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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한다면 이들처럼 - 산호 〈그리고 마녀는 숲으로 갔다〉와 모쿠모쿠렌 〈히카루가 죽은 여름〉

<지금, 만화> 제21호(2024. 1. 10. 발행) ‘Essay’에 수록된 기사입니다.

2024-08-03 박소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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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한다면 이들처럼

- 산호 그리고 마녀는 숲으로 갔다와 모쿠모쿠렌 히카루가 죽은 여름

  그러니까 산호 작가의 그리고 마녀는 숲으로 갔다는 마녀들의 이야기다.

  “우리와 우리의 어머니들에게는 많은 이름이 있었다. 무당, 의원, 서낭. 그러나 어느 하나 우리를 정확히 짚어 부르는 것이 없었지.() 그리하여 우리는 언제나 마을 변두리의 이상한 여자들이었다. 그러니 비록 물 건너온 단어로 역사가 짧긴 하지만, 그나마 오늘날 우리를 하나의 종으로 대표할 만한 보편적인 이름을 꼽자면 아마도 마녀일 것이다.”

  이 이야기에 나오는 ‘K-마녀는 옛날 외국 동화에서 보던 뾰족한 모자를 쓰고 빗자루를 타고 다니며 이상한 약을 조제하고 여기저기 저주를 걸어대는 그런 마녀가 아니다. 이 마녀들은 별로 힘이 없다.

  “공기도 숲도 바다도 쇠락해 가는 지금이야 우리의 힘은 얄팍해졌고 너나 나나 싹을 좀 잘 틔우는 것 이상의 힘은 누리기 어렵게 되었지만, 어쨌든 우리는 여전히 보통의 범주에는 들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그녀들은 평범하게 생계를 유지하는 보통 여자들처럼 보인다. 기껏해야 슈퍼에서 산 감자에 싹을 틔우거나 날씨를 예보하는 정도의 가벼운초능력만 가지고 있다. 옛날 아주 먼 옛날, 호랑이가 담배 피던 시절에는 자연을 부리는 큰 힘을 가졌었다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옛날이야기일 뿐이다.

기후 위기 시대의 사랑 이야기 그리고 마녀는 숲으로 갔다

 

▲ 〈그리고 마녀는 숲으로 갔다〉 Ⓒ 산호

  기후가 망가지고 자연이 파괴되면서 마녀들도 약해진다. 식물의 마름병처럼 피부에 큰 종기가 생기며 죽어가는 정체불명의 불치병을 앓는다. 현 정부에서 마녀들은 2등 시민으로 취급된다. 평생 마녀들의 게토인 만신나루 구역에 머물러야 하고 6개월마다 거주 사실을 보고해야 하며 허가 없이는 만신나루를 떠날 수 없다. 나치의 유대인 차별 정책과 별 다를 바 없다.

  책을 열면 젊은 약사 산이 만신나루에서 홀로 살아가는 생활이 펼쳐진다. 이십 년 전 만신나루 개발에 맞서 투쟁했던 산과 초원의 어머니들은 죽어서 숲이 되었다. 겨우 열다섯 살 나이에 자신보다 어린 산을 보살피고 길러준 초원은 산의 가족이자 사랑하는 이다. 초원은 오 년 전에 죽은 엄마들처럼 개발에 맞서다가 소란을 삼키고 혼자 어디엔가 가라앉은 것처럼갑자기 사라진다. “여름이 끝나면 집으로 갈게란 편지를 마지막으로. 그러므로 산에게 여름은 영원히 끝나지 않는 계절이다. 초원이 돌아올 때까지.

산은 애타게 실종된 초원을 찾는다. 방송국에서 만신나루를 취재하러 온 기자 송주에게 초원을 찾는 걸 도우면 자신도 취재를 돕겠다고 한다. 초원에 대한 비밀을 숨기고 있는 장 소장, 초원의 흔적을 쫓는 산과 송주……. 다시 개발이 시작되는 만신나루의 모습을 보여주며 1권은 끝난다.

  내가 제주도에 살고 있어서 이 그래픽노블의 세계관에 더 깊이 공감했는지도 모르겠다. 녹색당원인 나는 기후 위기와 환경 파괴는 이 섬과 뗄래야 뗄 수 없는 문제임을 늘 피부로 실감하고 살고 있다. 해마다 기후가 바뀌고 있다. 가을 태풍이 늘었다. 청정의 섬 제주도는 제2공항 건설 및 비자림 숲 파괴 같은 다양한 난개발로 시름시름 앓고 있다. 최근 일본이 바다에 방류한 후쿠시마 오염수는 곧 해류를 타고 흘러 흘러 제주도에 제일 먼저 닿게 된다. 제주도에 살고 있는 엄마이자 여성으로서 그리고 마녀는 숲으로 갔다의 마녀들에게 깊이 공명했다. 나도 모르게 마녀에게 나를, 만신나루에 제주도를 대입하며 책장을 넘기면 넘길수록 점점 가슴이 먹먹해졌다.

지구를 감싸 안는 어머니-마녀결국 연대의 힘에 기대야

  결국 그리고 마녀는 숲으로 갔다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연대가 아닐까? 어머니-자연을 어머니-마녀로 치환한 이 책은 이 기후 위기라는 환난을 헤쳐 나가는 유일한 길은 연대뿐이라고 조용히 우리의 귓가에 속삭인다.

세상에는 산 것보다 살아남은 것들이 더 많아. 그러니 우리는 서로를 돌봐야 해.”

  초원의 말과 함께 이 책의 주제가 단순한 여성주의 혹은 환경주의를 넘어서 이 둘 모두를 말하는 에코페미니즘임이 드러난다. 파괴된 자연 속에서 살아남은 이(마녀)들은 서로를 돌봐야 한다. 어머니-마녀 같은 마음으로. 이런 존재가 마녀라면 나는 기꺼이 마녀가 되겠다. 지금까지 세상을 바꾼 여자들은 다락방의 미친 여자 혹은 마녀 혹은 둘 다였다. 버지니아 울프, 에밀리 브론테, 로자 룩셈 부르크를 보라. 메리 울스턴크래프(프랑켄슈타인을 쓴 메리 셸리의 어머니. 최초의 페미니스트로 여성의 권리 옹호를 썼다), 서프러제트(20세기 초 영국에서 참정권 운동을 벌인 여성들을 지칭하는 용어), 유관순, 가네코 후미코도.

  다양성이 더 많이 요구되는 한국 만화계에서 산호라는 걸출한 작가의 그리고 마녀는 숲으로 갔다이 이뤄낸 성취는 눈부시다. 2권의 행보가 기대된다. 이 책은 우리가 함께 숲으로 가야 하는 이유다.

호러와 BL의 결합 히카루가 죽은 여름

▲ 〈히카루가 죽은 여름〉 Ⓒ 모쿠모쿠렌

  “니 역시 히카루 아이제?”

  매미 소리가 요란한 한여름. 절친 사이인 요시키와 히카루는 동네 구멍가게 벤치에 앉아 나란히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다. 갑자기 요시키가 히카루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다.

  “?어째서?”

  히카루는 당황한 표정을 짓는다. 얼굴이 허물어지면서 피부 속으로부터 정체불명의 괴이한 것들이 스멀스멀 흘러나온다. 요시키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다.

완벽하게 모방했을 낀데…….”

  히카루는 흘러내리는 얼굴을 한 채로 요시키를 포옹하며 애절하게 애원한다.

  “부탁할게. 아무한테도 말하지마. 난생처음 사람으로 살고 있데이. 학교도 친구도 아이스크림도 전부 처음이라 즐거웠고. 몸도 인격도 빌린 거지만 니가 정말 좋다. 그러니까 제발. 니를 죽이고 싶지 않다.”

  설마 했던 일이 사실이라는 걸 확인하고 요시키는 경악과 슬픔에 눈물을 흘린다. 사무치는 마음을 꾹 참고 생각한다.

  ‘어차피 히카루는 이제 없다. 그렇다면 가짜라도 곁에 있었으면 좋겠다.’

  “알았다. 히카루. 잘 부탁하께.”

  〈히카루가 죽은 여름은 일반적인 호러물과 달리 BL 장르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물론 BL물 중에 호러색을 띤 작품은 많이 있다. 그런 BL 만화는 호러를 곁들임이나 분위기 전환 정도로 활용하는 경우가 많다. 반면 히카루가 죽은 여름는 호러 장르 안에서 인물 관계를 BL적으로 그려내고 있다는 면에서 신선하게 다가온다. 그래서 이 만화 안에서 주인공 두 소년의 관계는 매우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다. 히카루가 자신의 정체를 눈치 챈 요시키를 살려두는 이유는 요시키를 사랑하기 때문이며, 요시키가 괴이한 괴물인 히카루의 정체를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숨기는 이유는 가짜 히카루라도 자신의 곁에 계속 남아 있기를 바라서다. 두 소년은 서로를 사랑한다. 이 점이 이 만화를 신선하게 만든다. 호러와 소년애의 결합이라니.

  알고 보니 히카루는 집안 대대로 산지기를 하며 산 속의 괴이한 존재를 지켜왔던 가문의 아들이었다. 가문의 일을 돕는 도중에 산속에서 사고사를 당하고, 괴이한 존재가 인간이 되고 싶어 히카루의 몸을 취하게 된 것이다.

 

▲ 〈히카루가 죽은 여름〉 Ⓒ 모쿠모쿠렌

  위기는 곧 들이닥친다. 요시키는 우연히 길에서 낯선 아줌마를 마주치고 경고를 듣는다.

  “섞일 거다.”

  그 아줌마는 요시키가 사귀는 히 카루의 정체를 한눈에 꿰뚫어 보고 저쪽 것과 섞이면 안 된다고 조언한다. 마을 에 이상한 일이 생기기 시작한 것도 학생의 단짝이 된 이상한것 때문이라며 자신의 남편도 한 번 죽었다가 돌아온 적이 있었는데 그대로 두면 안 된다고 말한다.

  결국 고뇌하게 된 요시키는 교실에서 단 둘이 있을 때 화를 내며 히카루에 게 말한다.

  “목소리도 생긴 것도 말투도 히카루와 똑같지만 너는 히카루가 아니야!”

  “미안. 괴롭다. 내는 어카면 되는데? 알면서도 네가 좋은데 내는 어쩌란 말 이고!”

  히카루는 갑자기 분노로 폭주하며 정체를 드러내는데. 평범한 인간과 인간의 탈을 쓴 괴이한 존재. 순수하게 서로를 사랑하는 두 소년. 이들은 어떤 끝을 맞이하게 될까? 앞으로의 연재가 기대되는 흥미진진한 작품이다.

  〈그리고 마녀는 숲으로 갔다히카루가 죽은 여름은 다른 색채, 다른 장르 같지만 결국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바로 사랑에 대한 이야기다. 사랑한다 면 이들처럼 진실하라. 내겐 묵직한 울림을 주는 두 만화였다.

필진이미지

박소해

추리소설가
2021 《계간 미스터리》 신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