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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COF의 〈Singing BICOF 창작음악제〉에 부쳐

<지금, 만화> 제21호(2024. 1. 10. 발행) ‘Essay’에 수록된 기사입니다.

2024-08-03 박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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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COFSinging BICOF 창작음악제에 부쳐

  당신이 처음으로 좋아한 노래는 무엇인가? 아니, 좀 더 정확하게 고쳐 묻자면, 당신이 의식적으로 찾아 듣고 자발적으 로 따라 부르기를 원했던 첫 번째 노래는 무엇인가?

  여기서 당신의 대답을 들을 수는 없으므로 나의 경우를 말하자면 그건 마징가 Z의 주제가였다. 그리고 들장미 소녀 캔디, 은하철도 999, 미래소년 코난, 마루치와 아라치, 로보트 태권 V같은 만화영화의 주제가들이 차례로 그 뒤를 이었다. 미취학아동 시절부터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까지 나의 애청곡이자 애창곡이었던 노래들이다. 나와 비슷한 연배라면 누구나 그랬을 것이다. 그건 2000년대의 어느 시점 이후에 성장한 아이들이 뽀로로를 통해 동시 대의 보편적 경험을 공유하리라고 추측하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흥미로운 것은, 내가 그때 그 만화영화들의 줄거리나 에피소드를 더 이상 기억하지 못하게 된 지금도 거기 담긴 주제가들의 가사만큼은 토씨 하나 빠뜨리지 않고 줄줄이 읊어댈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나는 그것이 음악의 힘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오해는 마시라. 나는 지금 음악이 만화보다 임팩트가 강하다거나 생명력이 길다고 얘기하려는 것이 아니다. 예술 장르의 우열을 논하는 건 부질없는 짓이니까. 게다가 나는 만화 잡지의 지면에다 그딴 소리를 늘어놓을 만큼 무모한 대중음악 비평가도 아니다. 그런 이유때문에 원고가 까인다면 결국 내 손해니까.

  나는 만화영화와 주제가의 시너지가 얼마나 강력했는지 말하고 싶은 것이다. 요컨대 학교에서 권장하고 가르치는 동요보다 티비에서 흘러나오는 만화영화 주제가를 내가 훨씬 더 선호한 이유는, 간단히 말해서, 그것이 만화영화의 주제가였기 때문이다. 만화영화를 좋아했으므로 그 주제가까지 좋아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거기에 이 글의 핵심이 담겨있다. 만화와 음악의 시너지가 바로 그것이다.

  영화가 20세기 대중예술의 총아로 부상하게 된 요인 가운데 하나로 그것의 총체성을 꼽을 수 있다. 문학, 연극, 음악, 무용, 회화, 조형 등 당대 모든 예술 장르의 요소들을 통합한 종합예술의 속성 말이다. 보드빌이나 뮤지컬 극장의 막간을 채우는 볼거리 수준에 머물렀던 초기 무성영화는 혁신을 거듭하며 오늘에 이르렀는데, 기술과 예술의 양면에서 그것의 가장 중요한 전환점 가운데 하나가 사운드의 도입이라는 사실은 익히 알려진 바다. 그런 측면에서 최초의 장편 토키영화로 거론되는 재즈 싱어(1927) 속 인간의 육성이 등장하는 첫 장면이 노래를 부르는 모습이라는 사실이 시사하는 상징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모자람이 없다. 어린 시절 내가 경험한 만화영화와 주제가의 시너지가 그 연장선 상으로 부터 나타났음도 두말할 나위가 없다.

  같은 맥락에서 근자에 펼쳐졌던 한 이벤트는 주목할 만한 의미가 있다. 앞에 서 풀어놓은 장광설은 실상 그 이야기를 하기 위한 포석이었는데, 지난 914일 저녁 한국만화박물관 1층 상영관에서 진행된 Singing BICOF 창작음악제(이하 BICOF 창작음악제) 얘기다.

 

Singing BICOF 창작음악제

  〈BICOF 창작음악제는 올해로 26회 째를 맞은 부천국제만화축제가 전야 제의 일환으로 마련한 행사였다. 한국만화영상진흥원이 한국 만화의 가치증대를 위해 노력한다는 설립취지의 구체적 돌파구 가운데 하나로 대중음악과의 콜라보레이션을 시도한 사업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남다른 기획이었다.

  단지 나의 견해가 그렇다고 해서 BICOF 창작음악제남다른 기획으로 서 보편적인 평가를 획득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그러므로 그에 합당한 근거가 제시되어야 할 텐데, 여기서 전제로 작용하는 것이 앞서 주제가라는 매개를 통해 얘기했던 만화와 음악의 시너지에 대한 나의 믿음이다. 더불어 내가 심사위원 자격으로 BICOF 창작음악제를 가장 가까이서 경험할 수 있었다는 사실도 제고되어야 할 조건이다. 그리고 그런 전제와 조건 아래서 나는 심사 전에 품었던 기대와 심사 후에 생겨난 희망이라는 두 가지 측면을 통해 BICOF 창작음악 제남다른 기획인 근거를 제시해 볼 요량이다.

  먼저, 심사 전에 품었던 기대의 측면이다.

  평가와 심사가 주업무인 직업의 특성상 나는 그동안 수많은 경연대회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해 왔다. 그리고 BICOF 창작음악제는 내가 지금까지 관여한 그 어떤 음악제와도 달랐다는 점에서 발단부터 흥미로웠다. 이미 완성된 만화와 웹툰을 주제나 소재로 삼아 표제음악을 만들어야 한다는 조건이 그랬다. 지금껏 국내에서 주제나 소재(그것을 매개하는 원작이 만화와 웹툰이건, 드라마와 영화이건 간에)를 제시하고 거기에 어울리는 노래를 만들도록 요구한 음악제는 없었다. 최소한 내가 알기로는 그렇다. 기존의 음악제들은 음악 그 자체를 목적으로 했다. 하지만 BICOF 창작음악제는 음악의 활용방안을 목표로 제시했던 것이다. 짐작컨대 그건 음악가들에게도 흥미로운, 그리고 동시에 도전적인 과제였을 게 분명하다. 만화와 웹툰의 영화화/드라마화/게임화가 서사의 확장인 반면에, 그것의 음악화는 본질적으로 서사를 서정으로 치환하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또 하나 BICOF 창작음악제가 흥미로웠던 점은, 음악가들에게 과제로 제시된 만화와 웹툰 원작들이 한국만화영상진흥원의 다양성 만화 제작지원사업을 통해 선정된 작품들이었다는 사실이다. 즉 주제와 소재의 측면에서 상업적 성공보다는 사회적 가치에 방점이 찍힌 만화와 웹툰을 BICOF 창작음악제의 매개로 삼았던 것이다. 성격상 대중성에 한계를 내재하고 있을 가능성이 농후한 작품들을 대중음악과 연계함으로써 보다 많은 관객들을 찾아 나서겠다는 한국만화영상진흥원의 의도로 읽힌다는 점에서 내게는 그것이 대단히 인상적이었다. ‘뽑고 나면 그만이라는 식의 지원사업과 경연대회가 아주 일상적인 국내의 현황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Singing BICOF 창작음악제

  다음으로, 심사 후에 생겨난 희망의 측면이다.

  이번 BICOF 창작음악제에는 70팀 가까운 음악가들이 참가했다. 내심 100팀쯤을 예상했던 담당자는 지원자가 기대보다 적다고 했지만, 나는 첫술에 배부를 리 없다는 말로 그의 아쉬움을 일축했다. 국카스텐과 장기하를 배출한 “EBS 스페이스 공감헬로 루키경연대회도 처음 시작은 미약했다. 나는 지원자들의 숫자보다는 지원자들의 수준이 관건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말하는 건대, BICOF 창작음악제의 첫 걸음은 대단히 만족스러웠다. 재즈 팝부터 펑크 록까지 다양한 장르를 지향하는, 스쿨밴드부터 프로 경력 20년이 넘는 베테랑까지 다양한 연령대를 포괄하는 지원자들의 면면부터가 긍정적인 신호였다. 그리고 여느 음악제보다 훨씬 가볍고 대중적인 노래들이 참가곡의 주류를 이루고 있었는데, 만화와 웹툰 원작을 삼아 곡을 만드는 BICOF 창작음악제의 특성이 반영된 결과처럼 보였다. 최종 결선 무대에 오른 11곡은 당장 음반으로 발표해도 좋을 만큼 훌륭했다.

  〈BICOF 창작음악제는 다양성 만화를 위한 돌파구뿐만 아니라 인디 음악을 위한 활력소가 될 수도 있겠다는 희망이 보였다. (내가 여기서 참가자들을 굳이 인디 음 악가들로 한정한 것은 방탄소년단이나 아이유처럼 성공한 가수들이 경연대회에 참가하는 일 따위 현실에서는 벌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코로나 팬데믹을 거치며 다른 어느 예술 영역보다 위축된 인디 음악계는 어떤 형태로든 기회를 절실히 필요로 하고 있다. BICOF 창작음악제가 그 근원적인 해결책이 될 수는 없겠지만 누군가에 게는 가능성을 제공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다양성 만화와 인디 음악 은 그 본질적 속성상 서로 닮기까지 했으니 천생연분이다.

  알다시피 만화와 음악이 온라인에서 소비되는 시대에는 굳이 영화의 형식을 취하지 않아도 그것들을 동시에 즐길 수 있다. 예컨대 이번 BICOF 창작음악제에서 대상을 수상한 디어 블러썸의 ‘One More Step’은 웹툰 헤일로의 아침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인데, 독자가 스마트폰을 들고 헤일로의 아침을 볼 때마다 디어 블러썸의 ‘One More Step’이 흘러나온다면 내가 마징가 Z를 시청하면서 그 주제가를 흥얼댔던 것과 같은 경험이 창출될 수 있다. <BICOF 창작음악제>가 그런 경험의 새로운 트렌드를 주도하는 매개체가 될 수 있다는 뜻이다.

  물론 나는 이번 BICOF 창작음악제가 완벽한 경연대회였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그리고 세상에 완벽한 음악제 같은 건 없다.) 하지만 지면의 압박을 핑계로 이번 행사에서 미흡했던 점들을 여기 기술하지는 않으려 한다. 한국만화영상진흥원이 앞 으로도 BICOF 창작음악제를 지속할 의지를 보이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지 금 필요한 건 기대와 격려이기 때문이다.

  건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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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은석

대중음악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