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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 만화의 불온한 가능성

<지금, 만화> 제22호(2024. 7. 22. 발행) ‘커버스토리’에 수록된 기사입니다.

2025-02-12 이용건

어린이 만화의 불온한 가능성

어린이 만화는 일제가 1920년 문화정치를 표방하며 신문, 잡지 발행을 제한적으로 허가한 시점에서 시작한다. 아니, 굳이 어린이만화로 제한할 필요도 없을 법하다. 이연숙 평론가가 문학동네에서 연재하고 있는 소년 완결 없음’(*1)이라는 만화 칼럼을 통해 알게 된 사실이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그림이야기등으로 불리던 만화가 만연(漫然덮어놓고 되는 대로(*2))히 그린다라는 의미를 획득함으로써 1923년 이후로 표기가 통일되었다는 것이다. ‘덮어놓고 되는 대로 그린다.’라는 정의가 다소 모멸적으로 들릴 수는 있지만, 나는 이것이 만화가 가지고 있는 힘을 가장 정확히 서술하는 것 같다. 모든 만화가 되는 대로 그리는 것은 아닐지라도, 되는 대로 그리는 것은 모두 만화이다. 만화란 미숙함과 아마추어리즘을 허락하는 유일한 예술 장르였다. 어린이들과 만화가 친연한 관계를 맺을 수 있던 까닭 또한 여기에 있다. 미숙한 어린이와 미숙하다고 여겨지는 예술 장르로서 만화. 그런데 이러한 만화가 언젠가부터 어린이들에게 보여주기에는 부적절한 장르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1: http://www.weeklymunhak.com/articleEpisode/63/830
*2: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7776)

이러저러한 만화는 교육적으로도’, ‘정서적으로 도어린이들에게 부적절하다는 진술에서 마주하게 되는 것은, 그러한 판단을 내리는 어른들의 태도다. 어린이들에게 건전한 작품을 보여주는 것은 권고할 만한 일이지만, ‘건전한 작품만을 보여주는 것은 재고해야 될 문제다. ‘건강한 어린이에서 건강한 어른으로 성장하기 위한 과정 속에 교육적으로도, 정서적으로도 좋지 않은작품이 개입될 여지 자체를 차단하는 것은 적절한 처방일까? 어린이가 적절히 다룰 수 없는 작품을 소개하는 것은 불온한 일에만 머무르는 것일까? 답변을 어린이 만화의 불온한 가능성내놓아야 하는 사람으로서 계속 질문을 던져 미안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으니, 이제는 답변을 가장한 변명을 내놓아야 될 시점인 것 같다. 나는 이 글의 주제인 '보호자 입장에서 어린이와 함께 경험한 웹툰 읽기의 불편함'에 대해서 말하는 것과 동시에, 그 불편함의 입구로 들어가보고자 한다.


https://comic.naver.com/webtoon (2024.06.10.)


https://webtoon.kakao.com/ranking (2024.06.10)

1. 부적절한 만화?

네이버웹툰, 카카오웹툰, 레진코믹스 등과 같은 웹툰 플랫폼들은 분명하게도 어린이 친화적이지 않다. 성인들이 사용하기에 직관적인 UI와 순위별 랭킹에도 불구하고, 어린이들이 진입에 성공할 수 있는 웹툰은 거의 부재한다. 학교를 경험하지 않고, 좀비물의 클리셰를 알지 못하고, 연애를 해보지 않았고, 기타 등등. 여러모로 아직 문화적이지 않은 어린이들이 즐길 수 있는 웹툰 자체가 주요한 웹툰 플랫폼들에서는 부재한다. 이 원인에 대해서는 다양한 가설들이 가능하다. 웹툰 플랫폼 측에서 갈수록 줄어드는 어린이들의 숫자에도 불구하고 어린이 만화에 비용을 투자하는 것은 무리라는 시장 논리적 판단, ‘성인어린이모두가 즐길 수 있는 웹툰 자체를 고안하기 어려운 창작자의 비애 등. 무엇이 되었든 초등학교에도 입학하지 않은 미취학 아동들이 웹툰 플랫폼에 연재되는 웹툰을 즐기는 것은 불가능해 보일 뿐만 아니라 부적절해 보이기까지 한다. 부적절해 보이는 이유는 웹툰 플랫폼에 정식 연재되는 웹툰들이 자극적인 소재를 주로 다룬다는 점에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어린이가 이러한 웹툰을 보는 광경 자체에 불쾌감을 느끼는 윤리적 판단의 배후에는 어린이들에게 자극적인 소재 자체에 접근하려고 하는 것을 제한하려는 어른들의 태도가 있다.

즉 어린이 만화에 관해 논의해야 될 부분은 두 지점이다. ‘주요한 웹툰 플랫폼들에 어린이들이 즐길 수 있는 웹툰 자체가 부재한다라는 논점과 대부분의 웹툰들은 어린이들이 즐기기에는 부적절하다라는 논점이 그것이다. 그런데 후자의 논점에서는 모호한 부분이 두 가지가 존재한다. 아이들이 즐기기에 부적절한웹툰의 수위가 어느 정도까지인지와, ‘어린이의 범주를 어디까지로 설정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그것이다. 어린이들이 적절하게 다룰 수 있는 소재는 어디까지인지, 어른의 개입은 어느 정도의 어린이에게 필요한 것인지 자체에 대한 논의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어린이는 자신이 어느 정도의 소재까지 다룰 수 있는지 알 수 있는 권리 자체가 결여되어 있고, 성인들은 어린이들이 무엇을 다룰 수 있는지 모른다. ‘좋은 어린이 만화에 대한 논의가 완벽히 닫힌 회로에서 공회전하는 까닭은 여기에 있다. ‘건전한소재만을 채택하는 간편한 해결책의 문제점은 어린이들이 건전하지 않은소재를 적절하게 다룰 수 있는 능력이 결여된 채 그러한 소재를 종국에는 마주치게 된다는 점이다. 예민하고 자극적인 소재들을 무조건적으로 검열하는 것은 언젠가는 그러한 소재들에 노출될 수 밖에 없는 어린이들의 미래를 외면하는 일인 듯싶다. 즉 어린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소재 자체의 검열이 아니라, 그 소재를 다룰 수 있는 능력이다.

나는 이 글을 쓰기 위해 <코믹 메이플스토리>를 다시 읽었다. 이 만화는 배신, 모멸, 실패 등을 아이들이 어떻게 다루어낼 수 있는지 적절하게 설명했고, 만화의 주인공들이 악당을 처단하는 과정에서도 악당의 마음을 이해해보고자 노력했다. ‘가해자에게 서사를 부여하지 말라는 어른들의 비겁한 요청에도, 아이들은 악당의 마음까지 들여다보고자 노력한다. 아이들은 자신들이 이해할 수 있는 범위를 한정하지 않고, 이해하고자 하는 대상조차 선별하지 않는다. 어린이가 사이다 웹툰을 보는 것을 불편해하는 마음은, 간편하게 외면할 수 있었던 웹툰 속 악당을 어린이가 마음을 들여다보고, 종국에는 그 악당을 이해해버릴까 두려운 마음에서 기인하는 것은 아닐까? 우리가 보호자의 입장에서 어린이와 웹툰을 읽는 것이 불편하다면 그때의 불편함은 어린이가 아니라 어른의 불편함일 것이며, 어린이들에게 우리의 불편함을 반사시키고 있을 가능성을 고려해보아야 할 것 같다.

오해하지 말길. 나는 어린이들에게 자극적인 만화를 보여주는 것을 무조건적으로 허용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어린이들이 보기에 적절한 웹툰을 선별하는 마음의 깊은 곳에 어른들의 불안함이 잠재되어 있을 수 있다는 하나의 가설이다. 우리는 이러한 가설을 마음속에 품고 있을 때, 어린이들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우리의 불안함을 제거하고자 하는 욕망인 것은 아닌지 고민할 수 있다. 즉 우리가 검열해야 될 것은 만화의 소재가 아니라 우리의 불안함일 수도 있다고 조심스럽게 제안하는 것이다.


<코믹 메이플스토리> 출처:서울문화사

2. 만화의 여백

한편 어린이들이 즐길 수 있는 웹툰 자체가 주요한 웹툰 플랫폼에서 부재한다는 논점은 어린이 만화의 대부분은 만화책으로 출판되기 때문에 큰 문제처럼 보이지 않는다. 웹툰 플랫폼에 접근이 용이하지 않은 어린이들은 만화책으로, 또는 아이나무툰과 같은 어린이 웹툰 전문 플랫폼을 통해 이미 충분히 만화를 즐기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린이 만화의 대부분이 학습만화라는 점을 고려해본다면 낙관하기에는 이른 것 같다. 학습만화는 분명히 직관적이고 흥미를 유발하면서 지식을 전달할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지지만, 만화를 즐기는 이유는 지식보다는 서사에 있고, 어린이들 또한 (적어도 나와 내 주변의 어린이들의 경험에 비추어본다면) 학습만화에서도 지식보다는 주인공들의 서사에 몰입하면서 만화를 즐긴다.


아이나무‘EBS’가 만든 어린이용 웹툰 플랫폼 <EBSTOON> 아이나무툰

애니메이션, 영화 등과 분명히 구별되는 만화의 특징적인 지점은 공백에 있다. 만화를 이루는 기본 단위인 들 사이에는 분명한 여백이 존재한다. , 모든 만화의 독자들은 컷과 컷을 연결할 때 발생할 수 밖에 없는 틈 사이를 메우며 서사를 이해한다. 만연히 그려낸 컷과 컷 사이에 자신이 만연히 그려낸 컷을 머릿속에서 이어붙이는 작업은 만화만이 가질 수 있는 장점이다. 만화가 가지고 있는 예술적 특성이 서사의 공백에 있다면, 그 공백을 어린이가 채우는 일 또한 예술이 아닐 리 없다. 누군가가 만든 허구적 이야기에 자신이 생각해낸 서사를 개입시키는 일은 살면서 만나게 될 많은 이들의 삶을 경험하고 그들의 삶에 개입하는 것을 미리 경험하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누군가의 삶에 함부로 개입하고자 하는 것 자체가 폭력일 수 있다는 지적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의 다음 세대가 누군가의 삶에 함부로 개입하고자 하는 노력을 멈추지 않았으면 한다. 지젝의 말처럼 누구에게도 개입하지 않고 상처를 주지도, 받지도 않는 삶은 완벽하게 고립된 삶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누군가의 삶에 오지랖을 떨고 그들의 삶에 직접적으로 연루되는 일은 위험한 일이기도 하다. 타인의 삶에 개입된 순간 생겨날 수밖에 없는 상처들의 역학적 구조는 관계 자체를 위협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위협을 방지하는 무해함이 문학의 캐치 프레이즈가 된 작금의 시대가 증언하는 것은, 인간은 결코 무해한 존재일 수 없다는 사실일 것이다. 자신의 가장 소중한 사람에게까지, 아니 소중한 사람이라면 더더욱 유해한 존재일 수밖에 없는 것이 삶의 양태라면, 우리는 다음 세대에게 친한 친구일지라도 일정 수준의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라는 방어책보다는 적극적으로 서로에게 연루되고 서로에게 오염되라고, 그리고 그 오염으로부터 이해를 개발하라고 요청해야 한다.

누군가의 삶에 끊임없이 개입하는 것은 만화를 포함한 모든 서사 예술을 읽어내는 것과 닮아 있다. 우리는 텍스트를 통해 주인공들의 삶을 적극적으로 이해하고, 때로는 오독하고, 따라서 그들을 오해하고, 그들을 이해하는 데 성공하거나 실패한다. 타인의 삶을 겪는 것은 서사 예술 속 주인공들의 삶을 겪는 것(또는 견디는 것)과 구별되기는 하는 걸까? 어린이가 만화책을 보며 주인공이 떠난 모험에서 두근거릴 때, 그것은 그 어린이가 강력한 우정의 관계를 맺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동시에 자신의 우정이 일방향적일 수밖에 없다는 안타까운 사실을 종국에 감각해낸다면 어린이는 우정의 조건에 대해 통념과는 다른 생각을 해낼 수도 있다. 지나치게 먼 길을 온 것 같은 마음이지만, 정리하자면 어린이에게 학습만화의 지식들과 마찬가지로, 적어도 꼭 그만큼 서사에 대한 경험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3. 나가며

어린이는 어른들이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각자가 처한 상황을 각기 다르게 수용하고, 각기 다른 방식으로 세상에 적응한다. 이 글을 쓰는 날 다섯 살이 된 나의 소중한 이웃은 자신의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나 다시 볼 수 없다고 나에게 설명했다. 할아버지를 잃었다는 소식은 끔찍하지만 그러한 상처는 어린이일지라도 세상을 살아가면서 피할 수 없는 상처들이다. 우리는 그러한 상처들로부터 아이들을 분리시켜서는 안되며, 그럴 수 있는 능력조차 없다.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그러한 상처를 다루고, 상처를 입을 수밖에 없는 세계를 자신의 세계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자신을 끔찍하게도 예뻐한 할아버지를 다시 볼 수 없다는 상황까지 수용할 수 있는 것이 어린이의 능력이라면, 우리는 어린이들에게 좀 더 많은 것을 허용할 수 있지 않을까?

따라서 어린이들이 보는 모든 만화가 좋은 어린이 만화일 필요가 없고, 따라서 좋은 어린이 만화가 무엇인지 정의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적어도 나쁜 어린이 만화란 무엇인지 알고 있다. ‘나쁜 어린이 만화란 어린이들을 세계에 유리시키며 안전한세계에만 머무르도록 아름다운 거짓말을 통해 그들을 고립시키는 만화이다. 어린이의 순수함에 대한 동경으로 채워진 어린이 만화는 어른들의 환상에만 복무한다. 순수하고 깨끗하지만 어린이는 존재하지 않는 어린이 만화보다는 어떠한 어린이든, 심지어는 음흉한 어린이일지라도 어린이가 등장하는 어린이 만화가 나는 더 어린이답다고 믿고 있다. 어린이들은 자신이 보는 만화의 여백을 (음흉한 방식이든, 사기꾼의 방식이든) 채워나가며 어떤 만화든 자신의 만화로 만들 수 있는 힘이 있고, 그 힘은 만화가 아이들에게 건네줄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능력일 것이다.(끝)


필진이미지

이용건

만화평론가
2023 대한민국 만화평론공모전 대상 수상
2022 대한민국 만화평론공모전 최우수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