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위 '뷰어로보기'를 클릭하시면 도서 형식으로 보실 수 있습니다.
뜨겁게 좋아하던 것과 차갑게 멀어진다면
- 초록뱀 〈그림을 그리는 일〉
▲ 〈그림을 그리는 일〉 ⓒ 초록뱀
‘그리다’. 그리고 거기에서 파생된 명사 ‘그림’. 이 단어들의 어원은 무엇일까. 이러한 일상어들은 어원을 규명하기가 어렵고 실제로 밝혀진 바도 없지만, 어쩌면 ‘그(것)’라는 지시 표현에서 기원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인류 최초의 그림이라 할 수 있는 동굴벽화를 생각해 보면 그림이란 것은 현재 보이는 ‘이것’ 혹은 ‘저것’에 서 시작한 것이 아니라, 아까 동굴 밖 거기에서 보았던 ‘그것’에서 시작되었다. 지금 보고 있는 이것이나 저것을 굳이 그릴 필요는 없으니 이것은 응당 그러하다. 하지만 이러한 의미의 그림은 그리는 대상, 즉 세계와 나 사이의 시공간적 거리를 필연적으로 요구한다. 그림을 그릴 때의 나는 그 필연적인 거리로 인해 세계와 멀어지게 되고, 생계를 위해 동굴 밖으로 나올 때 의 나는 그림과 멀어져야 한다.
뭉쳐지지 못하는 나와 세계, 그리고 그림의 관계는 인류가 동굴 밖으로 나온 지 수천 년이 지났지만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 같다. 창비에서 출간한 만화책 〈그림을 그리는 일〉은 그런 뭉쳐지지 못한 삶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림책을 만들고 있는 그림작가 성민은 출판사에 작업물을 보여줄 때마다 대표로부터 빼곡한 수정 사항을 전달받는다. 성민이 용기 내어 토로한 설명 혹은 변론은 출판사 대표와 편집자에게 그저 고집이고 이기심이고 무능력한 작가주의다. ‘작가답게’를 스스로 되뇌이고 다른 사람도 성민을 ‘작가’라고 부르지만, 성민이 작가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의심하는 사람은 성민 자신이다. 이러한 의심도, 그 가 다른 사람의 작업물을 보며 질투심을 느끼는 것도, 미래가 불확실하고 통장 잔고가 바닥인 것도 모두 그림 때문이다.
냉정과 열정 사이의 그림
이렇게만 본다면 이 책은 ‘그림 그리는 사람의 고단한 현실’을 그린 리얼리즘 작품일 것이다. 그리고 그건 맞는 말이긴 하다. 다만 〈그림을 그리는 일〉은 ‘그림 그리는’이나 ‘고단한 현실’보다는 ‘사람’에 집중한 온기 가득한 책이다. 그림작가로 살아가는 성민의 삶은 분명 차갑고 혹독한 현실이다. 그의 표현으로 말하자면 그림으로 점철된 그의 현재 삶은 ‘편집 없이’ ‘길고 지루한 영화’다. 하지만 독자마저 추워지려고 할 때마다 이야기는 그림을 매개로 하여 초등학생 시절로, 고등학교 입시 때로, 대학생 시절로 이동하며 그 온도를 유지한다.
초등학생 성민의 삶에서 낙서는 가장 큰 즐거움이었다. 낙서는 때론 선생님과 부모님께 혼나는 원흉이 되었지만, 그림으로 누군가를 기쁘게 해줄 수 있는 도구이기도 했다. 고등학생 성민은 엄마와 미술 학원에 상담받으러 갔다가 비싼 학원비를 염려하는 엄마 눈치에 ‘괜찮아’라는 거짓말로 무마하지만, 지금은 밥 먹으며 엄마와 아무렇지 않게 그 얘기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냉정과 열정을 오가던 두 시기와 달리, 책의 가장 많은 부분이 할애된 대학생 시절은 온기가 가장 오롯이 보관돼 있다. 그림과 무관한 전공으로 대학에 입학했지만 별 기대 없이 들어간 그림동아리에서 성민은 그림에 대한 꿈을 다시 키워나간다.
이렇게 성민의 삶은 그림을 따라 여러 온도를 오르내린다. 물론 아무리 과거에 뜨겁고 따뜻한 기억이 있다 할지라도 중요한 것은 차가운 현재의 삶이다. 이 책의 플롯에서 과거의 장면들은 미지근한 온도를 맞춰주는 역할보다는 ‘어쩌다 그림 그리는 내 삶이 이토록 차가워졌지?’라는 질문의 답을 찾는 기능을 하기때문에, 오히려 따뜻한 기억을 더듬을수록 오늘의 추위는 더욱 혹독하게 느껴진다. 기억을 반추하고 기억 속의 사람들과 다시 만나 아릿한 과거를 공유하더라도, 성민의 작업물은 여전히 출판사로부터 쓴소리를 듣는다. 성민과 그림, 그리고 세계 사이의 거리는 요원해 보인다. 거리가 멀수록 서늘함은 크다.
▲ 〈그림을 그리는 일〉 ⓒ 초록뱀
다만, 성민에게는 미안하게도, 성민이 외롭고 고독해질수록 독자는 성민과 가까워지고 그로부터 따뜻함을 느낀다. 누구나 한 번쯤 교과서에 낙서하다 혼나본 적이 있어서만은 아니다. 그림에 관심이 없는 사람일지라도 성민의 현재와 과거를 오가다 보면 거기에서 자신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뜨겁게 좋아하던 것이 차갑게 돌아서는 것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말이다. 그 대상이 사람이라면 상대방의 마음이 바뀐 것으로 손쉽게 결론을 내릴 수 있겠지만, 사람이 아니고도 우리의 온도를 오르내리게 하는 것들이 있다. 범주를 줄여서 ‘꿈’이라고 하자. 그것은 계속 그 자리에 가만히 있었는데, 그를 향한 우리의 마음은 왜 손바닥 뒤집듯이 변하는 걸까?
그냥 그리자. 그냥… 살아가는 거야.
개인적으로 ‘그냥’이라는 단어를 좋아하지 않는다. 어린 시절 어른들로부터 들었던 ‘그냥’은 주로 명령문의 형태로 어떤 논리나 다른 가능성들을 소거해 버렸다. 어떤 복잡한 문제 나 상황도 ‘그냥’이라는 단어로 뭉개지곤 했고, 나는 그런 어른들의 무책임함까진 학습하지 않은 어른으로 자라고 싶었다. ‘그냥’이 ‘그 모양’이라는 뜻의 ‘기양(其樣)’에서 기원했다는 설이 있는데, ‘그’가 주는 추상적인 거리감이 견디기 어려웠는지도 모르겠다.
〈그림을 그리는 일〉에서 ‘그냥’이라는 단어는 결정적인 순간마다 등장한다. 성민이 작품 전반에서 계속해서 고민하는 질문은 ‘왜 그리는가’이다. 성민에게 ‘좋아하니까’라는 말은 답이 될 수 없었고, 자신이 좋은 작업을 하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성민이 생각하기에 답을 찾은 것처럼 보이는 명식선배는 성민에게 이런 문자를 보낸다. ‘넌 너를 좀 더 사랑할 필요가 있어. 스스로를 너무 슬퍼하지 마. 궁상 그만 떨고 가서 작업이나 더 해!’ 그리고 성민은 생각한다. ‘그래, 그리자. 그냥 그리자. 답을 찾은 것처럼’. 주변 사람들이 하나, 둘 그림을 그만둘 때에도 자신은 그림을 계속 그려온 것에 대해 성민은 자신이 그저 더 이기적일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실망 시키며 그림을 그려왔고, 그렇다면 적어도 자신만은 행복했어야 했다며 성민은 생각한다. ‘그래도… 재밌었냐고? 아니… 그냥… 그랬어.’ 성민은 자신의 의지가 담기지 않은 채 출판된 그림책을 보며 그림 그리는 일을 그만두기로 한다. 작업실 책상을 정리하고 친구와 함께 돌아오는 길에 성민은 생각한다. ‘그림을 그리고 싶었고, 그림을 그렸다. 그 안에서 무언가를 찾았지만, 늘 다시 잃어버렸다.’ 그리곤 친구에게 말한다.
‘나 이번엔 도망치는 거 맞는 거 같아./……아냐./뭐가?/그런 거 아니라고…/……도망치는 게 아니라. 그냥… 살아가는 거야.’
그림을 그릴 동력으로서의 ‘그냥’이든, 그림을 그려온 삶에 대한 회한으로서의 ‘그냥’이 든, 그림으로부터 도망치다 느낄 때의 ‘그냥’이든, ‘그냥’은 그림보단 성민의 삶에 더 붙어 있는 단어로 쓰인다. 사실 성민은 그림에 가까워질수록 성민의 삶, 즉 자기 자신과는 점점 멀어졌었다. 그림을 더 잘 그리려 할수록 뛰어난 재능 앞에서 스스로는 작아졌다. 누군가에게 평가받기 시작하면서 교과서에 낙서하던 때의 즐거움을 잃어버렸다. 자신에 대해 표현해 오라는 미대 과제에 대해 성민은 딱히 생각나는 게 없어 과제를 해가지 못한다. 그림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그림이 도망쳐 달아난 것이 아니라, 성민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도망친 것이었다.
그런 성민의 주변을 맴도는 ‘그냥’은 어른들의 무책임한 말 같은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림을 특별한 답이 있는 대상이 아니라 ‘그 모양’대로 보게 하는 말이었고, 그림을 그리며 살아온 삶에 대해 ‘그 모양’대로 받아들이게 하는 말이었고, 그림을 그만둔 결정과 불안에 대해 ‘그 모양’대로 사는 것이 우리네 삶임을 알려주는 위로의 말이었다. ‘그림’과 ‘그냥’이 벌려놓은 거리감은 우리를 스산한 공간 속의 쓸쓸한 존재로 만들지 않는다. 맹목적으로 뭉쳐져 있던 것으로부터 한 걸음 물러나, 나를, 그리고 나를 둘러싼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는 여유를 만들어 준다. 좋아하는 것과 한데 뭉쳐져 있지 않아도, 괜찮다. 〈그림을 그리는 일〉은 반드시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지 않아도 군데군데의 탁월한 대사와 내레이션을 통해 이러한 온기와 위로를 느끼게 해준다. 책의 저자인 초록뱀 작가의 인스타그램을 통해서도 일부를 엿볼 수 있다. 인스타툰의 형식으로도 매끄러운 감상이 가능하지만, 그럼에도 출판물 형식으로 보는 것을 추천한다. 대사 이상으로 이 책의 따뜻함을 탁월하게 만드는 요소인 작화와 연출 때문이다. 화려한 효과의 웹툰보다 훨씬 오랜 작업시간이 예상되는 세심한 붓터치와 따스한 색감, 그리고 연출과 활자의 시너지 가 독자의 감정선을 배가시킬 것이다.
▲ 〈그림을 그리는 일〉 ⓒ 초록뱀
이 책이 초록뱀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라는 것도 말하지 않을 순 없을 텐데, 유쾌함과 따뜻함을 표방하는 일상툰과 달리 내면의 깊은 감정들을 다룬다는 점에서 이 작품의 강력 함이자 작가로서는 패널티로 작용했을 듯하다. 다만 작가의 말처럼 어디까지가 실화이고 어디까지가 창작인지 생각하며 읽기보다, 그저 ‘성민’의 이야기, 그리고 ‘나’의 이야기로 읽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삶이 조금 외롭고 어렵다 느껴질 때, 좋아하는 대상이나 꿈 때문에 힘들고 불안할 때 성민의 이야기를 꺼내보길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