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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는 죽는 편이 좋다 - 마나베 쇼헤이의 〈쿠조의 대죄〉

<지금, 만화> 제21호(2024. 1. 10. 발행) ‘만화 속 인생 명대사 명장면’에 수록된 기사입니다.

2024-08-10 김재훈

'뷰어로보기'를 클릭하시면 도서 형식으로 보실 수 있습니다.

 

피해자는 죽는 편이 좋다

- 마나베 쇼헤이의 쿠조의 대죄

  길었던 코로나-19 사태가 종식되고 모두가 평범한 일상을 되찾았지만, 컨텐츠 시장만큼은 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넌 듯하다. 코로나가 휩쓴 기간 동안 넷플릭스와 같은 OTT 서비스는 엄청난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고 이는 아이러니하게도 한국 영화의 위기와 K-컨텐츠의 세계화라는 상반된 결과를 불러왔다. 이동진 영화평론가는 영화 빅쇼트국가부도의 날리뷰에서 적잖은 한국영화들이 지나치게 뜨겁고, 감정에만 호소한다고 했는데 이는 영화뿐만 아니라 전반적인 우리나라 콘텐츠의 특징이 아닐까 한다. 이러한 콘텐츠 속 감정 과잉이 OTT 서비스라는 유통 채널을 통해 한국인에겐 식상함을 외국인에겐 신선함을 전달하면서 안에서 새는 바가지가 밖에서는 튼튼한 기이한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그렇다면 반대로 이성적인 콘텐츠가 부족한 우리나라에서는 차가운 현실을 다루는 작품이 신선하게 느껴지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이치일 것이다.

 

▲ 〈쿠조의 대죄〉 Ⓒ 마나베 쇼헤이

  〈쿠조의 대죄사채꾼 우시지마로 유명한 마나베 쇼헤이 작가의 후속작이다. 이전 작품인 사채꾼 우시지마가 고리대금업자의 시점에서 여러 가지 사회 문제를 비쳤다면, 이번엔 변호사인 쿠조의 시점에서 냉혹한 현실을 다루고 있다.

  음주운전으로 뺑소니 사고를 내고 찾아온 의뢰인이 피해자가 살아있으면 좋겠다고 말하자, 쿠조는 피해자는 죽는 게 낫습니다라고 딱 잘라 말한다. 그 이유는 피해자의 진술이 있으면 귀찮아지기 때문. 사정 청취 결과 쿠조가 원하던 대로 피해자인 30대 아버지는 사망했고 함께 있던 아이는 왼발이 절단. 절규하는 유가족과 곧바로 이어지는 구치소에서 태평하게 낮잠을 자는 가해자의 모습은 극명한 대비를 이뤄 독자를 허탈하게 만든다. 의뢰인인 가해자가 집행유예를 선고받음으로써 성공적으로 의뢰를 끝마친 쿠조와 동료 변호사는 변호사를 선임하지 않은 유가족을 바라보며 동정하는 것이 아닌 무지는 죄라고 이야기를 나눈다.

 

▲ 〈쿠조의 대죄〉 Ⓒ 마나베 쇼헤이

  작중에서 등장인물들은 지속해서 의뢰인에게는 쓰레기, 쿠조에게는 악덕 변호사라고 말하는데, 이에 대해 쿠조는 도덕적으로 옳지 못한 일이어도 의뢰인을 옹호하는 것이 변호사의 사명이라고 답한다.

 

▲ 〈쿠조의 대죄〉 Ⓒ 마나베 쇼헤이

  〈쿠조의 대죄1화에서 피해자는 죽는 게 낫습니다라는 전혀 예상치 못한 대사를 통해 도덕과 법의 괴리를 독자에게 각인시켜 주며 사법제도에 의문을 던지게 만든다. 쿠조는 악덕 변호사일까, 아니면 누구나 변호 받을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직업정신이 투철한 변호사일까. 쿠조의 대죄는 권선징악처럼 이분법적인 사고가 아닌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냉정하게 움직이는 인간 군상들의 이야기로써 다양한 질문을 던지기 때문에 읽다 보면 독자는 자연스럽게 사색에 빠지게 된다. 불확실성은 인간에게 스트레스로 다가오므로 등장인물 간의 모호한 선악 구도와 폭력적인 묘사가 익숙하지 않다면 만화를 보면서 피곤함이나 불쾌함을 느낄 수도 있다. 혹자는 현실도 복잡한데 만화까지 복잡한 것을 봐야 하냐고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현실이 픽션보다 더욱 냉정하다는 것을 이미 잘 알고 있다. 냉혹한 현실을 마주하기 전에 만화로 먼저 간접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뜨거운 국밥 같은 K-콘텐츠가 식상하다면 차디찬 현실을 그려내는 쿠조의 대죄로 신선함을 느껴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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