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만화(디지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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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랑만화는 다시 어린이들의 친구가 될 수 있을까?

<지금, 만화> 제22호(2024. 7. 22. 발행) ‘커버스토리’에 수록된 기사입니다.

2025-02-10 박성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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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랑만화는 다시 어린이들의 친구가 될 수 있을까?

  어린 시절 같은 동네에서 살던 이모는 만화방을 운영했다. 공짜로 볼 수 있었기에 매일같이 이모의 가게로 달려가 만화를 읽곤 했다. 삐걱거리는 나무 출입문, 벽면에 고무줄로 고정한 만화책, 구석에서 끓고 있는 번데기 솥딱딱한 판때기 의자에 앉아 원시 시대로, 조선 시대로, 머나먼 우주로 여행을 떠났다. 그중에서도 나를 사로잡은 건 명랑만화였다. 명랑만화의 캐릭터는 어린이들의 고민을 해결하고 꿈을 실현하며 대리만족을 안겨주었기 때문이다. 마치 재기발랄한 옆집 친구 같은 친근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나를 비롯한 중·장년 층은 어릴 때 읽었던 수많은 만화 중에서도 특히 명랑만화에 대한 향수를 진하게 간직하고 있다. 오래된 앨범의 빛바랜 사진들 틈에 명랑만화 캐릭터가 살포시 끼어 있어도 마치 소꿉친구의 모습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명랑만화는 이제 옛것이 되었고 더 이상 접하기 힘들어졌다. 그렇다면 우리와 달리 지금의 어린이들은 어떤 만화와 함께 추억을 쌓고 있을지 궁금해진다.

 


박성환 <명랑만화를 보러 갔다> 박성환

  현재 한국 만화의 주류는 웹툰이다. ‘만화가보다 웹툰 작가라는 표현이 일반적으로 쓰일 정도로 웹툰의 영향력은 막강하다. 그러나 주요 웹툰 플랫폼에 발표되는 수백 편의 웹툰 중에서 어린이 만화는 찾아보기 힘들다. 웹툰의 주요 소비층은 청소년과 청년이고 그들을 타깃으로 한 작품 제작에 작가들은 집중하고 있다. 물론 요즘 어린이들도 만화를 좋아하고 열심히 읽는다. 고래가 그랬어, 개똥이네 놀이터, 어린이 과학동아같은 어린이 교양지는 다양한 기사와 함께 여러가지 만화를 싣고 있다. 예전의 소년중앙이나 어깨동무같은 구성과 유사하다. 다만 요즘의 어린이 잡지는 흥미보다는 교양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서 기사와 만화 또한 그에 부합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아무래도 현대의 어린이들이 접하는 만화의 절대다수는 학습만화일 것이다. 대형 서점의 어린이 도서 부스에는 수많은 학습만화가 책장을 점유하고 있고, 어린이 웹툰 플랫폼 <아이나무툰>에서는 다양한 학습만화를 서비스하고 있다<Why?>시리즈와 <마법천자문>으로 대표되는 학습만화는 부모와 어린이 모두에게 환영받으며 현대 어린이 만화의 중심을 이루었고 최근엔 유튜브의 유명 인물과 결합한 <흔한 남매> 같은 학습만화로 이어지며 꾸준한 인기를 얻고 있다.


▲ <아이나무툰홈페이지

길창덕과 윤승운의 명랑만화 7080

  그런데 이런 학습만화를 수십 년 전 시도한 명랑만화가 있다. 명랑만화의 대부 길창덕은 1977년 어린이 잡지 새소년의 별책부록을 통해 <선달이 여행기>를 선보였다. 후에 클로버 문고에서 단행본으로도 출간된 9권짜리 장편 만화다. 주인공인 말썽꾸러기 선달이가 세상 물정에 어두운 부잣집 아들 뚝갑이와 전국을 여행하며 각지의 문화재, 명승지, 야사, 민담, 전설 등을 소개하는 내용으로 전개되었다. 본격적인 학습만화의 성격보다는 명랑만화의 본질에 가까운 재미있는 해프닝을 중심으로 연출되지만 고전이나 역사 등에 대한 길창덕의 해박한 지식과 교양을 풀어냈다. 재미와 학습의 요소를 모두 담아내면서 당시 만화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던 학부모들이 아이들에게 먼저 권하는 진풍경을 만들었다.

  1982년엔 윤승운이 만화잡지 보물섬<맹꽁이 서당>을 연재했다. 조선시대 시골 마을을 배경으로 공부는 뒷전이고 말썽만 일으키는 학동들과 그들때문에 매일 골머리를 앓는 훈장님이 선대 임금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만화였다. 학동들의 말썽이 일어나는 명랑만화와 역사를 다룬 학습만화로 구성한 독특한 시도였다.

  매 회 전반부는 훈장님과 말썽꾸러기 학동들의 쫒고 쫒기는 소동의 전형적인 명랑만화를 보여주고 소동을 그린 끝나고 나면 서당에 모여 앉아 훈장님이 조선 시대의 역사를 들려주었다. 틈만 나면 청계천의 헌 책방을 뒤지고, 옛날 사람들의 생활을 체험하기 위해 청학동을 찾아가는 등 작가의 노력이 담긴 이 만화는 독자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고 당대를 뛰어넘어 현재까지도 판매되는 스테디 셀러가 되었다. 조금 과장하자면 1980년대의 어린이들은 역사 교과서보다 <맹꽁이 서당>을 보며 조선의 역사를 배웠을 것이다. 그러나 그 역사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머릿속에 녹아 들었다. 어느 누구도 학습만화를 본다는 의식은 하지 않았다. 1960~1980년대까지 어린이들의 절대적 호응을 얻었던 명랑만화는 1990년대로 접어들며 일본의 개그 만화에 자리를 내어주게 된다. 자그마한 일탈과 유머, 교훈까지 담은 명랑만화는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일본의 개그 만화에 맞설 수가 없었다.


윤승운 <맹꽁이서당>, <왕의 기상을 타고난 아이> 윤승운

  전통적인 명랑만화는 하나둘 사라졌지만 이우영의 <검정 고무신>과 이빈의 <자두야 놀자> 같은 만화가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지며 21세기 어린이들에게 꺼벙이와 둘리 같은 역할을 했다. 두 작품 모두 1960~1980년대의 옛 풍경을 담은 만화라는 공통점이 흥미롭다. 그 외에도 김우영의 <뚱딴지 만화 일기>를 비롯하여 명랑만화의 고전 캐릭터들이 등장하는 만화 일기 시리즈가 인기를 얻으며 명랑만화의 마지막 길을 함께했다.

  자리를 잃은 명랑만화에 대해 안타까움을 느꼈던 개인적인 경험이 문득 떠오른다. 2010년 즈음 한국만화영상진흥원에 있는 모 회사에 방문했는데, 그곳에서는 <로봇 찌빠> 애니메이션을 만들고 있었다(아직 외부에 공개되기 전이었다). 모니터에서 살아 움직이며 말을 하는 찌빠와 팔팔이를 보며 얼마나 흥분했던가. ·장년 세대의 추억으로 만 남았다고 생각한 명랑만화 캐릭터가 세월을 훌쩍 뛰어넘어 요즘 어린이들에게도 소개되겠구나 하는 기대가 생겼고, 어쩌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명랑만화가 다시 부활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로봇 찌빠>2011KBS TV에 매주 모습을 드러내며 총 26부작 시리즈가 방영되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좋은 반응은 얻지 못했다. 원작을 바탕으로 요즘 어린이들의 감성에 맞는 현대적인 미장센을 추가하며 리메이크 되었지만 어린이들의 호응을 얻기에는 부족한 부분이 많았나 보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 당시의 상황이 여러모로 아쉽다. 한국에서 정통 명랑만화가 살아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을지도 모른다.

  훗날 신문수는 세계일보와의 인터뷰를 통해 대학 만화학과 등 제도권에서 체계적으로 만화 교육을 받게 된 것도 물론 좋지만 명랑만화는 학교에서 배워서 되는 게 아니다. 모든 만화의 근간에 명랑만화의 코드가 있고 알면 알수록 비전이 있는 분야인데 이렇게 사라지는 듯해서 무척 안타깝다라며 명랑만화가 계승되지 않는 현실에 아쉬움을 표했다.

명랑만화에서 발견하는 일상툰


신문수 <로봇 찌빠> 애니메이션 북 신문수

  독자들의 시야에서 사라졌던 명랑만화는 웹툰 시대를 맞아 일상툰을 통해 고개를 드는 듯한 모습을 보여 준다. 명랑만화와 일상툰은 작가층과 그림체 등에서 직접적인 연관은 없다. 그러나 주인공의 일상과 배경에서 소재를 얻고 잔잔한 웃음과 공감을 준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개그 만화, 엽기 만화, 병맛 만화로 이어지는 자극적인 맛을 배제하고 명랑만화에서 보여졌던 친밀한 감성을 일상툰에서 발견할 수 있다. 다만 대부분 청년 캐릭터의 삶을 다룬다는 점에서 어린이 명랑만화를 계승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런데 예전의 명랑만화에도 일상툰의 성격을 가진 작품이 있었다. 대표적으로 박수동의 <5학년 5반 삼총사>와 신전식의 <덜렁덜렁 삼총사>를 들 수 있다. <고인돌> 등의 성인만화로 커다란 족적을 남긴 박수동은 어린이 만화 분야에서도 뛰어난 작품을 많이 그렸다. <땅콩 찐콩>, <별똥 탐험대>, <번데기 야구단>, <오성과 한음> 등 어린이의 시각에 맞춘 다수의 작품을 발표했는데 젊은 시절 초등학교 교사 경험이 바탕이 되었다. 그리고 그 경험을 살린 대표작이 <5학년 5반 삼총사>.


▲(좌) 박수동 <5학년 5반 삼총사> 종철엄마에피소드 박수동 ▲ (우) 신전식 <덜렁덜렁 삼총사> 신전식

 

  길창덕의 제자였던 신전식은 초기엔 길창덕풍의 그림체와 연출을 선보였지만 활동 중반기 이후엔 박수동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작품을 그렸다. 특유의 구불구불한 선과 어린이들의 일상을 담은 <덜렁덜렁 삼총사>가 대표적이다. 두 작품은 당대의 어린이 만화와는 조금 다른 결을 가지고 있다. 대부분의 명랑만화에서 볼 수 있는 과장된 연출과 허무맹랑한 말썽, 모험을 배제하고 어린이들의 일상을 진솔하게 표현했다. 교우관계나 외모 콤플렉스, 가난한 집안 환경 등의 고민을 따스한 시선으로 연출하며 명랑만화에서도 어린이들의 실제 일상을 잔잔한 웃음과 감동으로 담아낼 수 있다는 예시로 남았다.

  학습만화와 일상툰의 흔적을 옛 명랑만화에서 발견하는 건 흥미로웠다. 그렇게 과거와 현재가 연결되어 명랑만화가 그저 과거의 유물로만 남지 않았으면 좋겠다. 만화박물관의 전시물이나 수장고의 희귀 단행본으로만 가치를 다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장년 층의 추억뿐만 아니라 어린이들의 추억으로도 자리할 수 있으면 좋겠다.

  외람되지만 현재 진행 중인 개인적인 작업에 대해 조금 덧붙이고자 한다. 나는 2024년 한국만화영상진흥원 다양성만화 제작 지원 사업에서 <명랑만화를 보러 갔다>라는 작품이 선정되어 원고를 만들고 있다. 한국의 명랑만화를 일구었던 선생님들의 삶과 작품을 되돌아보고자 하는 작업이다. 이 작품을 통해 중장년 세대에게는 어린 시절의 추억을 소환하고 어린이들에게는 명랑만화에 대한 경험을 선물하고 싶다명랑만화가 과거의 만화로만 남지 않고 세대 간의 공감과 연결로 어린이들에게도 현재진행형의 만화가 될 수 있도록 작은 계기를 마련하고자 하는 바람을 갖고 있다

명랑만화는 다시 어린이들의 친구가 될 수 있을까. 나는 긍정적인 믿음을 갖고 있다. 명랑만화의 위대한 자산을 잊지 않고 다시 배우며 익히고 어린이들의 일상과 고민, 꿈을 담을 수 있는 새로운 연출을 더한다면 명랑만화는 다시 어린이들에게 사랑받을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끝)

 


박성환 <명랑만화를 보러 갔다> 박성환

필진이미지

박성환

오랫동안 만화출판사에서 근무하며 만화를 만드는 일을 하다가 이제는 직접 만화를 그리고 있다. 그동안 <다시 그리는 한국프로야구사>, <팔도유람 관광버스>등의 작품을 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