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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와 무관합니다”라는 요청
- 마영신의 〈호도〉
“사건은 실제와 무관합니다”
“본 작품은 창작물로서, 작품상의 등장인물, 사건은 실제와 무관합니다.”
▲ 〈호도〉 Ⓒ 마영신
마영신의 신작 〈호도〉의 매화 첫머리에 안내되는 초입 문구다. 최소한 나에게 위의 문구는 이야기가 실제가 아님을 강조하기 데 필요한 문구로 이해된다. 마영신은 어떤 방식으로든 〈호도〉의 이야기가 만화적 사건이 아닌 실제 사건으로 수용되는 것을 우려한 것 같다. 물론, 독자의 마음은 초입 문구가 지목하는 방향으로 흐르지 않을 것이다. 〈호도〉를 읽는 독자의 마음속에는 이 만화가 마영신이 취재한 미상의 실존 인물 이야기일 수 있겠다는 의심이 들것이다. 만화 속 이야기가 실제 이야기일 수 있겠다는 반응은 마영신의 만화에 있어 낯선 반응이 아니다.
마영신의 만화에는 언제나 ‘사회상’, ‘현실’, ‘비판’과 같은 리얼리즘 계열의 키워드들이 꼬리표처럼 붙어져 왔다. 마영신의 데뷔작 〈뭐없나?〉(2008), 명성을 안겨준 〈아티스트〉(2019), 2020년 하비상 수상자로 만들어준 〈엄마들〉(2015) 모두 리얼리즘을 바탕으로 논의돼왔다. 그만큼 마영신이 〈호도〉에서 현실에 있을 법한 인물을 다룬다는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마영신이 직접 현실에 있을 법한 이야기가 실제가 아니라고 강조한 것은 매우 드문 일이다. 마영신은 왜 〈호도〉에서 이 만화의 이야기는 실제가 아니라고 강조한 것일까?
여기에 있어서는 몇 가지 추측을 해볼 수 있다. 그중에 하나는 〈호도〉의 이야기가 논쟁이 될 만한 현안을 다루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호도〉는 성폭력과 학대가 난무하는 가난한 환경에서 성장하는 ‘호도’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여기에는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인 인물들이 넘쳐난다. 호도를 끊임없이 멸시하는 호도의 어머니 역시 생존의 압박 속에서 영혼과 최소한의 상식이 마모된 한 인간이다. 그렇다고 어머니가 호도에게 저지르는 학대들이 정 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호도의 주변에는 생존의 압박 속에서 상식을 잃어버리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호도의 남자친구인 ‘하진’이다. 하진은 가난과 비상식 속에서 끊임없이 마모당하는 호도의 옆자리를 지킨다. 심지어 하진은 호도가 바람을 피는 와중에도 호도의 옆자리를 묵묵히 지킨다. 이는 얼핏 보기에 비상식적으로 보이는 대응이지만, 그의 이상한 헌신은 납득가지 않는 수준이 아니다. 호도가 바람을 피기 시작하자, 하진은 호도가 따로 연락할 때까지 호도에게 먼저 다가가지 않는다. 대신 호도가 자신에게 다시 돌아올 때까지 묵묵히 자신이 사회인으로서 수행해야 할 일을 한다.
그러는 와중에 호도는 습관처럼 몸에 밴 우울과 짜증을 주변인들에게 푼다. 물론 여기에는 납득할 만한 연유와 사연들이 있지만, 호도 자체도 그다지 바람직한 인간상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호도도 그를 둘러싼 비슷한 부류의 인물 중 한 명일 뿐이다. 여러모로 불쾌한 인물임에도 독자가 호도에게 감정을 이입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다. 〈호도〉에서 고통을 생생하게 드러낼 수 있는 인물은 주인공의 권위를 가진 호도한 명뿐이기 때문이다.
고통의 불가능성 매커니즘
이렇게 〈호도〉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풀어서 써놓고 보면 〈호도〉가 드러내고자 하는 논쟁적인 현안이 어느 정도는 보인다. 그것은 일상에 누적된 다양한 고통, 즉 괴로움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호도〉의 괴로움은 어떻게 논쟁이 될만한 것이 될까? 여기에는 〈호도〉가 인물을 다루고 있는 방식이 밀접하게 얽혀 있는 것으로 보인다. 〈호도〉는 물론이고, 마영신은 본인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에게 사연을 붙인다. 물론, 그 사연이 인물들에게 면죄부나 특권을 부여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자의와 타의를 떠나서라도, 사연과 연유는 어떤 방식으로든 정당화되는 수단으로 사용되기는 한다. 그리고 그 정당화의 중심에는 이야기가 있다.
▲ 〈호도〉 연재중 베스트 댓글
고통이 감각이 아닌 이야기로 넘어오는 순간, 고통은 상황이 아닌 하나의 양식을 가진 편집물이 된다. 고통은 필연적으로 감각 주체의 무력을 전제하는 사태이기 때문이다. 이는 무력할 수밖에 없었기에,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었다는 일종의 이야기 형식을 만들어 낸다. 그리고 무력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사연과 연유가 되는데, 이때 무력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고통의 시간을 벗어난 상황 혹은 사태들에서 빌려올 수밖에 없다. 무력한 이유는 고통의 원인이 되고 무력함을 정당화하는 과정을 통해 고통의 불가피함에 맥락을 부여한다.
이 과정은 어떤 경우라도 반드시 약간의 위험한 과잉이 들어가게 되는데, 가령 ‘나는 무력할 수밖에 없으므로, 무력의 결과인 고통은 부당한 것임이 틀림없으니, 따라서 반드시 보상이 필요하다’와 같은 식이다. 얼핏 보기에 정당해 보이는 위 진술은 조금만 따져봐도 위험한 과잉이 들어있음을 알 수 있다. 가령, 어떤 부자가 ‘나는 세금 앞에 무력할 수밖에 없으므로, 내가 낸 세금에는 반드시 보상이 필요하다’와 같은 식의 주장을 한다면, 어떤 부자의 주장에는 과잉이 없는가.
약간의 과잉이라는 미묘한 왜곡 때문에 고통을 드러내는 일은 만화를 비롯하여 예술의 형태를 막론하고 윤리의 도마 위에 올라오는 일이었다. 진실의 가치를 우선시한 수잔 손택은 아예 고통을 전시하거나 재현하는 행위는 실제 상황을 “하룻밤의 진부한 유흥거리”로 전락시키는 일라며 터부시했고, 수지 랜필드는 고통이라는 독특한 상황이 만드는 이야기의 양식이 연대의 가능성과 필요성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에 활용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그러나 그 둘 모두 어떤 방식으로든 고통이 이해될 수 있다는 것에는 회 의적이었다.
따라서 여기까지만 두고 본다면, 고통을 최대한 온전하게 대할수 있는 방법은 그저 고통의 주체가 사연이나 연유를 붙이지 않고 자신 앞에 주어진 고통을 수용하는 것이 유일하다. 설사 그것이 억울하고 부당하다 느껴져도 고통을 왜곡하지 않는 방법은 그것을 수용하는 것 외에는 도리가 없다. 하지만 왜곡되지 않은 것의 쓸모는 무엇이며, 그 가치는 어떤 것인지 규정하는 것 또 한 불가능에 가깝다.
▲ 〈호도〉 Ⓒ 마영신
결국, 고통은 실제와 유리된 어떤 난감한 것으로 덩그러니 남게 된다. 이는 억울함으로 남게 되고, 억울함은 궁극적으로 분노가 되어 다른 누군가에게 표출된 이후에야 해소된다. 흔히 카타르시스라고 불리는 이 과정은 그간 많은 고대인부터 오늘날까지 지적되는 바와 같이 예술의 바탕이 되기도 하지만, 그 예술이 그저 억울했던 한 인물의 배설로 그칠 가능성도 아예 없는 것이 아니다.
무관하지만 무리한, 쓸모없지만 필요한 요청
마영신은 바로 그 점을 우려했던 것 같다. 어떤 인물이 여자여서, 혹은 남자여서, 부자여서, 가난해서, 힘이 있어서, 힘이 없어서 이렇게 그려놓지는 않았다는 점. 바로 그 점을 공표하고 싶었던 것 같다. 설사 이 창작물의 인물이 실제여도 이는 실제가 아니고 허구에서 일어난 일일 뿐이니 그저 작품으로만, 다시 말해 가상적인 사건으로만 ‘즐겨’달라는 허망한 요청일 수도 있다. 아니면 작가가 만든 인물을, 작가가 세상을 보는 방식으로 인물과 사건을 바라봐 달라는 요청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다.
물론, 그 요청이 독자를 좌지우지 못한다는 것을 작가 스스로 잘 알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다지 쓸모있지 않은 주제에 얼마나 무리한 요구인지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쨌거나 이 이야기를 하려면 거추장스러워도 필요한 요청이라는 것을 끝내 알았을 것이다. 별 쓸모는 없는데 유별나고, 의미는 없는데 어쨌거나 필요한, 그래서 거추장스럽지만 달고는 있어야 하는 문구를 단 것에는 그러한 연유가 있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