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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럴 땐 이런 만화 : 내 인생 최고의 SF 만화
또 다른 세상과 웃으며 조우하는 법
- 이무기 〈별종〉
생활이라는 악순환
또 다른 세상의 존재를 상상한다. 이 현실은 사실 가 짜이며, 더 근사한 모습을 가진 진짜 현실이 있을 거라고 믿어 버리고 싶은 때가 있는 거다. 일종의 외면이다. 오직 실천만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라는 걸 알고 있지만 당장의 편안함을 우선순위에 둔다. 그러나 아무리 다른 꿍꿍이를 키워도 시간은 쉼 없이 흐르고, 이내 피하고 외면해도 절대 벗어날 수 없는 문제가 있다는 걸 깨닫게 된다. 생활에 만연해 있는 악순환이다. 끔찍한 건 이런 생활이 쌓여 인생이 완성된다는 것이다.
강제징용과 공출, 위안부라는 역사적 사실을 다루었던 〈곱게 자란 자식〉, 비루하고 우스꽝스럽게 행동하는 양아치들이 나오는 〈인생이 장난〉, 〈12단 곡괭이〉로 현실의 어두운 면면을 적나라하게 표현하면서도 위트와 해학을 잃지 않는 작품을 꾸준히 선보인 이무기 작가는 〈별종〉으로 생활의 재미와 고충을 SF적 상상력으로 유쾌하게 풀어냈다.
▲ 〈별종〉 Ⓒ 이무기
〈별종〉은 1부와 2부를 나누어 이야기를 전개한다. 1999년부터 2021년까지의 시간에 갇혀 죽고 태어나길 수없이 반복하는 외계인과 그 안에서 새로운 결말을 찾고자 하는 5명의 친구, 그리고 이 모든 것의 종지부를 찍을 수 있는 키를쥔 또 다른 외계인을 주연으로 내세운다.
저건 나의 미래가 아닐 거야
어느 마을에 유성이 떨어진다. 5명의 친구는 유성의 정체를 확인하기 위해 뒷산에 오른다. 이들 1명이 유성의 잔해에 손을 댄다. 그러자 영상이 재생된다. 손을 댄 이의 미래 모습으로 보이는 영상이었다. 그러나 그 모습이란 찢어지게 가난하고 비참한, 절대 본인의 모습이라고 믿고 싶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리고 부정과 수용, 변화를 위한 노력이 이어지지만 결국 미래라고 믿은 장면들은 무수한 평행세계의 한 장면임을 추리하게 된다. 그리고 이 지난한 반복의 원인까지 파악하며, 갈등이 시작되고, 갈등은 재해로까지 번진다.
▲ 〈별종〉 Ⓒ 이무기
유성의 잔해, 이른바 외계의 존재 는 “물체”, “복덩이” 등 여러 이름으로 거론되면서 이후에 전개되는 모든 말도 안 되는 상황에 당위성을 부여하는 역할을 한다. 미래를 볼 수 있는 영상과 다중우주가 이상할 게 없어지고, 외계인이 인간을 조종한다거나 하는 게 그럴 수 있는 일이 된다. 작중의 파격적인 사건들은 모두 SF 장르만의 설득력을 전제로 한다.
나의 파국에서 우리의 종말로
1부의 이야기는 약 20년 전의 과거가 되고 2부는 갈등에서 살아남은 이를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등장하는 모든 관계성들이 촘촘하게 엮여 있으나, 지면의 한계로 모든 내용을 담을 수 없다는 게 아쉽다.) 1부가 사회 체계 안에서의 갈등을 다뤘다면, 2부는 야생의 환경에 놓인 인간들의 욕망을 그려낸다. 1부의 사건으로 인해 종말을 맞이한 도심에서 다소 떨어져 있는, 산속 별장에서 지내는 몇몇 인물들만을 다루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들은 개인의 종말을 넘어 은하의 종말을 운운한다. 그럼에도 그들은 시니컬하면서도 인간적인 태도를 유지한다. 갑자기 끝이 정 해진다고 하더라도 한낱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새로운 사회를 꿈꾸기 위한 필수 요소는 언제나 동족의 존재 여부이다.
▲ 〈별종〉 Ⓒ 이무기
양자택일의 고민과 거대한 절망도 SF 장르의 테두리이기에 독특한 현실성을 가지게 된다. 죽이지 않으면 본인만 죽게 되는 게 아니라 세상이 망하게 된다거나, 거대한 시간선 안에서 언제나 비극을 선택하는 캐릭터를 내세우는 설정, 실현되지 않은 미래라거나 원리가 공표되지 않은 도구 등도 얼마든지 활용할 수 있다. 그렇기에 존재가 지닌 한계, 즉 허물을 색다른 관점에서 건드리는 게 가능해지는 거다. 이에 SF 장르는 현실 도피는 수단이 아니라 현실을 마주하는 또 하나의 방법론으로 탈바꿈된다. 나이를 먹었음에도 해 둔 게 없다는 인생의 비애를 서사 전반에 깔아 두고, 또 다른 세상을 마주했을 때 가지게 될 고민과 절망을 보여주는 본격 SF 웹툰 〈별종〉을 통해 현실 도피의 유쾌한 방법론을 확인해 봤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