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는 만화를 좋아한다.
전 연령이 함께 보는 만화와 아동문학
‘만화와 아동문학’을 생각하니 가장 먼저 어린 시절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일요일 아침, 온 가족이 TV 앞에 모여 애니메이션 <은하철도 999>(*주1)를 흥미진진하게 보던 모습. 장유유서의 유교적 문화가 팽배했던 우리 집에서 어린이에게 프로그램 선택권을 줄 리는 만무하고, 부모님도 그 작품을 매우 재미있어 하셨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러한 현상이 비단 우리 집에서만 일어난 일도 아니었고, 당시에 국한된 일도 아니다. 작년에 상영하여 인기를 끈 일본 애니메이션 <더 퍼스트 슬램덩크>(*주2)와 <스즈메의 문단속>(*주3)은 어른과 아이들이 함께 재미있게 관람할 뿐더러 50세를 바라보는 중년의 아버지가 자녀에게 추천하는 영화이기도 하다. 만화와 아동문학은 ‘전 연령 가’ 콘텐츠라는 점에서 그 거리가 가깝다. 물론 19세 이상만 볼 수 있는 성인만화도 있지만, ‘성인’이라는 말을 따로 붙인 데서 알 수 있듯이 그것은 만화의 일반적, 지배적 경향은 아니다. 전 연령이 함께 보려면 쉽고, 재미있고, 건전해야 한다. 쉽고, 재미있다는 측면에서 만화와 아동문학은 대중문학과 유사한 특성을 지닌다. 페리 노들먼은 아동문학과 대중문학의 유사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주1: 마쓰모토 레이지 원작 만화, 일본 TV 애니메이션 <은하철도 999>, 한국에서 1981년 MBC에서 처음으로 방영됨. 두산백과.
*주2: 이노우에 다케히코 감독, 일본 극장판 애니메이션 <더 퍼스트 슬램덩크>, 한국에서 2023년 개봉. 다음영화.
*주3: 신카이 마코토 감독, 일본 극장판 애니메이션 <스즈메의 문단속>, 한국에서 2023년 개봉. 다음영화.
아동문학은 그 청중을 위해 이름지어졌다는 사실로부터 대중문학과 공통점이 있다. …(중략)…
둘 다 인물의 미묘함이나 언어적 복합성에서라기보다 행동에 초점을 둔 ‘단순한’ 문학이고, 독자들이 동일시 하도록 의도된 주인공을 제공하며, 주인공의 초점으로부터 사건들을 묘사하는 경향이 있다. 또 둘 다 기본 스토리 유형으로부터 크게 벗어나지 않은 플롯이 쓰이는 경향이 있다.(*주4)
*주4: Perry Nodelman, The Hidden Adult; Defining Children’s Literature, The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2008, 154-155쪽.
건전성은 안전성과 상통한다. 정서적, 도덕적, 사상적으로 그 시대와 사회의 기준에서 무해하고 유익해야 한다. 그렇다고 교과서적이고 따분해서는 안 된다. 그러면 앞서 들었던 ‘쉽고 재미있다’는 기준에 맞지 않아 감상자들이 외면하니 말이다. 그 일은 어렵지만 불가능하진 않다. 오히려 새로운 콘텐츠를 만드는 계기가 될 수 있다. 그 예로 2024년 어린이날 특집으로 방영된 전체관람가 KBS2 <개그콘서트>(*주5)를 들 수 있다. 어린이를 방청객으로 초청하기 위해 <개그콘서트>는 모든 프로그램을 어린이 관점에서 점검하고 새로 기획해야 했다. 그 결과, 선정적이고 폭력적인 연출 및 비속어가 사라졌지만, 각 프로그램의 재미는 여전했으며 신선한 느낌을 주었다.
*주5: 한경천(제작), 하태석(책임프로듀서), TV 예능 <개그콘서트>, KBS2, 2024. 5.5. 방영.
잘 알려진 것처럼, TV 애니메이션 <은하철도 999>는 만화를 각색한 것이고, 그 만화는 미야자와 겐지의 동화 <은하철도의 밤>에서 착상을 얻었다고 한다. 이와 같이 동화는 만화로 만들어지는 경우가 많다. 독일에서는 아동청소년문학의 범주 안에 아동과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다양한 도서 및 매체를 포함시키기도 한다.(*주6) 그럴 경우 만화도 아동문학에 포함된다. 이는 아동문학을 아동이 즐기는 콘텐츠 전반으로 확대해서 보는 견해인데, 세계 어디서든 아동문학의 출현과 향유 양상이 매체와 갈래 측면에서 다채롭기 때문에 설득력이 있다. 최근 한국에서 다매체 시대의 문학 개념을 확장해야 한다는 주장과 견주어 보더라도 선구적 의의가 있다. 한 가지 더 말해두고 싶은 점은 만화와 아동문학의 거리가 가깝고, 서로 전용(轉用)(*주7)되는 경우가 많지만, 만화를 동화로 만드는 경우보다 동화를 만화로 만드는 비중이 훨씬 높다는 점이다. 그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어린이가 만화를 좋아한다는 사실’이 아닐까?
*주6: 한스 하이노 에버스 지음, 김정회 외 옮김, <아동청소년문학의 서(書)>, 유로, 2008, 37-39쪽.
*주7: “‘(이야기) 전용’이란 기존 이야기를 다른 이야기의 창출에 활용하는 행위를 뜻한다. 거기서 장르나 형태의 변화는 필수적이지만 매체의 변화는 필수적이 아니다.” 최시한, ‘이야기 콘텐츠의 창작과 전용’, 『문화산업 시대의 스토리텔링-OSMU를 중심으로』, 태학사, 2018, 25쪽.
학습 도구로 허용된 어린이 만화
어린이는 만화를 좋아한다. 만화적 캐릭터나 표지만 보아도 벌써 입매가 벌어지며 웃을 준비를 한다. 서점에 가서 자유롭게 원하는 책을 보라고 하면 대부분 학습만화를 본다. 학습에 대한 관심보다 만화를 보기 위해서이다. 일반 만화를 더 보고 싶어 하지만, 서점에서 만화책은 비닐로 꽁꽁 포장되어 있으니 학습만화라도 보려고 한다. 여기서 ‘어린이가 만화를 좋아한다’는 사실이 ‘어린이가 그림이나 그림책을 좋아한다’는 사실과 동일한 의미가 아니라는 점을 분별할 필요가 있다. 어린이는 그림도 좋아한다. 하지만 만화적 그림을 더 좋아한다. 좀 더 엄밀히 말하면, 어린이는 과장되고 웃기는 만화, ‘코믹스’를 좋아한다. 어른들은 만화가 교육에 유익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어린이들이 워낙 좋아하니, 그들을 유혹하는 도구로 만화를 허용하기 시작했다.
1982년 10월, “유익하고 건전한 온 가족의 잡지”를 표방하며 창간된 월간만화 ≪보물섬≫은 그 취지를 독서는 매우 중요한데 어린이들이 책을 읽지 않으니 만화책이라도 읽혀 독서 습관을 들이기 위해서라고 밝힌다. 실제로 초기 ≪보물섬≫에선 재미 못지않게 교육과 교양을 염두에 둔 기획이 눈에 띈다. 창간호부터 세계 명작을 각색한 만화인 <빨간 머리 앤>과 위인 이야기 <인간, 처칠>, 그리고 시튼의 동물기 <카람포우의 로보>를 연재한다. 1984년 6월호부터는 “본지 독점, 단회로 끝나는 세계명작”이라는 광고 아래, 미국의 ‘명작 각색 만화’를 번역해 싣는다. 그 첫 회에 실린 다음의 안내문에서 고전을 소개하는 수단으로 만화의 기능을 선전하는 장면이 잘 드러난다.
애독자들의 요청에 따라 본지는 미국 마블 엔터테인먼트사와의 독점 계약으로 마블사판 ‘극화 세계명작’을 이달부터 싣습니다. 고전을 읽어야겠다고 벼르기만 하고 아직 읽지 못한 독자들에게는 다시없는 좋은 기회가 될 것입니다. 작품 속에 담긴 알맹이만을 압축하여 재미있게 엮은 ‘간추린 명작’을 통하여 고전의 향기를 맛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기회가 있을 때, 잘 번역된 책으로 다시 읽는 것도 잊지 마십시오(*주8).
*주8: 발행인 박근혜, ≪보물섬≫, 재단법인 육영재단, 1984. 6, 39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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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간 ≪보물섬≫ 출처:육영재단
우리 사회에서 아동문학과 만화의 차이는 그 양식적 차이보다 인식적 차이가 더 커 보인다. 아동문학은 어린이들에게 반드시 읽혀야 하는 교육용 자료로 인식되지만, 만화는 오히려 비교육적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 교과서에 동화나 동시는 필수 갈래로 채택되고, 그 창작 방법을 교육하며 읽기 지도뿐 아니라 쓰기 지도도 이루어져왔지만, 만화는 잘 실리지도 않을뿐더러 어쩌다 실려도 문학작품의 각색 만화나 삽화 같은 도구적 갈래로 사용되어온 현실을 상기해보아도 금방 알 수 있다. 2000년대 이후, 에듀테인먼트 콘텐츠가 교육 상품으로 인기를 끌면서 학습동화와 학습만화는 더 활발하게 창작되고 있다. 이른바, 지식과 정보를 재미있는 동화나 만화로 창작하여 노는 기분으로 지식과 정보를 습득하게 하려는 전략인데, 학습동화보다 학습만화가 훨씬 인기 있다. 그 대표적인 성공 사례로 만화 <마법천자문>을 들 수 있다. 2003년에 발간된 <마법천자문>은 아직도 3개월에 한 권씩 출간되고 있다. 그 제1부에 해당하는 이야기가 마무리될 즈음인 2010년 이후에는 극장판 애니메이션, TV 애니메이션, TV 드라마, 뮤지컬 등으로도 각색되었고, 이후에도 보드 게임, 컴퓨터 게임 등 다양한 파생 상품이 나왔다. 2003년 이후 어린이를 양육한 가정의 서가에서 <마법천자문>을 쉽게 발견할 수 있듯이, <마법천자문>은 명작 동화처럼 필독서 대접을 받아왔다. 한자 교육을 시켜야겠다는 부모의 의도와 재미있어 하는 아이들의 반응이 드물게 일치한 책이기 때문이다. <마법천자문>이 어린이의 한자 학습에 얼마나 도움이 되었는지는 증명하기 어려울 것이다. 다만 <마법천자문>이 많은 어린이들에게 20년 이상 사랑받아온 비결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잘 만든 만화여서라고 자신 있게 답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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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법천자문> 출처:아울북
하지만 잘 만들지 못한 콘텐츠도 매우 많다. 그림 수준이 조악할 뿐 아니라 전달하려는 지식과 정보도 엉터리인 경우가 많다. 한때 입시용 필독서로 한국대표문학선집들이 우후죽순처럼 출간되던 시절, 만화로 각색한 책을 본 적이 있다. 어느 중학생에게 부모가 소설로 읽기는 어려우니 만화로라도 읽으라고 사준, 30여 권이 넘는 방대한 선집이었다. 그 중학생이 이상의 <날개>를 재미있게 읽었다고 하여 살펴보니, 인물의 피상적 모습과 행동만 그려서 그 만화를 보고선 도저히 <날개>를 안다고 할 수 없었다. 학생이 재미있어한 점도 스토리는 전혀 파악이 안 되지만, 주인공 남성 인물이 아기처럼 기저귀를 차고, 부인의 화장대에서 화장품을 갖고 노는 장면이 애니메이션 <짱구는 못말려>(*주9)의 짱구처럼 여겨진 때문이었다. 이와 같이 잘 만들지 못한 콘텐츠여도 어린이들은 만화라면 좋아하고, 그래서 잘 팔린다. 동화나 소설과 달리 이야기를 다 이해하지 못하고 중간에 이상한 그림들이 있어도 재미를 주는 장면이 하나라도 나오면 즐겁고, 그에 대한 기대감으로 계속 책장을 넘긴다. 문제는 이러한 아이들의 감수성을 상업적으로만 이용하는 기획이 많아지고 있다는 점이다.
*주9: <짱구는 못말려>는 우스이 요시토의 연재만화 <크레용 신짱>을 원작으로 한 일본 애니메이션이다. 한국에서는 1999년부터 현재까지 방영되고 있다. 나무위키.
다매체 시대의 아동문학과 만화
디지털 매체의 발달로 요즘 어린이들은 아동문학보다 훨씬 재미있는 콘텐츠들을 유튜브나 다양한 웹 플랫폼에서 향유하고 있다. 이제는 전래동화도 책보다 <핑크퐁>(*주10)에서 제작한 영상으로 감상하고 있다. 만화도 잡지나 단행본보다 웹툰으로 감상하기가 훨씬 용이해졌다. 그런데 주요 웹툰이나 웹소설 플랫폼은 15세 이상 볼 수 있는 작품이 많고, 어린이 독자를 별로 고려하지 않고 있다.
*주10: <핑크퐁>은 대한민국의 교육 엔터테인먼트 기업인 ‘더핑크퐁컴퍼니’의 대표 브랜드이다. 나무위키.
어린이 전문 웹툰 플랫폼으로는 2016년에 만들어진 ‘아이나무툰’ 정도만 보인다. 요컨대 다매체 시대가 되어 종이만화가 줄면서 웹툰화하지 못한 어린이만화는 오히려 감소한 건 아닌지 의구심이 든다. 대신 아동문학이 만화화하는 경향이 있다. <크리에이터 가디언즈>(*주11)처럼 내용과 삽화가 만화적인 판타지 동화가 늘고 있고, 연속물로 제작될 만큼 어린이들에게도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저학년 판타지 동화가 아닌, 아동소설이나 청소년소설도 내용은 만화적이지 않지만 표지는 대개 만화체 그림을 쓰고 있다. 그래서 표지만 보아선 아동소설과 청소년소설이 구분이 안 가는 경우도 많다. 한마디로 아동청소년문학 출판에서 만화체 그림이 유행하고 있다. 왜 그럴까?
*주11: 유티 글, 달상 그림, <크리에이터 가디언즈1>, 미래엔아이세움,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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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리에이터 가디언즈> 출처:미래엔아이세움
혹자는 그 이유로 최근 아동청소년문학의 장르물화 경향을 떠올릴 수 있다. 하지만 이금이의 현실에 밀착한 성장소설 <너도 하늘말나리야>(*주12)도 2021년 개정판 표지가 만화체인 걸 보면 그 답은 적절치 않다. 필자가 생각하기엔 어린이, 청소년들에게 ‘이 책이 재미있다’는 기대와 환상을 주기 위해서인 것 같다. 학습만화처럼 어린이, 청소년을 유혹하기 위한 도구로 만화체 그림과 삽화를 활용하는 것 같다. 앞에서 여러 차례 반복했듯이 어린이들이 만화를 좋아하니 말이다. 요컨대, 어린이는 예전부터 지금까지 변함없이 만화를 좋아한다. 하지만 한국의 교육계나 학계에서 그러한 어린이의 취향에 대해 진지하게 탐색하고 응답한 적이 없다. 그래서 어린이 독자를 고려한 만화나 그 담론은 드물다. 만화는 어린이가 읽어야 할 문학작품이나 알아야 할 지식과 정보를 매개하는 수단으로 공인되고, 표지나 삽화에 유인 수단으로 활용되는 등 주로 도구적으로 쓰이고 있다. 이는 만화, 아동문학, 어린이, 나아가 한국의 문화산업을 전망해볼 때도 바람직하지 않다. 어린이들이 좋아하는 만화를 아동문학과 구분 짓고, 만화에 대한 교양과 이해가 천박한 사회에서 세계의 인재들과 겨룰 만화가, 아동문학가들을 어떻게 양성할 수 있을까? 몇몇 천재들의 업적에 기대어 비슷한 콘텐츠를 양산해내는 병폐를 뿌리 뽑기 위해서도 어린이, 아동문학, 만화에 대한 견고한 편견과 무관심의 벽을 깨트릴 필요가 있다.
*주12: 이금이, <너도 하늘말나리야>, 밤티,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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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너도 하늘말나리야> 출처:밤티
‘만화와 아동문학’에 대한 글을 쓰며 새삼스럽게 환기한 사실이 있다. 어린이는 동화보다 만화를 좋아한다. 그러니 우리 사회에 다양하고 멋진 어린이 만화가 창작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면 좋겠다. 어린이 독자는 벌써부터 기다리고 있으니 말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