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 창작 만화는 자란다
하민석 작가 <기동물기>
맥 바넷, 숀 해리스 작가 <처음 우주에 간 고양이, 피자를 맛보다>
‘어린이’라는 독자
처음 본 어린이 만화를 생각해보니 거실 책장에 꽂혀있던 <맹꽁이 서당> 시리즈와 <아기공룡 둘리>가 떠올랐다. 만화책은 한번 잡으면 종이에 손때가 묻고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봤지만, 아쉽게도 이사를 다니면서 모두 잃어버렸다. 그러나 만화책 속 장난끼 많은 맹꽁이 학동들의 익살스러움, 골탕 먹은 고길동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눈앞에 선하다. 어린이는 어른에 비해 문화생활의 폭은 좁다. 어린이가 어린이로서 공감할 수 있는 캐릭터와 이야기가 있다는 건 분명 즐거운 일이었다. 성인이 된 지금도 가끔씩 둘리를 마주치면 미소가 지어진다. 어릴 적 친구를 만난 것처럼 반갑고 그 시절의 나를 추억하게 한다.
당시엔 어린이 독자를 대상으로 한 만화를 ‘명랑만화’라고 분류했다. 어린이 독자를 위해 어린이의 생활이 주로 그려진 만화다. 만화책에 빠지면 공부를 안 한다고 걱정하던 어른들도 명랑만화 보는 것은 그리 반대하지 않았고, 교실 내 학급문고나 도서관에서도 쉽게 접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96년 온 가족이 보던 만화잡지 ≪보물섬≫이 폐간하고, 청소년, 성인 대상 만화잡지가 등장하며 명랑만화는 급속도로 쇠퇴하기 시작한다. 명랑만화는 현재 어린이 독자를 1차로 고려한 ‘어린이 만화’로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이전엔 어린이 창작 만화가 대세였다면, 지금은 효율적인 지식 전달을 위해 기획되는 ‘어린이 학습만화’가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한다.
어린이 학습만화는 1960년대 어린이 신문을 통해 시작되어 현재에 이른다. 특히 2000년대 등장해 요즘도 출간되는 <마법천자문>, <그리스 로마 신화>, <만화로 배우는 000>, <WHY?> 시리즈 등 스테디셀러의 등장으로 어린이 창작 만화는 상대적으로 시장이 좁아졌다. 물론 어린이 독자도 어린이 학습만화를 좋아하고 즐겨 읽지만 어린이 독자의 선택보단 학부모의 구매력에 초점을 맞춘 기획이라고 생각한다. 재밌게 지식을 습득하는 건 바람직한 공부지만 다양한 감수성을 키워줄 어린이 창작 만화는 분명 필요하고, 독자들도 필요성을 느끼고 있다.
전 세계를 사로잡는 K-웹툰 시대라고는 하지만 웹툰은 청소년, 성인 독자를 주요 소비자로 인식하며 어린이 독자는 상대적으로 소외된 게 사실이다. 전 연령 등급 웹툰이 있지만 어른을 위한 힐링물이거나 덕질을 유도하는 캐릭터성이 강해 어린이의 공감을 이끌기 어렵다. 그나마 다행인 건 시장성은 줄었으나 어린이가 즐기는, 어린이를 가르치지 않는 어린이 창작 만화가 아예 사라져버린 건 아니라는 점이다.
현재 국내 어린이 창작 만화는 어린이 잡지 ≪개똥이네 놀이터≫, ≪고래가 그랬어≫, 어린이 웹툰 플랫폼 <아이나무툰>에서 연재되거나 해외작가의 그래픽 노블 작품이 출판되어 어린이 독자와 만나고 있다. 출판만화는 관심있게 신간을 살펴보고 구매하지 않으면 접하기 힘든 게 사실이지만 뜻밖을 발견이 주는 기쁨이 크다. 어린이 독자에게 추천하고 싶은 두 작품을 소개하고자 한다.
어린이 만화 <기동물기>와 <처음 우주에 간 고양이, 피자는 맛보다>
하민석 작가는 국내 어린이 창작 만화를 논함에 있어 빠뜨릴 수 없는 작가다. 만화 <도깨비가 훔쳐간 옛이야기>, <안녕, 전우치?>, <이상한 마을에 놀러오세요!>, <탐정 칸의 대단한 모험>을 비롯해 최근작 <기동물기>까지 꾸준히 어린이 창작 만화를 발표했다. 그 중 만화 <안녕, 전우치?!>는 고전소설 <전우치>를 모티브로 한국적인 정서를 투영한 판타지물이며 애니메이션 극장판으로 개봉했고, 만화 <탐정 칸의 대단한 모험>은 명랑추리만화로서 어린이 탐정 캐릭터가 대규모 범죄조직 부리부리단에 맞서는 흥미진진한 세계관을 구축해 2021년 앙굴렘 국제만화페스티벌 어린이 만화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2023년 8월 출판된 만화 <기동물기>는 전작들과 달리 명랑함을 뺀 판타지, 미스터리, 공포, 액션 등 다양한 장르를 담은 단편집이다.
불안, 공포, 분노 등 어린이 독자들이 공감할만한 내면 갈등은 기이한 동물과의 만남을 통해 외면화된다. 각 이야기의 주인공이 겪은 기이한 체험은 작가 특유의 유머와 결합하며 독특한 감상을 이끌어낸다. 2022년 뉴욕 도서관, 시카고 도사관에서 최고의 책으로 선정한 만화 <처음 우주에 간 고양이, 피자를 맛보다>(이하 <우주 고양이>)는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작가 맥 바넷과 칼데콧 아너상 수상작가 숀 해리스 작가의 합작품이다. 맥 바넷 작가가 코로나 팬데믹으로 봉쇄령이 떨어져 우울한 어린이들을 위해 라이브 방송을 하던 이야기가 그래픽 노블로 발전했다. 만화 <우주 고양이>는 달을 갉아먹는 침략자 쥐를 단 사흘 만에 막아야 하는 임무를 띠고 달로 날아간 우주 고양이와 달의 여왕, 발톱깎이 로봇 ‘로즈’의 여정을 담았다. 이 작품은 ‘판타스틱 SF 판타지 스펙터클 어드벤처 그래픽 노블’을 표방하며 이것이 비단 거창한 수식이 아님을 증명한다. 끝없이 팽창하는 우주가 무색하게 이야기의 부피도 상상력도 팽창한다. 신기하고 재밌는 건 모두 모아놓은 듯한 영웅담은 어린이 독자는 물론 어른 독자도 빠져들 만큼 매력적이다. 그렇다고 유치하거나 허무맹랑하다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재료가 토핑된 먹음직스러운 피자처럼 군침을 자극하는 만화다.
불안이 불러들인 기이한 체험, <기동물기>
‘기동물’은 기이한 동물의 줄임말로 동물 이름이 붙은 사물 혹은 공간을 의미한다. 작중 등장하는 ‘개구리 볼펜’이나 ‘너구리 동굴’을 예로 들 수 있다. 아이들의 불안을 먹고 사는 것으로 추정되는 기동물은 도심 한켠에 위장하거나 은닉하다가 13세 이하 어린이들 앞에 나타난다. 총 다섯 편의 단편만화에 등장하는 어린이 주인공은 집 안에선 가정 문제, 집 밖에선 교우관계 등 갈등과 오해를 맞닥뜨린다. 갈등의 경험치가 적은 아이들은 불안에 점점 휩싸여 기동물을 불러들여 ‘기이한 체험’을 한다. 기이함의 매력은 통상적 개념이나 인식, 경험을 뛰어넘어 존재하는 무엇, 외부 세계에 대한 매혹과 관계가 있다.(*주1)그것은 시간여행, 이세계로의 유입, 숙명적인 대결 등으로 구현된다. 귀신도 요괴도 아닌 엄연히 존재하는 이들은 비현실성을 동반해 기이한 풍경을 만든다.
*주1: 마크 피셔 저 <기이한 것과 으스스한 것>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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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동물기> 출처:딸기책방
만화 <기동물기>의 어린이들은 현재 상황에 대한 불만과 불안을 해결하고 싶다. 하지만 기동물은 아이들에게 상황을 나아지게 하지 않고 의외의 결말로 끌어들인다. 작중 세 번째 사례로 소개되는 ‘거북이 텐트’은 아이의 불안을 먹는 기동물이 등장한다. 어느 집이나 엄마아빠의 사이가 나빠지면 찬 바람이 분다. 불안한 아이를 발견한 거북이 텐트는 교묘히 아이의 뒤를 쫓고 아이의 눈앞에서만 모습을 드러낸다. 어른도 불안을 스스로 해결하기 힘들다. 아이가 끝내 불안에 잠식당하는 듯한 열린 결말은 오싹한 여운을 남긴다. 좀 더 밝은 톤으로 연출된 ‘고라니 도로’의 주인공 고은이는 아빠와 차로 이동하던 중 고라니를 로드킬한 상황에 놓인다. 고은이 아빠는 고라니 법정에 서게 되고 고은이는 아빠를 구하고자 변호사 고라니와 함께 진실을 추적한다. 고라니가 의인화된 사회는 우화적이지만 진실보다 승리를 추구하는 고라니 법정은 생경하고도 흥미롭다. 스테레오타입의 ‘안전한’ 만화에 익숙해진 독자들에게 분명 새로운 감수성을 자극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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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동물기> 출처:딸기책방
달나라를 구하라는 사명을 짊어진 모험가들, <처음 우주에 간 고양이, 피자를 맛보다>
만화 <우주 고양이>는 인터넷서점 알라딘에서 독자 북펀드를 통해 출간된 작품이다. 독자의 선택과 투자덕분에 다른 독자들도 혜택을 누린 셈이다. 필자는 제목을 읽다가 ‘고양이는 피자를 먹으면 안 되는데’라는 집사적 관점으로 이 책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우주, 고양이, 피자의 상관성은 무엇이며, 왜 많고 많은 음식 중에 하필 피자일까?
‘우주 고양이’는 1957년 소련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2호에 실려 우주로 날아간 개 ‘라이카’가 모티브가 된 캐릭터다. 고양이는 고도의 훈련을 거쳐 실험체가 아닌 지구를 구할 영웅으로서 위풍당당하게 우주선에 탑승한다. 우주 고양이를 비롯한 세 영웅의 여정은 예상외로 쥐와의 전쟁이 아니라 쥐의 요새로 가는 여정에 초점을 맞춘다. 신비한 달나라는 얼음 나라, 천둥 반도, 하모니만, 고요의 바다, 바람의 섬 등 신화와 동화, SF적 세계관이 뒤섞여 크고 작은 모험이 도사리고 있다. 달나라를 구하려는 목적을 위해서라면 몸을 사라지 않는 세 영웅, 달나라를 횡단하며 마주친 수많은 존재들과 달나라의 풍광은 잊지못할 소중한 경험으로 남는다. 발톱깎이 로봇은 그저 ‘로즈’로서 목적 있는 삶을 살기 보다 삶 자체가 목적인 삶을 살고자 다짐한다. 앞서 왜 피자일까 궁금했는데, 피자는 혼자 먹는 것보다 여럿이 먹을 때 더 맛있는 음식이다. 승리의 축제에 꽤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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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 우주에 간 고양이, 피자를 맛보다> 출처:나무의말
어린이 만화의 매력 속으로
사실 어린이 만화에 다시금 관심을 갖게 된 건 불과 몇 년 되지 않았다. 평소 미스터리 만화를 좋아해 ‘명랑추리만화’라는 소개에 끌려 하민석 작가의 <탐정 칸의 대단한 모험>을 보게 된 것이 재입문의 계기였다. 강력사건은 아니지만 상상력을 자극하는 사건을 어린이 탐정의 활약으로 해결하는 과정이 재밌었다. 어린이 만화는 작가만의 개성이 담긴 정형화되지 않은 조형적 심미성이 정체성의 일부라고 생각한다. 만화 <탐정 칸의 대단한 모험>은 볼펜으로 선화를 그리고 물감으로 채색했다. 만화 <기동물기>는 어린이 만화로서는 드물게 흑백만화다. 빈틈없이 완벽한 그림보다 마음이 가는 건 손으로 그린 이야기에서 나오는 감수성 때문이다. 한편, 만화 <우주 고양이>는 그림책작가 손 해리스의 첫 그래픽 노블 작품으로 컷 분할과 구도가 독창적이고 과감하다. 컷선, 펜선, 채색, 명암 등 모든 과정이 색연필만 사용하지만 이야기 챕터별로 변화무쌍한 작화를 선보여 작가의 정성이 느껴졌다.
만화 <기동물기>와 <우주 고양이>는 두 작품 모두 판타지 장르를 바탕으로 다양한 실험을 시도한다. 만화 <기동물기>는 어린이 만화는 밝고 귀엽고 마땅히 해피엔딩으로 끝맺음해야 한다는 통념에서 벗어나 어린이가 겪을 법한 학원 폭력, 가정 불화 등의 해결하기 버거운 현실적인 고민을 등장시키고, 고민을 시원하게 해결하진 않는다. 오히려 기동물을 체험하며 일이 더 꼬이고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맞닥뜨리기도 한다. 세상에는 권선징악이나 인과응보 같은 교훈적인 주제만 있는 게 아니라 궤도에서 벗어난 기이함도 품고 있다고 말하는 것 같다. 만화 <기동물기>가 일상의 판타지를 다룬다면 만화 <우주 고양이>는 먼 우주의 판타지를 다룬다.
이미 인류가 물리적으로 달 착륙에 성공했음에도 달은 여전히 신비한 판타지적인 공간이다. 흔히 끼워넣을 법한 어린이 캐릭터 없이 고양이, 외계인 여왕, 로봇으로 구성된 인외종 삼인방은 지구를 지키고자, 달을 지키고자, 존재의 이유를 찾고자 동행한다. 앞서 살펴보았듯 <우주 고양이>는 영웅담이라기보다 달나라 로드무비에 가깝다. 장르는 거들 뿐 코로나 봉쇄령으로 우울한 어린이들에겐 웃음을 주려는 목적을 충실히 이행한다. 우주라는 공간이 주는 문화적 포용력과 어떤 존재든 어우러지는 범우주적 하모니도 유쾌하다. 이야기에 푹 빠져 캐릭터들이 부르는 노래를 들으려 웹사이트 주소를 입력하는 자신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어린이 만화의 활성화를 기원하며
인터넷서점 예스24 ‘2024년 상반기 베스트셀러 트렌드 및 도서 판매 동향’에 따르면 어린이·유아 분야에서는 ‘실생활 밀착형’ 자기계발서가 큰 인기를 얻었다고 한다. 어린이 학습만화는 이제 지식뿐만 아니라 학교·공동체 생활, 친구 관계, 감정 표현과 관련된 구체적인 가이드 역할도 하고 있다. 어린이 창작 만화는 베스트셀러 순위 안에 오르지 못했지만, 어린이 창작 만화에 애정을 갖고 꾸준히 창작하는 작가와 출판사가 있고, 독자들도 펀딩을 통해 적극적으로 신간을 원하고 있다. 2023년 12월에 출간된 정원 작가의 만화 <똑똑한데 가끔 뭘 잘 몰라>, 2024년 상반기에 출간된 빈반 작가의 만화 <알앓이>, 박윤선 작가의 <클럽 고양이>시리즈 등 제목부터 흥미로운 작품들이 어린이 독자의 선택을 기다리고 있다. 주류 시장이 아닌 비주류 시장의 한계는 있지만, 어린이 독자가 원하는 한 어린이 창작 만화는 영원히 자랄 것이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