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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 만화가 보여주는 현대 사회 - 〈만화로 보는 좌파의 역사〉와 〈파시즘 대 안티파〉 읽기

<지금, 만화> 제21호(2024. 1. 10. 발행) ‘Critique’에 수록된 기사입니다.

2024-07-20 김태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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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 만화가 보여주는 현대 사회

- 만화로 보는 좌파의 역사파시즘 대 안티파읽기

  만화란 무엇인가? 만화의 정의란? 좋은 질문이 아닐 수도 있다. 만화를 정의하려는 시도가 옛날부터 많았으나, 좋은 결과를 얻지 못했으니까.

  사연은 이렇다. 무언가를 정의하려는 시도가 비트겐슈타인 이후에는 인기가 없다. 정의 대신 몇 가지 눈에 띄는 특징을 살펴보는 것이 추세다. 만화라 불 리는 작품들의 특징을 여러 가지 꼽고, 이 가운데 몇 가지를 공유하는 시각 언어 작품을 느슨하게 만화라고 부르면 어떨까 싶다. 요즘 즐겨 사용되는 방법이다.

  그러니 이렇게 고쳐 묻는다. 만화란 어떠한 것인가? 만화의 특징은?

  이 질문에 답하며, 나는 또한 평소의 내 주장을 입증하고 싶다.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만화야말로 지식 전달에 유용한 매체라는 것이 나의 지론이다. 내가 만화를 그리는 것도 그래서다.

  만화의 첫째 특징은 글과 그림의 결합이다. 만화라고 할 때 사람들이 제일 먼 저 떠올리는 것은 '말풍선'이다. 말풍선은 어디에 붙여도 괜찮다. 사람이 아니어도 상관없다. 동물이어도 좋고 사물이어도 좋다. 말풍선을 통해 만화는 모든 사람과 사물에게 발언권을 준다. 모두를 발언의 주체로 호명한다.

 

▲ 〈만화로 보는 좌파의 역사〉 Ⓒ 장 이브 르 나우르, 마르코

  신에게도 말을 시킨다. 만화로 보는 좌파의 역사, 그 첫머리는 인상적이다. 아버지 하느님은 우파로, 아들 예수는 좌파로 등장한다. 여러 독자들이 이 첫머리에 감탄했다. 그런데 만화가 아니라 글로 썼다면, 이런 눈길 끄는 장면이 나왔을까? 다양한 신학적 입장을 두고 머리 아픈 입씨름이 벌어졌을 터이다. 하지만 이 책은 만화다. 말풍선 몇 개로 숱한 논쟁을 건너뛴다. 말풍선을 보며 독자는 양해 한다.

  내용을 따지고 들면 끝이 없다. 그리스도교 구약성서의 신을 우파라고 간단히 이야기하는 것에 나는 선뜻 찬성하기 어렵다. 성서의 가장 급진적인 구절들 은 구약성서의 예언서에 나오기 때문이다. “그 시끄러운 (찬송가) 노랫소리를 집어치워라. 거문고 가락도 귀찮다. 다만 정의를 강물처럼 흐르게 하여라. 서로 위하는 마음 개울같이 넘쳐흐르게 하여라(아모스 523~24)처럼 구약의 신은 예언자의 입을 빌려 좌파스러운 문구를 쏟아내지 않는가. 이렇게 보면 아버지 신 역시 우파가 아니라 좌파일 수도 있지 않은가.

 

▲ 〈만화로 보는 좌파의 역사〉 Ⓒ 장 이브 르 나우르, 마르코

  하지만 만화로 보는 좌파의 역사를 읽으면서는 이렇게 꼬치꼬치 따지지 않는다. 신이 우파스럽게 예수가 좌파스럽게 말하지만, 그 말하는 내용이 말풍선이라는 형식을 통해 제시하기 때문이다. 독자는 말풍선에 담긴 말을 읽으며 마음으로 에누리를 한다. 완전히 동의하지는 않더라도, 큰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다.

  〈파시즘 대 안티파에서도 말풍선이 등장한다. “반격해야 해!” “당은 충돌을 원하지 않아!” 파시스트에게 습격당해 부상을 입은 이탈리아 사회당원들의 대화다. 그런데 누가 저 말을 했나? 정말 저렇게 똑같이 말한 사람이 있을까? 있다면 언제 어디서였을까? 글로 쓰면 짚고 넘어갈 일이 무척이나 많다. 그런데 두 사람의 대화가 말풍선에 담기면, 독자는 양해를 한다.

 

▲ 〈파시즘 대 안티파〉 Ⓒ 고드 힐

  역사 지식 만화의 말풍선 속 대사는, 역사의 팩트도 아니지만 순수한 상상의 픽션도 아니다. 말풍선 속 문장은 진실과 허구 사이 어느 회색지대에 머문다. 어쩌면 잘 쓴 리얼리즘 소설의 문장과 같다. 그런데 리얼리즘 소설을 잘 쓰기란 무척 어렵다. 반면 만화는 말풍선을 두르는 것만으로도 이 어려운 일을 해낸다. 만화의 힘이다.

  만화의 둘째 특징은 익살스러운 과장된 그림이다. 과장된 그림, 익살스러운 그림, 일부러 못 그린 그림 따위는 옛날부터 권력자를 비꼬는 좋은 수단이었다. 사람 얼굴을 동물 생김으로 그리는 일도 마찬가지다. 샹플뢰리가 쓴 풍자 미술의 역사에는 로마 시절에 만든, 쥐머리를 한 정치인의 조각이 실려 있다.

 

▲ 〈파시즘 대 안티파〉 Ⓒ 고드 힐

  만화 파시즘 대 안티파는 그림이 독특하다. 공들여 그린 그림인데 어딘지 묘하게 비례가 뒤틀려 있다. 히틀러니 무솔리니니 젠체하는 권력자의 모습이 이렇게 그려져 있으니 오히려 이 들이 초라해 보인다. 나는 20세기 전반의 독일 신즉물주의 회화를 떠올린다. 오토 딕스니 조지 그로츠 같은 사람의 그림 말이다. 신즉물주의 회화는 독일의 보 수적인 기득권층의 얼굴을 이런 방식으로 그리곤 했다. 그래서 히틀러의 미움을 샀다(조지 그로츠는 원래 독일 사람 게오르크 그로츠였는데, 나치의 탄압을 피해 미국으로 건너간 후 조지 그로츠가 됐다)파시즘 대 안티파에 나오는 권력자들의 모습은 우스꽝스럽다.

 

▲ 〈푸틴의 러시아〉 ⓒ 대릴 커닝엄

  한편 나는 푸틴의 러시아라는 지식 만화를 생각한다. 여기도 푸틴과 러시아 권력자들의 얼굴이 공들였지만 일그러진 그림으로 나온다. 근엄한 척하는 푸틴이 사실은 싸구려 정치배라는 인상을 독자에게 준다. 또 나는 중동, 만들어진 역사라는 책을 생각한다. 다비드 베의 그림은 정말 뛰어나다. 그림 한 컷 한 컷을 뽑아 포스터로 쓰고 싶을 정도다. 그런데 이 만화에 등장하는 미국과 중동의 정치 지도자들은 살아있지 않은 나무 인형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 그래서 책을 읽으며 독자는, 중동 평화를 해치는 정치 지도자들에게 심리적 거리를 유지한다.

 

▲ 〈중동, 만들어진 역사〉 ⓒ 장피에르 필리유, 다비드 베

  〈만화로 보는 좌파의 역사는 또 다르다. 사상가와 정치인을 못생긴 얼굴로 그리지 않는다. 반대로 무척 귀엽게 캐리커처 한다.

  예수와 마르크스의 모습은 특히 정감이 간다. 사회주의에 영향을 미친 사상가의 모습이 퍽 귀엽다. 그 덕에 예수와 마르크스가 (말풍선으로) 논쟁을 벌여도 지나치게 심각하지 않고, 작가가 이들의 사상적 한계를 비판할 때도 정색을 하거나 핏대를 세우지 않아도 된다.

  우파면서 좌파 정책을 편 드골과 좌파면서 우파 정책에 기울었던 미테랑의 얼굴 묘사가 눈길을 끈다. 달필의 캐리커처로 묘사된 드골의 엄청나게 큰 코와 미테랑의 능청맞은 입 모양은 보기만 해도 웃음이 터진다. 드골과 미테랑이 나쁜 사람으로 나오지 않는다. 그렇다고 근엄한 지도자도 아니다. 독자는 이들에게 심리적 거리를 유지한다. “말이야 어쨌건 이 양반들도 결국 정치꾼이었구나라고 생각을 한다. (나 개인적으로는 중간에 한 번 등장하는 흐루쇼프의 캐리커처가 제일 마음에 들었다. 마치 미국 애니메이션 <루니 툰>에 나오는 우스꽝스러운 캐릭터 같은 얼굴이다.)

  요컨대 역사 지식 만화에서 익살스러운 그림의 효과는 두 가지다.

  하나는 독자가 이 사람을 비웃게 만든다. 역사 인물이나 정치인을 숭배 대상으로 추켜 올리는 신화화에서 벗어나게 한다. 그러나 이것은 정치 선전 만화도 사용하는 방식이다. 어떤 인물을 필요 이상으로 비난할 수도 있는데, 이런 기능은 경계하는 것이 좋겠다. 양날의 칼이랄까.

  효과 또 하나는 독자가 적정한 심리적 거리를 유지하게 만드는 거다. 이를 통하여 만화를 더 이지적인 장르로 만들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생각한다. 한국에서는 예컨대 굽시니스트 작가가 이런 만화를 잘 그리는 것 같다. 역사 인물도 시사 인물도 나무 인형과 같은 모습으로 거리를 유지하게 그려 놓았다.

  만화의 세 번째 특징은 연속 예술(시퀀셜 아트)이다. 만화는 컷과 컷이 연결된 시각 예술이라는 거다.

  윌 아이스너나 스콧 맥클루드는 연속 예술을 만화의 정의로 삼기도 한다. 다 만 우리는 만화라고 할 때 한 컷 만화도 포함시키거니와 연속 예술에는 한 컷 만화나 만화적 그림 등은 포함되지 않는다. 연속 예술의 관점으로 보면 '만화의 전사(前史)'가 퍽 좁아진다는 문제도 있다. 만화의 정의로 삼기에는 아쉽다고 나는 생각 한다. 그래서 만화의 특징으로 언급한 것이다. 스콧 맥클루드는 만화로 그린 책 만화의 이해에서, 컷과 컷의 연결을 다섯 가지 유형으로 나누었다. 나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누고 싶다.

하나는 서사가 뚜렷한 연결이다. 역사 지식 만화 가운데서는 불멸의 역작 고우영 삼국지가 이 연결을 많이 사용했다(나는 고우영 삼국지를 보고 김태권의 십자군 이야기를 그렸다). 올해 한국에 번역 소개된 미즈키 시게루의 히틀러 전기역시 이 연결을 주로 사용하고 있다.

  또 하나는 단절된 연결이다(스콧 맥클루드가 특별히 주목했던 연결 유형이다). 논리나 시간에 따라 전개되는 것이 아니라, 별개의 의미를 가진 각각의 컷이다. 굳이 영화와 비교한다면, 앞의 서사가 뚜렷한 연결은 극영화에서 자주 사용하는 편집 논리라 할 것이다. 뒤의 단절된 연결은 다큐멘터리 영화와 비슷하지 않을까.

  〈만화로 보는 좌파의 역사는 단절된 연결을 자주 사용했고 가끔씩 서사가 뚜렷한 연결을 사용했다. 내용이 압축적이라 그러할 것이다. 파시즘 대 안티파에서는 단절된 연결이 더 많이 쓰였고 서사가 뚜렷한 연결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이 두 만화는, 극영화라기보다 잘 만든 다큐멘터리 영화를 연상시킨다. 컷과 컷의 연결이 해설 지문(내레이션)에 크게 의존한다. 이 역시 다큐멘터리 영화와 닮았다.

  이상의 특징을 염두에 두고, 두 권의 역사 지식 만화 만화로 보는 좌파의 역사파시즘 대 안티파의 내용을 살펴보자. 두 책의 주제는 오늘날 한국 사회에 사는 우리에게도 중요한 문제니까.

  좌파의 역사건 파시즘과 안티파의 역사건, 중간에 역사가 한번 크게 변하는 지점이 있다. 전환점이 있다. 만화로 보는 좌파의 역사는 주로 프랑스 좌파의 역사를 다룬다. 프랑스 만화책이라 그렇기도 하지만, 좌파와 관련한 여러 주요한 개념이 프랑스에서 나왔으니 당연한 일이기도 하겠다(예수와 마르크스가 프랑스 사람이 아니라는 점은 아이러니다).

  좌파의 역사에서 전환점은 무엇일까. 이 책에 따르면 드레퓌스 사건이다. “(드레퓌스 사건은) 세 가지 중요한 결과를 가져왔어요. 우선 지식인들이 정치에 참여한 것인데, 주로 좌파로 활동했죠. 이 사건 이후 우파들은 반지성적인 경향을 가지게 되죠. 그리고 이쪽이나 저쪽이나 정치적인 입장이 바뀝니다. 좌파에겐 정의가 가장 중요한 게 됐어요. 조국도 군대의 명예도 정의보다 중요하진 않습니다. 우파는 반대죠. 국가가 무엇보다 중요하죠. 그래서 원래 좌파의 가치였던 국가주의가 우파의 것이 됩니다.”

  〈파시즘 대 안티파에도 전환점이 등장한다. 파시즘이 탄생해서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날 때까지, 파시즘 대 안티파의 싸움은 총과 폭탄, 탱크와 비행기를 동원한 내전과 전쟁이었다. 오늘날 파시즘 대 안티파의 싸움은 길거리에서 편을 갈라 주먹질을 하는 싸움이다. 전환점을 책에서 굳이 강조하지는 않는다(작가의 주장에 따르면 오늘날의 길거리 싸움과 옛날 이탈리아와 스페인의 총격전이 안티파 정신이라는 점에서는 다르지 않다는 거다). 하지만 그림이 다르다. 책 앞부분에는 총과 탱크와 비행기가 여기저기를 펑펑 터뜨리는 반면, 책 뒷부분에는 스킨헤드끼리 주먹을 날린다.

  〈만화로 보는 좌파의 역사파시즘 대 안티파나 결국 같은 문제에 도달한다.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문제, 바로 현대사회 극우파와 좌파의 문제다. 만 화로 보는 좌파의 역사에서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 미테랑이 프랑스의 대통령이 된다. 좌파가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했다. “좌파는 굉장히 오랫동안, 이 순간을 기다려 왔습니다. 거의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미테랑 정부의 한계는 얼마 후 실망을 낳는다. “프랑스 좌파 진영에는 굉장한 기대감이 퍼져 있었습니다. 미테랑은 단순한 정권교체가 아니라 대안을 약속했으니까요. 그런데 미테랑은 제도적 대안을 제시할 것 같지 않습니다. (이 부분에 만화가는 우파 드골 장군의 옷을 입는 좌파 미테랑의 모습을 우스꽝스럽게 그렸다) 미테랑이 커다란 전환점을 마련하는 것은 (정치가 아니라) 경제적이고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측면에서입니다.” 좌파 정부는 진짜 사회 개혁이 아니라 그저 상징 투쟁에 몰두한다. 사람들은 실망한다.

 

▲ 〈만화로 보는 좌파의 역사〉 Ⓒ 장 이브 르 나우르, 마르코

  오늘날 한국 사회도 그렇다. 좌파건 우파건 기성 정치권은 상징 투쟁을 벌이 기만 한다. 정치에 실망하는 사람들이 늘어간다. 어떤 사람은 분노와 냉소에 빠지기도 한다. 이런 사람을 노리는 또 하나의 정치 세력이 파시즘이다. 만화책 파실 즈음 대 안티파는 독일과 영국과 이탈리아와 프랑스에서 오늘날 성장하는 우파 포퓰리즘(대안 우파)의 발전을 다룬다. 실망한 사람들 일부가 새로운 파시즘에 기운다는 이야기다. 여기 맞서기 위해 안티파도 더욱 많은 활동을 한다.

  정치 상실의 시대, 만화로 보는 좌파의 역사에 나오는 이 구절이 나의 마음에 꽂힌다. “정부를 구성하는 거대 정당들은 언제나 같은 결론에 도달합니다. 다른 정치는 불가능하다. 달리 말하면 포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날 맞닥뜨린 문제고, 이에 대해서 두 책이 모두 이야기를 한다.

  이렇게 하여 만화는 지식 전달의 좋은 매체일 뿐 아니라, 세상을 바꾸는 좋은 무기도 된다.

필진이미지

김태권

만화가
『김태권의 십자군 이야기』, 『김태권의 한나라 이야기』, 『불편한 미술관』, 『르네상스 미술 이야기: 피렌체 편』, 『살아생전 떠나는 지옥 관광』, 『에라스뮈스와 친구들』, 『코인묵시록』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