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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지충이라는 건 알고 있는데요…!
- 마츠모토 나오야 〈괴수 8호〉
지난 연말, 내년에는 차기작은 판타지로 써보겠다며 웹소설 자료를 모으고 있었다. 그러나 사람 인생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정작 7월이 된 지금 판타지 소설 작가가 아니라 ‘판타지 장르와 미래학’이라는 교양과목의 강사가 되어 있었다. 원래는 단대 전공선택 과목이었지만 몇 년간 사정으로 폐강되었다가 교양학부에서 다시 열리게 되었는데, 학부 때 들었던 수업이라고 어필했던 게 먹혔던 건 지 13년 만에 내가 들었던 수업을 가르치게 되었다.
내 강의의 목표는 왜 2010년대 이르러 일본 판타지 장르의 소년들이 이세계로 떠나야만 했는지, 동시에 한국의 2030 남성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이세계 혹은 게임 속에서 악착같이 살아남는 데스게임을 했어야 했는 지를 논하는 것이었다.
물론 그 이전에도 〈성전사 단바인〉(1983), 〈슈퍼그랑죠〉(1989), 〈마법기사 레이어스〉(1993) 등의 이세계로 떠나는 작품들은 많았다. 다만 위 작품들은 이세계에서 모험을 떠나는 것이 주제였다면 2010년대 이세계 장르는 평범하다 못해 비루한 주인공이 우연히 이세계로 빨려 들어가게 되고 그곳에서 주인공은 신의 권능을 얻어 그 힘으로 뭐든지 해내며 결국엔 신이 되어 버리는 구성이다. 모험을 통해 강해지고 동료를 모은다는 기존의 이세계 모험과 다르다. 특이한 점은 먼치킨 주인공의 개연성을 어째서인지 익숙 한 게임 시스템으로 보충한다는 점이고 후에 이세계 장르는 아예 ‘게임 빙의’ 장르로 분화하게 된다. ‘이고깽’(이세계로 간 고등학생이 깽판 친다.)라는 부정 표현이 널 리 쓰일 정도로 이세계 장르는 서브컬처계의 한 시대를 주름잡았던 장르였고 바이러스처럼 다양한 변종으로 살아남아 웹기반 스낵컬처의 필수 요소가 되었다.
익숙하지만 낯선 이세계의 괴수와 인간
이세계 장르가 유행하는 이유에 일본의 누군가는 사토리 세대가 느끼는 각박한 현실로부터 도피라 말했고 한국의 누군가는 N포세대가 겪는 현실적 좌절로부터 회피하는 것이라 분석했다. 그리고 나 역시 똑같이 가르쳤다. 하지만 감히 말하자면 쉽게 쓸 수 있기 때문이다. 〈반지의 제왕〉에서 주인공 아라곤이 1권 마지막에 나오듯, 하이 판타지는 작가가 창조한 고유의 세계관을 오랜 시간 설명해야만 하는데 그런 작법은 스낵컬처와 같은 웹 기반의 작품에서는 허용되지 않은 인내 시간이다. 로우 판타지, 특히 어반 판타지(Urban Fantasy)의 경우는 우리 세계의 문화를 접점으로 만들어서 쉽게 창조할 수 있지만 한편으론 현실과 판타지 세계의 충돌로 개연성이 떨어진다. 그렇기에 작가는 쉽고 간편하게 작품을 쓰기 위해서 주인공들은 설명할 수 없는 (혹은 필요도 없는) 이세계로 던지고 독자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게임 시스템을 차용 한다. 게임은 모든것이 시뮬레이션이라 간략화되어 있으니 작품에 게임 시스템을 도입하면 그 모든 부연도 간략화시킬 수 있다는 생각이다.
이런 배경 속에서 곧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된다는 마츠모토 나오야의 〈괴수 8호〉를 읽게 된 건 정말 슬픈 일이었다. 32살의 주인공 히노키 카프카는 방위대원이라는 꿈에 미련을 갖고 살지만 어쩔 수 없이 시체 청소부로 하루하루 살아간다. 그러다 ‘우연히’ 방위대원 지원자 나이 제한이 상향되었다는 말을 듣고 ‘우연히’ 기생생물인 괴수 8호의 숙주가 되어 초인적인 힘을 얻은 후 그 덕에 방위대원이 된다. 괴수 8호의 외모는 〈도로헤도로〉가 떠오르고 그 힘은 〈원펀맨〉이며, 장인어른은 〈강철의 연금술사〉, 괴수 아포칼립스는 〈퍼시픽림〉, 〈월드트리거〉, 괴수에서 추출한 물질로 만든 무기는 〈몬스터 헌터〉, 전투력 측정기는 〈드래곤볼〉 등 어디서 본 익숙한 것들이 섞여 있어서 친숙하고 재미가 없진 않다.
▲ 〈도로헤도로〉 표지
▲ 영화 〈퍼시픽림〉 포스터
그런데 작품의 세계관이 이세계가 아니라 우리 세계라는 점에서 핍집성의 충돌이 발생한다. SF라기엔 과학적인 묘사가 부재하며 어반 판타지라기엔 전 일본을 활개치는 괴수들이 너무 거대해서 작품 내에서 묘사하지 못한 상당 부분은 작품 외부인 독자들의 현실 논리에서 이해를 구해야 한다. 가령 〈체인소맨〉의 경우는 체인소가 죽인 악마는 부활하지 않기 때문에 개념이 삭제된다는 설정이 있다. 그래서 〈체인소맨〉의 설정에는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지 않았고 작품이 평행세계라는 전제가 깔린다. 그런데 〈괴수 8호〉에서는 1600년대부터 괴수가 발생했지만 왜 현재 세계가 우리 세계 같은 모습인지 설명이 없다.
아무리 재해와 함께하는 일본이라지만 거대 괴수가 빈번히 출현하는 설정에서 현대 사회 시스템이 어떻게 유지가 되는지 묘사가 부족하다. 이런 지적은 대부분의 어반 판타지에 적용되는 부분이라 장르 이해로 넘겨야 하지만 괘 수는 뱀파이어, 좀비, 늑대인간 같은 고딕 문학의 괴물들이 골목 깊숙한 곳에서 출현하는 ‘카더라’ 살인 사건과는 성격이 다르다. 도시에서 일어나는 판타 지임에도 건물보다 큰 괴수의 출현은 어쩌면 어딘가 있을 법한 다른 어반 판타지와는 달리 맨눈으로 명백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는 이미 영화 〈퍼시픽림〉에서 괴수의 출현으로 황폐해진 인류의 모습을 목도했기에 괴수가 출현함에도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얼마나 인위적이고 게으른 설정인지 동의하게 된다.
또한 거대 괴수에서 추출한 오버 테크놀로지를 마음껏 활용할 수 있는 설정인 만큼 유인 기체를 만들어 방위대원의 안정성을 확보하거나 양산형을 만들어 거대 괴수를 선제타격을 할 수 있음에도 소년 액션만화의 장르 쾌감을 위해 굳이 방위 대원들은 슈트를 입고 총기 한 자루로 거대 괴수를 격퇴해야 한다. 나아가 괴수를 격퇴하는 기술력과 군사력을 지녔는데 어째서 세계정세에 대한 언급이 한 마디도 없을 수 있는지도 의문이다. 〈퍼시픽림〉에서는 거대 로봇인 ‘예거’를 건조하는 기술을 전 세계가 공유하고 있어 상호확증파괴가 형성되어 있지만 〈괴수 8호〉에서는 이런 언급이 없어 왜 일본이 이 정도의 힘을 갖고 있으면서 세계를 지배하려 하지 않는지 납득하기 힘들다.
▲ 〈괴수 8호〉 Ⓒ 마츠모토 나오야
비단 〈괴수 8호〉만의 문제는 아니겠지만 재미를 떠나 어설픈 세계관 설정은 오히려 이세계로 떠나버린 작품보다 못하다. 괴수 9호가 등장하자 포티튜드 수치와 해방률이라는 드래곤볼식 전투력 수치 싸움이 정리되고 인간 크기의 괴수와 슈트 입은 인간들의 대결로 바뀌어 소년 만화 왕도물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되었다. 늘어지는 스토리에 비판도 그만큼 세계관이 치밀하지 못한 방증이기도 할 것이다.
나는 판타지가 어렵게 쓰였으면 좋겠다. 어느 장르가 세계관이 안 중요하겠냐만 판타지는 더더욱 그래야 한다고 본다. 검과 마법이 나오지 않아도, 비록 주인공이 총을 쏘고 있더라도 장르 판타지로서 충실하다는 것은 바로 세계관에서 나온다. 〈반지의 제왕〉과 〈Dungeons & Dragons〉만큼의 거대한 담론을 써달라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작가라면 내 세계관 안에서 벌어지는 모든 질문에 대해 답할 준비가 끝나야 한다고 생각한다. 만약 그런 준비가 되지 않았더라면 언제든 급조할 수 있도록 미리 이세계로 도망치는 전략이라도 필요하다. 물론 처음부터 모든 세계관을 설정하고 시작하는 작품은 드물다. 하지만 독자들이 좋아하는 갈등과 연출은 모두 작품의 세계관 속에서 탄생하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라도 보강을 해야 한다.
분명 스낵컬처 시장이 복잡한 세계관을 늘어놓는 그런 글을 받아주지 않는데 그렇게 예술혼을 불태운다고 해서 누가 인정해 주고 누가 더 많이 읽어주냐 할 수 있다. 실제로 듣기도 했다. 남들이 쓰는 글 따라 쓰면 같은 시간 내에 쉽게 쓸 수 있고 배부르게 살 수 있는데 왜 굳이 어려운 길을 걷고자 하냐는 염려였다. 요즘 서로 안 베낀 것을 찾기 힘들 정도로 흥행 공식은 문제은행처럼 되어 있고 중요한 건 오직 하이콘셉트 한 줄이다. 그러나 클리셰를 따르더라도 작가는 자기만의 세계관이 있어야 한다. 비슷한 작품이 즐비하여 표절이라는 말이 촌스러워진 이 시대에 작품의 고유성은 바로 세계관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