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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먹을 땐 밥만 먹어라.”
- 한혜연의 〈세화, 가는 길〉
그림의 떡. 맛볼 수 없지만 상상할 수 있는 맛이라서 만화 속 음식은 독자가 군침 흘릴 만큼 맛깔나고 먹음직스럽게 표현된다. 아는 맛이 더 무섭다고 한 번쯤 먹어봤음 직한 공감대가 상당히 중요하다. 매회 등장하는 음식이 궁금해 썸네일이라도 확인하게 만드는, 음식은 꽤 매력적인 소재다.
▲ 〈세화, 가는 길〉 Ⓒ 한혜연
카카오웹툰에서 연재 중인 한혜연 작가의 만화 〈세화, 가는 길〉은 사찰음식이 소재다. 사찰음식은 생명을 희생한 음식 재료와 자극적인 향신료를 쓰지 않아 채식 위주의 담백한 식단이 특징이다. 작중 등장인물 ‘보미’의 말을 빌리자면 맛있다기보다 ‘맛’이 있는 음식이랄까. 건강에 좋은 것과 맛은 반비례하는 경우가 많아 살며시 걱정스러웠다. 그 슴슴한 맛은 어떻게 표현될 것인가?
괴로워도 슬퍼도 먹는 존재
만화 〈세화, 가는 길〉은 사찰 세화사에 오가는 다양한 인물이 등장하는 옴니버스 스토리다. 세화사와 이름이 같은 '세화'는 남자친구와 갑작스럽게 이별하고 그의 반혼제를 치르러 절에 첫발을 딛는다. 우울하고 불안하다면 몸을 움직이라고 했다. 세화는 남자친구 없이 혼자 지낼 주말을 감당하기 버거워 세화사로 향한다. 버스는 하루 2회 운행하고 날씨가 궂으면 그마저도 중단하는 오지. 세화는 다른 신도의 차를 얻어 타고 이따금 등산하는 수고도 기껍다.
혼자니까 대충 먹고 입맛 없으니 아무거나 먹었다. 도시에선 배달음식과 컵라면으로 허기를 채웠지만, 공양간에선 그러면 안 된다. 밥 한 끼 먹으려면 여럿이 움직여야 하기에 나물을 다듬고 만두도 빚는다. 생소한 음식을 배우고 만들며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니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맛있게 먹어도 된다. 나만 슬픈 것도 아니고, 나만 이별한 것도 아니다. 함께 만든 음식이, 사람들이 위로가 된다.
주어진 것에 대하여
공양은 음식 재료 마련에서부터 출발한다. 편의시설이 없어 자급자족할 수밖에 없는 산속에서 먹거리를 찾으려면 부지런해야 한다. 겨울에 언 땅이 녹으면 고개를 내미는 쑥과 냉이를 캐고, 텃밭에 심은 얼룩 강낭콩, 배추, 가지를 딴다. 지천에 흐드러진 진달래도 연못 위에 뜬 연잎도 빼놓을 수 없다. 자연이 주는 대로, 공양물이 생기는 대로 끼니를 만든다. 그래도 여름이면 주렁주렁 열리는 가지는 열려도 너무 많이 열린다.
▲ 〈세화, 가는 길〉 Ⓒ 한혜연
인생의 큰 위기를 맞아 세화사에서 은둔 중인 강오 처사는 사찰에서 어릴 적 친구 지은과 재회한다. 둘의 만남은 ‘그 여름은 보라색이었다.’라며 되뇔 만큼 가지는 시퍼렇게 멍든 어린 시절 상처를 상기시킨다. 그리고 그 시절을 버티게 해준 서로를 기억한다. 강오 처사는 서툴지만 지은을 위해 가지를 요리하고, 함께 나눠 먹었다. 각자의 삶에 주 어진 고통은 녹록지 않지만, 불볕더위가 지나면 선선한 바람이 불 듯 다시 한번 가지는 여름을 버티게 한다.
음식이라는 연결고리
이제는 ‘혼밥’이 드문 일도 창피한 일도 아니지만, 음식은 혼자 먹는 것보다 함께 먹는 것이 더 맛있다. 세화사에 방문하는 사람들은 먹으려면 공양간 일손을 거들어야 한다. 그중 김 처사는 고구마 찌는 법도 모르는 장년 남성이다. 퇴직 후 일자리를 찾아 도피하듯 낙향해 주중엔 학원 차를 운전하고 주말엔 서울 집으로 간다. 각자 생활이 있어 데면데면한 가족들. 김 처사는 가족과 소통하고자 앞치마를 두르고 음식을 만든다. 당뇨가 있는 아내에겐 호박죽을 쑤어주고, 딸에겐 부침개를 부쳐줘 술 한 잔 기울인다. 아내와 딸은 어설픈 솜씨지만 김 처사의 음식이 기다려진다.
만화 〈세화, 가는 길〉은 음식을 매개로 등장인물의 사연이 접점을 찾아 연결된다. 각 장마다 계절별 제철 음식에 중심인물의 사연이 중첩되며 물 흐르듯 편안한 스토리텔링을 구사한다. 70화라는 장기연재작이 자칫 지루할 수도 있지만 다양한 인물의 삶을 조명하고 연결시키는 전략으로 극의 재미를 촘촘히 엮어간다. 캐릭터의 감정, 음식 서사를 적절하게 구성해 실로 담백한 성찬을 선보인다.
밥 먹을 땐 밥만 먹어라
세화사 주지 스님은 음식 앞에서 상념에 빠진 사람들에게 밥 먹을 땐 밥만 먹으라고 하신다. 과거에 머물지 말고, 미래를 꿈꾸지 말고, 현재 순간에 마음을 집중하라는 부처님과도 일맥상통한다. 현재를 살아가는 것, 그것이 생에 대한 예의며 내 앞에 오기까지 수많은 여정을 거친 음식에 대한 예의가 아닐까. 이따금 위로와 성찰이 필요할 때 만화 〈세화, 가는 길〉을 음미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