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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 속에 은폐된 여성 이야기 - 〈카산드라〉와 〈로어 올림푸스〉

<지금, 만화> 제21호(2024. 1. 10. 발행) ‘Critique’에 수록된 기사입니다.

2024-07-20 백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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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 속에 은폐된 여성 이야기

- 카산드라로어 올림푸스

  신화(神話, myth)는 매혹적이다. 특히 그 리스 신화는 서양의 것임에도 불구하고, 종교와 학문의 영역을 넘어 그 자체로 재미있다. 흔히 신화의 신()들은 종교적 의미에서 신성시되지만, 그리스 신화의 신들은 그 인간적인 면모 때문인지 더 매혹적이다. 그래서인지 그리스 신화는 시대와 국가를 초월해 다양하게 재해석되고 소재로 활용된다. 또한, 신화는 이야기(story)의 원형이기도 하다.

  근현대의 수많은 이야기는 많은 부분, 그 뿌리를 신화에 빚지고 있다. 카산드라로어 올림푸스는 그리스 신화를 소재로 하면서, 신화 속 여성을 새롭게 재해석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지는 웹툰이다. 하나는 신화 속 여신의 성장을 그리고 있다면, 하나는 남성 중심의 세계에 끊임없이 저항하는 두 여성의 이야기를 그린다.

페르세포네의 성장과 사랑: 로어 올림푸스

  “엄마의 과잉보호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10대 소녀는 20살이 되어 대학에 진학하면서 드디어 독립하게 된다. 하지만 기대도 잠시. 순진한 소녀는 강간당해 큰 상처를 입게 되고, 그런 그녀에게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학대당해 상처뿐인 한 남성이 다가온다. 서로 첫눈에 반한 두 남녀는 운명적인 사랑에 빠진다.”

 

▲ 〈로어 올림푸스〉 ⓒ 레이첼 스마이스

  이 이야기는 바로 페르세포네와 하데스를 소재로 한 로어 올림푸스의 줄 거리이다. 그런데 우리가 알고 있던 페르세포네와 하데스신화와는 사뭇 다르다. “에로스의 화살에 맞은 하데스가 페르세포네에게 첫눈에 반해 그녀를 납치해 지하 세계인 명계로 데려가고, 딸을 잃은 데메테르가 딸을 찾느라 곡식이 메 말라가자, 제우스의 중재로 페르세포네를 데메테르에게 돌려준다. 하지만, 페르세포네는 하데스가 준 지하 열매인 석류를 먹는 바람에 일 년의 반은 명계에, 일 년의 반은 지상에 머물게 된다.” 이것이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페르세포네와 하데스신화인데, 역시 뭔가 많이 다르다.

  페르세포네는 하데스에게 납치당한 비련의 여주인공도 아니고, 하데스는 명계의 왕인 것을 이용해 페르세포네를 납치한 납치범도 아니다. 페르세포네는 엄마 품에서 벗어나 자유를 갈망하는 소녀이며, 하데스는 어린 시절 상처로 자신을 고립시킨 상처투성이 남자일 뿐이다.

 

▲ 〈로어 올림푸스〉 ⓒ 레이첼 스마이스

  물론, 로어 올림푸스의 신들은 우리가 알고 있는 그 그리스 신들이 맞다. 그들은 인간 세계를 지배할 초월적 능력을 지닌 불멸 적 존재이며, 필요하면 인간 세계에 현 신하기도 하고, 허벅지로 자식을 낳기도 한다. 하지만, 로어 올림푸스의 신들은 우리가 알고 있던 그리스 신들과 살짝 다르다.

  질투의 화신으로만 그려지던 헤라는 정()도 많고, 헌신적이며, 상처를 간직한 결혼의 여신이며, 태양신 아폴론은 극단적인 자기애와 삐뚤어진 연애관을 가지고 있는 신으로 묘사된다.

  이러한 색다름은 작가 레이첼 스마이스(Rachel Smythe)가 캐릭터에 서사 와 주체성을 부여했기 때문이다. 사실 그리스 신화는 매우 분절적이고 파편적이다. 한 신화에도 다양한 줄거리와 해석이 존재하다 보니, 앞뒤가 맞지 않는 때도 종종 있다. 이러한 그리스 신화에 레이첼 스마이스는 캐릭터에 서사와 주체성을 부여함으로써,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신들을 완성해 낸다.

 

▲ 〈로어 올림푸스〉 ⓒ 레이첼 스마이스

  데메테르는 비밀을 지닌 페르세포네를 지키기 위해 과잉보호하고, 그 때문에 페르세포네는 더욱 자유를 갈망한다. 자유에 대한 갈망은 성장통으로 이어진다. 올림푸스에 있는 대학에 진학하면서 처음 독립하게 된 페르세포네는 과잉보호로 인한 순진함 때문에 강간당하고 만다. 이 사건은 페르세포네를 내면을 파괴하지만, 친구들(헤라, 에로스 등)과 하데스의 다정함과 배려로 치유되어 나간다. 또한, 페르세포네의 성장을 막는 것은 어머니에 대한 사랑이다. 페르세포네는 엄마를 깊이 사랑했기에, 그 기대에 부응하고자 하는 마음과 자유로워지고 싶은 마음 사이에서 고뇌한다. 결국, 페르세포네는 크로노스에게 잠식된 하데스를 구하기 위해 스스로 석류를 먹고, 잠재되어 있던 능력을 각성함으로써 소녀에서 당당한 여신으로 거듭난다. 하데스와의 사랑은 단순한 남녀의 사랑을 넘어, 페르세포네가 자기 내면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성장시키는 촉 매제로 기능하는 것이다.

  〈로어 올림푸스속 페르세포네와 하데스의 사랑은 타인을 통해 자신을 발견하고 성장해 나가는 낭만적 사랑에 가깝다. 앤서니 기든스는 현대사회의 성, 사랑, 에로티시즘 : 친밀성의 구조변동에서 열정적 사랑과 구분되는 낭만적 사랑에 대해 논하면서, 낭만적 사랑은 여성이 타자와의 친밀한 관계를 통해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이라고 논했다. 여성에게 있어 타자는 나와 구분되는 반대적 존재가 아니며, 나는 타자와의 정서적 교류를 통해 규정되고, 친밀한 관계를 통해 나는 성장해 나간다. 로어 올림푸스의 페르세포네와 하데스는 서로 첫눈에 반하는 열정적 사랑으로 시작하나, 친밀한 관계를 통해 서로의 상처를 끌어안으며 성장해 나간다. 그러기에 페르세포네는 하데스와 함께 있을 때, 비로소 진정 한 나로 존재할 수 있다. 결국 로어 올림푸스는 어머니에게서 독립하지 못한 미성숙한 소녀 페르세포네가 하데스를 만나 자기 내면 속 고통을 이겨내고, 진정한 자신을 발견하며, 서로의 관계를 통해 성장해 가는, 페르세포네의 성장통을 담은 이야기라 할 수 있다.

 

▲ 〈로어 올림푸스〉 ⓒ 레이첼 스마이스

  한편, 로어 올림푸스의 색다름은 현재성에서 나온다. 세상에서 가장 많이 알려진, 그러나 가장 난폭한 신화 속 사랑 이야기 페르세포네와 하데스를 소재로 하지만, 작가는 그 공간인 신들의 세계를 고대가 아닌 현대로 설정함으로써, 현재를 살아가는 독자들과 호흡을 같이한다. 로어 올림푸스속 신들의 세계는 고층 빌딩 사이로 자동차가 지나다 너고, 정장과 티셔츠, 원피스를 입고 파티에 가거나 출근을 하는 세계이다. 스마트폰으로 연락을 주고받고, 줌으로 화상 회의를 하기도 하며, 신들은 자기 역할을 위해 주식회사를 경영하기도 한다. 컴퓨터 시스템을 이용해 망자를 관리하기도 하고, AI로 만들어진 매니저가 등장하기도 한다.

  이처럼 현대화된 신들의 세계는 현대를 살아가는 독자에게 친밀감을 줌과 동시에, 현장성과 현재성을 부여한다. 독자들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신들의 모습을 통해, 이 이야기가 수 천 년 전의 과거 이야기가 아니라, 현재에도 일어나고 있는 이야기라고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 페르세포네가 각성하여 크로노스에게 서 하데스를 구하는 구조는 왕자가 공주를 구하는 이야기가 아닌, ‘공주가 왕자를 구하는 이야기로 변형되며, 현대적 의미의 주체적 여성의 현재성을 더한다.

남성 중심의 세계에 끊임없이 저항하는 두 여성의 이야기: 카산드라

  여기 지성을 갈구했다는 이유로, 그리고 너무도 아름답다는 이유로 자신이 속한 세계로부터 유린당하고, 끊임없이 저항하는 두 여인이 있다. 바로 이하진 작가의 카산드라속 카산드라와 헬레나이다. 그리스 신화 속 카산드라는 아폴론의 사랑을 받아 예언 능력을 부여받지만, 그의 사랑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아무도 그 말을 믿어주지 않은 저주에 걸린 신녀이다. ‘헬레나는 트로이 전쟁을 일으킨 원인으로 알려진 스파르타 공주이다. 그리스 신화 황금 사과에서 아프로디테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신으로 자신을 선택한 트로이 왕자 파리스에게 약속대로 스파르타의 왕 메넬라오스의 아름다운 아내 헬레나를 내어 주고, 파리스는 헬레나를 납치해 와 그리스와 트로이 간의 전쟁이 발발한다.

  이 전쟁은 일리아드라는 대서사시로 남아있는데, 헥토르, 오디세우스, 아킬레우스 등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남성 영웅들의 영웅담을 다룬다. 웹툰 카산드라는 원전 일리아드에는 없는, 남성들의 전쟁으로부터 소외된 여성들- 카산드라와 헬레나를 주인공으로 한, 허구의 이야기를 다룬다.

 

▲ 〈카산드라〉 ⓒ 이하진

  웹툰 카산드라속 신화는 여론을 선동하거나 교란하는 정치적 도구에 불과 하며, 진실을 왜곡하는 허구로 그려진다. 카산드라가 아폴론의 사랑을 받아 예언 능력을 얻었지만, 그 사랑을 거절해 아무도 믿지 않는 예언자가 된다는 신화는 카산드라가 오빠들의 왕권 강화를 위해 스스로 미친 예언자가 되기 위한 계책으로 나온다. 카산드라의 신묘한 예언 능력은 신탁이 아니라, 방대한 정보 수집과 치밀한 분석을 통한 미래 예측일 뿐이다. 헬 레나의 황금 사과신화는 파리스가 남의 나라 여왕을 납치해 와 전쟁을 일으켰다는 비난을 피하고자 헬레나가 지어난 가짜 소문, 신화에 불과하다. 군중 들은 신탁이라는 미명하에 진실을 외면하고, 부조리한 현실을 자연스레 받아들이게 된다. 카산드라와 헬레나는 이러한 신화의 속성을 매우 잘 알기에,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한다.

  웹툰 카산드라속 트로이 전쟁은 겉으로는 남자 영웅들의 전쟁처럼 보이지만, 그 뒤에서 전략을 짜고 남성들을 좌지우지하는 카산드라와 헬레나가 있다. 물론 천재 지략가로 오디세우스가 등장하지만, 헬레나에게 의존하는 양상을 보인다.

  그렇다면, 천재적인 지략가인 카산드라와 헬레나가 신화를 이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당시 그리스 사회가 여성의 정치 참여를 막는 남성 중심의 사회였기 때문이다. 이 시대의 여성은 아름답게 치장하여 다른 나라 왕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정략결혼을 하거나, 남편을 영웅으로 만들어 자국에 도움을 주거나, 아들을 많이 낳아 대를 이어가는 것이 미덕인 사회이다. 여성이 공부를 하거나 검을 드는 것은 아마존의 여전사들처럼 괴물일 뿐인, 혐오의 대상이 된다. 이런 남성 중심의 사회에 카산드라와 헬레나는 안티테제(antithese, 反定立)적 존재이다. 어려서부터 치장하는 것보다 공부와 무예를 좋아했던 카산드라는 전쟁을 막기 위해 뛰어난 전략과 전술을 내놓지만, 여자라는 이유로 회의에 들어갈 수조차 없다. 카산드라의 전략은 늘 맞지만, 여성이기 때 문에 맞아서는 안 된다. 그것은 여자인 카산드라를 인정하는 것이고, 이는 남성들의 무능력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카산드라는 신탁이라는 예언을 이용한다. 신의 말이라고 하면, 여성이 아니어도 사람들이 들어주니까.

  이처럼 카산드라의 진짜 적은 그리스가 아니라, 여성의 정치 참여를 막는 남성 중심의 사회이다. 한편, 헬레나는 아름다운 외모 때문에 어려서부터 왕인 아버지와 오빠들에게 강간당해 자살을 시도하지만, 아름다움이 곧 권력임을 깨닫고, 자신의 외모를 이용해 자신을 유린했던 남성 사회를 파괴하고 복수하고자 하는 인물이다.

  헬레나는 카산드라만큼 뛰어난 두뇌를 가졌지만, 언제나 외모로만 평가받는다. 그러기에 헬 레나는 자신의 아름다운 외모만을 보고 충성을 맹세하는 남자 영웅들을 이용하여 전쟁을 일으킨다. 일면 헬레나가 아름다운 외모로 남자들을 유혹하여 그들을 좌지우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헬레나가 이용하는 것은 자신의 외모가 아니라 남성들의 욕망이다. 헬레나는 영웅이 되고자 하는 남성들의 욕망을 이용하여 그들을 전쟁의 장기 말로 이용한다. 그러기에 원전의 헬레나는 남자가 구해주기를 기다리는 비련의 왕녀, 즉 전쟁의 트로피에 불과하지만, 웹툰 카산드라에서의 헬레나는 남성들의 트로피를 거부하는 여성이다.

  결국, 웹툰 카산드라는 겉으로는 일리아드를 각색한 남성 영웅담처럼 보이지만, 그 속은 남성 사회로부터 거부당하거나 유린당한 두 여성, 카산드라와 헬레나가 끊임없이 저항하는 이야기인 것이다.

 

▲ 〈카산드라〉 ⓒ 이하진

  한편, 웹툰 카산드라80~90년대 한국 순정만화의 정서가 느껴지는 작품이기도 하다. 카산드라속 여성 캐릭터는 김혜린의 불의 검을 많이 닮아있다. 트로이의 영웅이자 카산드라의 오빠인 헥토르 왕자의 갑작스러운 죽음 후, 트로이 전체가 충격에 빠져 패닉에 빠져 있을 때, 카산드라는 울면서도 모두를 지키기 위해 신탁을 내린다.(59) 절망의 순간에 울면서도 자신의 일을 묵묵히 해나가는 아이 카산드라. 이 모습은 불의 검아라를 연상시킨다. 불의 검의 아라는 강에 떠내려온 아사를 구하고 기억을 잃은 그와 사랑에 빠지지만, 카르마키의 야장 귀족 수하이 바토르에게 납치되어 강간당하고 첩이 되고 만다. 하지만 아라는 그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아사를 위해 수하이에게 철검을 만드는 방법을 배워 나간다.

  남성들에게 유린당하여 복수를 꿈꾸는 헬레나는 불의 검의 대표적인 악녀 카라와 닮아있다. 카르마키 족의 신녀인 카라는 어릴 적 오빠에게 성폭행당한 후,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유린당하며 남성들을 깊이 혐오한다는 점, 상처 입은 여인들을 거두고, 창녀들에게 관대하다는 점에서 헬레나와 닮아있다. 이처럼 로어 올림푸스가 성적 표현이나 그림체가 서양 문화를 기반으로 한다 면, 카산드라는 주체적 여성을 그린다는 점에서 1980~90년 한국 순정만화 의 정서를 잇는 작품이라 할 것이다.

  롤랑바르트에게 신화는 권력관계에 의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에게 당연히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신화는 역사적 동기를 은폐하고, 그것이 전달하는 의미를 일반적인 상식으로 통용시킨다. 로어 올림푸 스카산드라는 신화 속에 은폐된 여성의 이야기를 다룬다. 로어 올림푸스카산드라는 주체적인 여성상이 나온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지만, 로어 올림푸스는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 성장해 나가는 여성의 성장통을, 카산드라는 남성 중심의 사회에 끊임없이 저항하는 두 여성의 이야기를 다룬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시대가 변해도 신화가 계속해서 호출되는 이유는 신들의 이야기 속에 인간의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다. 여기 신화 속에 감춰졌던 여성의 이야기가 있다. 바로 로어 올림푸스카산드라.

필진이미지

백은지

서원대학교 웹툰콘텐츠학과 교수
만화 비평가
만화 스토리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