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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만화란 무엇인가?
역사와 역사 창작물
역사를 배경으로 하는 역사 창작물이라 해도 역사학자가 쓰는 역사책과는 다른 종류의 것이 된다. 역사가는 if를 배격하는 훈련을 받는다. 역사 해석에는 무수한 갈래가 존재하는데, 여기에 만약 이러했다면 어땠을까 라는 가정까지 집어넣으면 역사가가 추구해야 하는 역사적 사실에 입각한 재구성과는 거리가 멀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사적 사실을 소재로 삼아 창작을 하는 창작자는 if를 사용하는데 거침이 없다.
역사 소설의 아버지라 불리는 월터 스콧은 역사 소설을 통해서 그 안에서 다루는 인물과 시대에 대한 새로운 탐구를 유도할 수 있다는 점을 역사 소설의 유용성으로 꼽았다. 실증사학으로 근대 역사학의 아버지라는 소리를 듣는 랑 케(1795~1886)는 월터 스콧(1771~1832)이 쓴 15세기 프랑스를 배경으로 하는 역사소설 《쿠엔틴 더워드》(1823)를 읽고 낭만보다 진실이 더 흥미롭고 아름답다고 여기게 되었다. 랑케는 소설을 읽다가 루이 11세와 샤를 1세 초상화의 차이를 발견했는데, 그 일이 그의 일생에 새로운 획을 긋게 되었다. 그리하여 랑 케는 자신의 저서에서 허구와 상상을 모두 피하기로 결심했다. 이렇듯 역사학자와 역사 창작자의 길은 완전히 갈라서게 되었다. 하지만 우리가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그가 역사학의 방향을 정립하는데, 역사 소설 즉 역사를 다루는 창작물이 영향을 주었다는 점이다. 역사를 소재로 하든, 하지 않든 창작자는 언제나 자신의 작품을 감상하는 사람에게 영향을 주고 싶어 한다. 물론 역사학자 중에도 그런 의식을 가질 수는 있으나, 자신의 주장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서 사실을 왜곡하거나 생략할 수는 없다는 점이 역사학자의 한계이다.
역사학자나 역사 창작자나 역사를 재구성하는 작업을 하는데, 역사학자는 엄밀한 학문적 방법에 의지하여야 하지만 역사 창작자는 감성적 방법을 사용한다. 역사 창작자가 다루는 것은 근본적으로 허구이기 때문이다. 역사적 사실 을 아무리 많이 동원한다고 해도 창작자는 결국 그 안에 자신이 말하고 싶은 주제를 넣고 인물을 움직이게 해야 하기 때문에 역사학자와는 다른 길을 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역사 창작자가 그 안에서 보여주고 싶어 하는 것은 역사가 와 크게 다르지 않다. 결과에 이르는 과정이 다른 것이다.
루카치(1885~1971)는 월터 스콧을 역사 소설의 시발점으로 인식했는데 그 이유는 그로부터 역사의식이 소설 속에 들어갔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특정한 목적의식이 창작물에 부여되어서 창작자가 대중에게 전달하고 싶어하는 주제를 만나게 된다. 역사가는 역사적 사실 그 자체를 재구성하고 싶어하지만 창작자는 자신이 전하고 싶은 주제에 따라 역사적 사실도 구부릴 수가 있다.
역사를 가지고 창작물을 만들 때, 크게 두 가지 다른 전개 방식이 있다. 역사 사건의 순서에 따르며 역사적 사실을 비교적 충실하게 재현하는 방식과 역사 사건은 배경으로 두고 창작자의 필요에 따라 알려진 내용과는 다른 방식으로 묘사하는 방식이다. 전자의 경우를 전통적인 역사 창작물이라 할 수 있다. 후자의 경우는 대체 역사물이 그 대표적인 형태라 하겠다. 대체 역사란 ‘만약’에 기대어 실제와 다른 일이 벌어져서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 전개가 사라지고 새로운, 즉 대체된 역사가 전개되는 방식이다.
역사 교양 만화
그런데 만화에서는 일반적인 역사 창작자와는 다른 장르도 존재한다. 교양만화 또는 교육 만화라고 부를 수 있는 장르는 감성이나 허구가 아니라 사실을 전달하기 위해서 만화를 이용하는 형식이다. 텍스트로 이루어진 것이라면 역사 대중서가 여기에 해당할 것이다. 하지만 만화는 고유의 전달력, 즉 만화적 허용을 하는 코믹한 요소들을 동원하곤 하기 때문에 이들 역사 교양 만화라고 해서 단순히 쉽게 역사를 대중에게 전달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역사 대중서와는 차별성을 가진다고 하겠다.
▲ 〈먼나라 이웃나라〉 ⓒ 이원복
이 장르의 대표적인 만화로는 전 국민 베스트셀러인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맹꽁이 서당〉 같은 만화들을 꼽을 수 있겠다. 조금 넓게 보면 이원복의 〈먼나라 이웃나라〉도 역사 이야기를 많이 다루기 때문에 여기에 속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역사 교양 만화는 지식 전달만이 목적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만화가의 성향에 따라 그 안에서 또 다른 이야기를 전달하는 것도 가능하다. 원래 〈먼나 라 이웃나라〉의 경우도 〈시관이와 병호의 모험〉이라는 만화에서 시작되었던 것으로, 두 말썽꾸러기 친구가 어쩌다 독일에 가게 되면서 벌어지는 모험담 속 에서 유럽에 대한 지식을 전달하는 형식으로 만들어졌었다. 그러다 정보 전달 을 만화로 전달하는 형식으로 바뀌었는데, 만화가 이원복을 닮은 캐릭터가 독 자에게 말을 하는 형식으로 친근성을 더 높이는 형식으로 바뀌었다.
〈맹꽁이 서당〉의 경우는 서당 훈장을 비롯해서 하인 마당쇠, 붓장수 공서방, 그리고 학동 중에도 덩치 큰 멍청이 장쇠 등이 고정 캐릭터로 등장해서 이야기를 끌어간다. 장쇠는 나중에 장가가서 점잖은 캐릭터로 성장하기도 한다.
교양 만화에서 작가 본인의 캐릭터가 등장하는 것은 흔한 것으로, 독자에게 친근감을 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만화 특유의 개그를 집어넣을 수 있어서 선호된다.
역사 창작 만화
일반적으로 역사 만화라고 하면 역사 속에서 활약하는 주인공이 등장하는 만화가 떠오르게 될 것이다. 이 경우에 주인공은 잘 알려진 유명 인물이기도 하고, 만 화가가 창조한 인물이기도 하다. 루카치는 역사상의 위인을 주인공으로 쓰지 말라고 말한 바 있다. 역사적으로 해석이 끝나 버린 인물로는 작가가 마음대로 활약하게 할 수가 없기 때문에 피하라고 한 것이다. 하지만 동양권에서는 유명인물을 주인공으로 하는 역사 만화도 흔한 편이다. 이미 소설 《삼국지》라는 유명 인물이 주인공인 초 베스트셀러가 오래전에 자리를 잡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정통 역사 만화라고 볼 수 있는 것으로는 고우영의 〈임꺽정〉(1972)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임꺽정〉은 벽초 홍명희(1888~1963)의 소설 《임꺽정》(1928~1940)이 유명하지만 고우영의 〈임꺽정〉은 벽초의 소설과는 다른 오리지널 스토리를 가지고 있다. 벽초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만화로는 이두호가 그린 〈임꺽정〉(1991)이 있다. 이처럼 실존인물을 다룬다고 해도 만화가의 창작 의도를 충분히 넣어 독특한 해석을 그리는 만화를 만들어 낼 수도 있다.
▲ 《임꺽정》 ⓒ 홍명희
주인공은 가상의 인물이지만 만화가의 독특한 해석을 선보인 작품으로는 고일권의 〈칼부림〉(2013~), 쿠르의 〈카라반〉(2022~)을 들 수 있다. 〈칼부림〉은 이괄의 난부터 병자호란의 시기를 다루고, 〈카라반〉은 고구려말 서역으로 떠난 고구려인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개인의 경험을 보편적 역사 경험과 접목시키는 만화도 있다. 정용연의 〈정가네 소사〉(2012)는 개인사를 만화로 그려낸 역작이다. 홀로코스트라는 인류 최대의 비극을 개인사를 통해서 풀어낸 아트 슈피겔만의 〈쥐〉(1992)도 개인사를 그려낸 걸작이다.
실존 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우진 않지만 역사 배경을 탄탄하게 두고 있는 작품들도 정통 역사 만화의 영역에 넣을 수 있을 것이다. 이케다 리요코의 〈베르사이유의 장미〉(1972~1973), 야스히코 요시카즈의 〈왕도의 개〉(1998~2000)처럼 격변의 역사를 다루면서 주인공은 만화가가 창작한 캐릭터로 만든 경우들이 있다. 고우영의 〈일지매〉(1975)도 이 부류에 속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일지매〉의 경우 다소 애매하게 말한 것은 〈일지매〉는 역사적인 배경이 결말부에서 확실하게 드러나지만 앞부분의 전개에서는 다소 모호하게 보이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의적 일지매라는 캐릭터 자체가 원래 중국 설화에서 건너온 존재이기도 하고, 전반부의 내용은 마치 홍길동과 같은 의적이 부정부패한 관리를 징치하는데 좀더 초점이 맞는 것으로 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시대 배경이 꼭 인조 연간이 아니어도 상관이 없을 전개가 된다는 것은 그만큼 역사적 장치가 중요하지 않다는 뜻도 된다.
▲ 〈임꺽정〉 ⓒ 고우영 ▲▲ 〈임꺽정〉 ⓒ 이두호
역사를 단지 배경으로 존재하는 정도로도 충분하게 되면 가상 역사 만화가 만들어지게 된다. 가상 역사 만화는 어떤 시대를 상정하지만 실존했던 인물은 등장하지 않아도 된다. 방학기의 〈다모〉(1995)와 같은 작품을 들 수 있다. 조선 후 기를 배경으로 하지만 실존하는 인물은 나오지 않는다. 가상 역사 만화는 가상 이지만 역사적인 틀, 즉 현실적인 면을 벗어나지는 않는데 아예 현실적인 틀을 벗어나면서 역사를 이용하는 창작물도 있다. 강철수의 〈팔불출〉(1980) 같은 만화 는 조선 후기를 배경으로 하지만 숱한 현실 비판과 말장난을 통해서 계속 경계를 무너뜨리고 있다. 이렇게 경계를 무너뜨리는 것은 만화가 가진 특성 중 하나다.
또한 단순히 경계를 무너뜨리는 것 이상으로, 판타지를 적극적으로 도입하는 만화도 있다. 신동우가 그린 판타지 역사 만화 〈풍운아 홍길동〉(1965~1969) 이 이런 만화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주인공 홍길동은 《홍길동전》이라는 소설에 등장하는 캐릭터지만 차돌바위, 곱단이, 호피, 백운도사, 골반대사 등은 신동우가 만든 오리지널 캐릭터이다. 물론 이때 단지 시대만 과거일 뿐 실제 역사에 대해선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작품들도 모두 역사 만화라고 할 수 있는가, 그것은 다른 장르라고 해야 하지 않는가라는 의문은 타당하다. 작품 안에 어떤 역사의식이 들어있는가에 따라 분류해야 할 것이다.
▲ 〈킹덤〉 ⓒ 하라 야스히사 ▲▲ 〈바람의 나라〉 ⓒ 김진.
실존 역사를 배경으로 하고 그 전개를 따라가지만 판타지성을 듬뿍 넣은 만화도 만화만이 가질 수 있는 매력적인 창작물이라 할 수 있다. 하라 야스히사의 〈킹덤〉(2006~)은 진나라의 장수 이신이라는 실존인물을 주인공으로 삼고, 진시황의 육국 정복기를 다루고 있지만 그 구체적인 장면에서는 초인적인 무술이 나오는 등 판타지 역시 등장한다. 김진의 〈바람의 나라〉(1992~)도 고구려의 대무신왕 시기를 다루는데 역사와 더불어 판타지 요소 역시 많이 들어있다.
대체 역사 만화
루카치는 역사 소설도 일반 소설과 다를 게 없으며 그 자체가 어떤 장르를 형성하거나 그 자체의 하부 장르를 형성하지도 않는다고 말한 바 있다. 하지만 루카치가 이런 이야기를 한 것은 장르가 아직 덜 발전한 1930년대였다.
1962년에 필립 K 딕은 《높은 성의 사내》라는 소설을 발표했다. 나치 독일이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승리하여 미국이 독일과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는 가정을 하고 쓴 소설로 대체 역사 소설의 개막을 알린 작품이었다.
현대인이 과거로 가서 활약하는 내용을 다룬 타임슬립물로 마크 트웨인(1835~1910)의 《아서 왕 궁정의 코네티컷 양키》(1889)을 대체 역사물로 보는 관점도 있지만 이는 타임슬립 역사물로 따로 분류하는 것이 맞다고 본다. 이런 류의 만화로 가장 유명한 것은 일본 만화 〈왕가의 문장〉(1976~)일 것이다. 현대의 미국 여인이 3천 년 전의 이집트로 타임슬립하는 내용으로 우리나라에서는 〈나일 강의 소녀〉라는 이름으로 해적판이 나온 바 있다. 타임슬립 역사물은 대 개 현대인이 과거 역사 속으로 들어가 활약하는 내용을 담는다. 그 결과에 따 라서 역사가 변하기도 하기 때문에 대체 역사물로 볼 수 있는 가능성이 아주 없 지는 않다. 하지만 모든 타임슬립물이 대체 역사로 흐르지는 않는다. 아직까지 도 완결이 되지 않은 〈왕가의 문장〉도 역사 흐름 자체는 실제 역사와 동일하다.
▲ 〈왕가의 문장〉 ⓒ 호소카와 치에코, 호소카와 후민 ▲▲ 〈궁〉 ⓒ 박소희
대체 역사 만화로 가장 유명한 작품은 드라마로도 만들어져 히트를 한 박소희의 〈궁〉(2002~2011)일 것이다. 대한제국이 멸망하지 않고 쭉 계속되는 상황을 다룬 만화로 이후 이와 같은 설정을 가진 만화들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역사를 만화에서 다루는 방법은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다양하다. 딱 어떤 분류에 맞는다고 하기 어려운 작품들도 많다. 역사를 단지 배경으로만 이용하든, 역사 그 자체를 소개하는 만화를 그리든 그 안에는 역사를 통해 이야기 하고 싶어하는 정신이 있게 마련이다.
루카치는 《역사 소설론》(1937)에서 “역사 소설이란 역사적 사건을 다시 기술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참여한 사람들의 모습을 예술적 수단으로 재현한 것”이라고 했다. 루카치는 소설에 한정해서 발언하긴 했지만 사실 저 말은 역사 창 작물 모두에 적용할 수 있는데 이것이 바로 만화가의 역사 해석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