혐오가 사회상을 나름 입체적으로 드러냈던 원작 웹툰을 생각하면 드라마의 몰아주기는 아쉽고 이해하기 어려운 선택이다.

나가며

  드라마 택배기사는 세계관과 중심 인물의 서사 모두 아쉽고 결합도 헐겁다. 택배박스와 송장으로 비유하자면 고급종이로 만든 커다란 택배박스에 허름한 종이 테이프가 덕지덕지 붙어 있고 누더기가 된 송장에는 보낸 사람과 받는 사람 이름이 모두 흐릿하게 인쇄되어 있는 것만 같다. 그러니 안에 든 내용물=메시지는 어지간해서는 전달되기 어렵다. 원작 웹툰은 적어도 튼튼한 박스에 걸맞은 테이프로 잘 포장되어 있었고 송장도 또렷하게 찍혀 있었다. 훌륭한 포스트 아포칼립스물이라고까지 말하기는 어렵더라도 기본은 확실히 했다.

  웹툰의 영상화는 하루 이틀이 아니다. 웹툰의 장점을 잘 뽑는 것을 전제로, 영상 서사로 살리고 수정할 부분은 하는 것이 영상화의 기본이란 걸 알 만큼 알 때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영상화가 여러 이유로 기본에서부터 실패하고 만다. 드라마 택배기사가 마지막 오배송이길 바란다.


필진이미지

조익상

만화평론가, 만화문화연구소 연구위원
합정만화연구학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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