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대 어린이 만화가 보여줘야 할 이야기를 담다
반반 작가의 <알앓이>
김보통 작가의 <나비의 모험>
지금은 어린이들도 태반이 스마트폰 게임에 눈이 고정돼 있는 마당이지만 한 시기 어린이 엔터테인먼트의 왕좌를 쥐고 있었던 건 누가 뭐래도 만화였다. 그래서 나와 같이 그 시기를 헤쳐나온 이들에게 만화는 단순한 볼거리를 넘어선 각별한 추억이다. 그러나 그때엔 얼마나 대단한 게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본 것도 아니고, 어른들 또한 만화는 공부에 방해가 되는 게 보통이지만 학습 효과가 있다면 봐줄 만하다 정도로 간주했다.
웹툰과 함께 독자층이 대거 확대된 지금에 이르러서 만화의 독자가 오로지 어린이다, 라고 하면 아니라고 할 만하지만 1990년대까지만 해도 오랜 시간에 걸쳐 사회 전반적인 견지에서 보는 만화의 주 독자층은 어린이였고, 또한 반드시 어린이들이어야 한다고 간주되어왔다. 만화에 불건전성을 논하고 탄압하는 사례가 많았던 까닭은 만화에 그 이외의 대상층을 상정하려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시선은 2000년대에 이르러서도 여전해서, <왜> 시리즈의 확장 증보판이라 할 <WHY?> 시리즈나 한자 교육의 최고봉이라 할 <마법천자문>, 신화 교육용으로 각광을 받았던 <만화로 보는 그리스 로마 신화> 등 어린이용 만화의 대표주자들은 학습 효과를 최고의 덕목으로 내세우고 있었다.
막상 어른이 되어 아이를 낳고 그 아이가 초등학생이 되어놓고 보니 아이들의 읽을거리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는 심경을 일면 이해를 하게 되지만, 한편으로는 유명 게임이나 유튜버들을 캐릭터화한 학습만화들을 보면서 재밌다는 생각과 더불어 이렇게 해야 팔리는구나 하는 심정이 들곤 한다. 당장 내 아이만 하더라도 유명 유튜버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한 학습만화를 보며 과학과 상식을 배운다고 하는 판이니 말이다. 물론 각각에 장점과 특징들이 있기는 하지만 어린이 만화가 추구해야 할 것이 반드시 그뿐이어야만 하는가 하는 의문 앞에서 평생 만화를 읽어온 부모의 고민은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각 만화는 각자의 역할이 있게 마련이지만, 애가 읽을 만한 만화가 지녀야 할 특징이 비단 단편적인 지식을 학습시키는 것만은 아닐 텐데-라는 심정이라고 할까. 그러던 차 때마침 만난 두 작품이 이러한 고민에서 일말의 답을 주었다. 바로 반반의 만화 <알앓이>, 그리고 김보통의 <나비의 모험>이다.
<알앓이>와 <나비의 모험>은 어떤 이야기?
어린이 잡지 ≪개똥이네 놀이터≫에서 각기 2022년과 2019년 장편 연재된 이 두 작품은 공교롭게도 모두 동물이 주인공이다. 동물 캐릭터가 아이들에게 이입할 여지를 더 많이 준다는 사실이야 디즈니 이래로 확실하게 증명이 되어 있는 바지만, 동물 캐릭터를 통해 무엇을 말하고 보여주려 하는가는 방향에 따라 완전히 갈라진다. 관건은 그 안에 인간이 들어가는가 아니면 인간의 역할을 동물에 빗대어 보여주려고 하는가고, 나아가 동물로 인간의 어떤 점을 어떻게 비추어 보여주려고 하는가다.

▲ (좌) <알앓이> ⓒ반반
▲ (우) <나비의 모험> ⓒ김보통
<알앓이>와 <나비의 모험>은 주인공을 동물로 등장시키는 이유를 달리한다. <알앓이>에는 인간은 없이 – 딱 하나, 고대의 괴물이 인간 아기 모습으로 나오기는 하지만 - 의인화한 동물들만 나온다. 작중 모든 캐릭터는 각기 다른 동물로서 각자의 개성대로 살아가고, 만나고, 부딪치며 살아가고 있다. 즉 <알앓이>는 동물로 인간 세상을 비유하고 풍자하는 우화 같은 역할을 한다. 반면 <나비의 모험>은 길고양이 나비를 통해 인간 세상을 관찰한다. <알앓이>가 사실상 동물에 빗대어 그려내는 인간들의 이야기라면 <나비의 모험>은 고양이라는 ‘인간과 다른 존재’의 눈으로 바라본 인간들의 이야기를 보여준다. 양쪽 모두 인간의 이야기지만 접근하는 방법과 경로는 완전히 다르다.
‘알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마음 앓이’라는 뜻을 담은 <알앓이>는 남생이 고목이와 청개구리 겨울이, 아기 고양이 호랑이가 어느 날 고대의 알을 깨워 세상에 복수하려는 악어 라거 박사의 술책에 휘말려 모험을 떠나게 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고목이의 등딱지는 큰 힘이 깃들어 있는데, 라거 박사는 우연히 사로잡은 얼음요정 민트에게서 자신이 사로잡혀 있었던 등딱지의 비밀을 전해 듣고는 이를 훔쳐오게 한다. 작품은 고목이와 그 친구들이 도난당한 고목이의 등딱지를 찾아 나서며 겪게 되는 여러 사건들을 그려내고 있다. <나비의 모험>은 길고양이가 눈사람을 만들던 오누이가 얼음 괴물(눈사람)에게 공격받는다고 착각하고 애들을 보호하겠다면서 나섰다가 느닷없이 함께 살게 되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다. 흔히 고양이 만화라면 주인공인 인간의 관점에서 고양이를 어떻게 돌보고 있는지를 다루게 마련이지만, 이 작품이 그리는 건 인간에게 ‘간택’을 당해 나비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 이 길고양이가 실제로는 어떻든 제 딴엔 이 ‘털도 없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이란 것들을 돌보기로 결심하며 벌어지는 일들이다.
두 작품이 진짜로 말하고자 하는 것
<알앓이>와 <나비의 모험> 모두 아이가 각자 기준 속 미지의 세계에서 겪는 좌충우돌 사건들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지만, 사실 두 작품이 지니고 있는 중요한 특징은 사건 그 자체들보다도 사건을 통해 그려내고자 하는 바와 이를 구성하는 캐릭터들에서 찾을 수 있다. 먼저 <알앓이>를 보면, 고목이는 약간 소심한 성격에 말을 할 수 없어 스케치북에 글을 써서 대화를 나눠야 하고, 겨울이는 피부 색깔이 달라 무리에게서 배척당했으며, 아기 고양이인 호랑이는 알에서 태어났다. 작품의 주요 캐릭터부터가 조금씩 무언가 통상과 다른 면을 지니고 있다. 작품의 주요 사건에서 결정적인 원인이 되는 라거 박사의 경우도, 민트에게 고목이의 등딱지를 훔쳐오게 해 에너지원으로 삼음으로써 고대의 알을 부화해 세계 정복을 하겠다고 외치고 있지만 그 동기를 들춰보면 세상에서 무시당하고 인정받지 못했다는 분노가 강하게 작동하고 있다.
여기에 주인공 셋이 지하창고로 쓰는 고목이의 등딱지는 사실 무한한 공간을 만들 수 있는 고목이네의 가보이자 가족 박물관인데, 그 안에 얼음요정인 민트가 ‘보관’되어 있다가 호랑이의 실수로 깨어났다. 알고 보면 민트가 그곳에 잠들어 있었던 까닭은 얼음요정이 행운을 가져다준다는 미신 때문에 얼음요정 납치가 성행하던 때가 있었기 때문이고, 민트의 친구인 소르베가 장기 자랑 상품이 되어 있었던 것은 물론 주인공들이 천진하게 웃으며 얼음요정이 행운을 가져다 준다 했으니 좋은 일이 생기겠다며 말한 것도 얼음요정들 입장에서는 공포스러운 일일 수밖에 없는 일이다.
민트가 고목이의 등딱지에 갇혀 있었던 일은 고목이가 저지른 일은 아니었지만 그로 말미암아 민트가 자기 동료들과 헤어지게 된 것만큼은 분명하다. 등딱지의 소유주나 소유주가 허락하지 않은 자가 등딱지 속의 창고에 들어갈 수는 없기 때문이다. 민트가 분노하는 지점과 고목이가 분노하는 지점은 서로 강하게 충돌하고 있는데, ‘내가 직접 저지른 잘못도 아닌데 사과할 필요가 있는가?’라는 고목이의 문제 제기에 이르러서는, 독자 뇌리에 둥둥 떠오르는 대목이 있을 것이다. 적어도 한국인이라면 어 그거 아닌데라는 이야기가 떠오를 수밖에 없는 현실의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 <알앓이> ⓒ반반(도판제공:보리출판사)
한편 <나비의 모험>은 나비라는 고양이의 인간 관찰기로, 나비의 의도와 인간의 의도가 맞아떨어질 리 없다는 지점이 이야기의 재미를 만들어내는 중요한 부분이다. 그런데 작품은 나비가 고양이로서 이해하지 못하는 지점을 그려내는 듯하면서, 한편으로는 인간으로서 생각지 못했던 부분들을 들춰내는 식으로 나비의 시선을 이용한다.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오누이 중 동생인 남자애 지완이가 누나인 민송이의 장난감을 갖고 노는 걸로 “야 그건 여자 장난감이란 말이야, 너는 남자 거나 가지고 놀아!”라는 핀잔을 들었다. 그런데 나비는 막상 고양이들 사이에서도 예쁘고 반짝이던 물건을 좋아하던 동네 고양이가 나를 한심하게 봐도 할 말이 없다면서 울 때 까마귀가 “자고로 멋쟁이들이란 아름답고 반짝이는 것에 마음을 빼앗기고 말지요”라면서 뭐가 문제냐는 반응을 받고서 기뻐하는 걸 목격한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 보니, 누나가 동생과 각자의 장난감을 갖고 놀고 있다. 그 모습을 보며 엄마는 “그래 맞아, 장난감이든 무엇이든 좋아하는 데엔 남자 거 여자 거가 따로 없지. 그러니 다른 친구들한테도 그런 걸로 놀리면 안 돼”라고 말한다. 나비는 그 모습을 보며 “자기가 좋아하는 걸 성별에 따라 나누는 건 어리석은 짓이야”라 뇌까린다.

▲ <나비의 모험> ⓒ김보통(도판제공:보리출판사)
<나비의 모험>은 이렇듯 나비의 시선을 빌려 인간의 편견을 꼬집는 한편, 한번 (고양이로서 인간을) 돌보기로 한 이상 끝까지 책임을 져야 한다고 다짐하면서 휴게소에 반려동물을 버리는 식으로 인간들의 책임감 없는 모습을 지적하고, 또한 자신의 해야 할 일에 대해 끊임없이 반추하며, 잘못을 사과하기도 한다. 이러한 책임과 도의에 해당하는 부분은 <알앓이>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나는데, 고목이는 조상의 덕을 받아 등딱지에 깃든 마법을 누렸던 만큼 그 안에 얼음요정 민트가 갇혀 있었던 일에 면죄부를 받을 수 없다는 조언을 듣고 역지사지를 거쳐 민트에게 미안하다며 고개를 숙인다. 이해와 책임 그리고 진심 어린 사과라는 과정은 어른들의 세상 속에선 사실상 거의 실종되다시피 한 덕목이다. <알앓이>와 <나비의 모험>은 방향은 다소 다르지만 동물 캐릭터를 통해 ‘인간’인 우리에게 명확히 말하고 있다.
가르지 마라, 편견을 품지 마라, 내가 힘들다고 함부로 남에게 피해를 줘도 되는 건 아니다, 잘못을 했다면 피하지 말고 진심으로 고개를 숙여라. 그렇게 한다면 우리는 모두 친구가 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으며, 가족이 될 수 있다-라고.
지금 이 시점 우리에게 필요한 어린이 만화
사실 <알앓이>와 <나비의 모험>은 다소 단점이 있는 작품이다.<알앓이>는 ‘나를 무시하는 놈들 앞에서 연구 결과로 고대의 힘을 끌어내어 세계정복을 하겠다’라는 거창한 분노를 투사하는 박사가 나오지만 소재의 스케일에 비해 인물이나 사건들은 너무 소박하며, <나비의 모험>은 보여주고자 하는 작가의 메시지가 겉에 드러나 있는 구석이 있다. 그러나 이들 작품이 그러한 단점들에도 의미가 있는 까닭은 저런 단점을 보는 관점이 지극히 어른의 시선이기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무엇보다 지금 이 2020년을 전후한 시기에 유아기와 어린이 시기를 보내고 있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이야기를 더없이 명확하게 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 (좌) <알앓이> ⓒ반반
▲ (우) <나비의 모험> ⓒ김보통
우리 주변에는 다르다는 이유로 배척당하고, 특정 성의 구분으로 대상을 판단하며, 여자를 대상으로 한다고 하면 무시하거나 마음대로 들이대도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본성이 그렇다고 치부하면 편하겠지만, 인간이 사회적 동물일 수 있는 여러 이유 중 하나가 바로 배우고 깨우침으로써 사회 안에서 함께 살아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두 작품의 작가들이 동물에 빗대어 등장시킨 캐릭터들은 좌충우돌을 하지만 결국 다르다는 것이 별문제가 되지 않는 사회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며, 여성을 비롯해 모두가 동등한 입장에서 존중받을 필요가 있음을 역설하고 있기도 하다.
아이들이 자라가는 데에는 수학 문제 하나 과학 상식 하나도 중요하지만, 모두가 다르지 않고 존중받아야 한다는 관점을 수업 바깥에서 배우는 것도 중요하다. 아닌 게 아니라 <알앓이> 속에 등장하는 모계로 이어 내려오는 가보라는 설정이나 색깔 및 크기로 다양성을 드러낸 동물 캐릭터, <나비의 모험> 속에서 맞벌이인데도 엄마에게 가사노동이 몰리는 점을 지적하는 등의 이야기는 몇 세대는 족히 심각한 차별주의와 사회적 약자 혐오에 오염돼 있는 지금의 우리 사회에서 더 대물림해선 안 될 부분에 대한 경각심을 보여준다. 덩치만 커진다고 다 성장이 아니다. 우리 사회의 반목과 가르기는 구성원들이 오롯이 성장할 기회를 놓친 결과물이다. 이런 작품들은 바로 우리가 놓친 성장에 대한 결손을 채워줄 부분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