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류승완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더라면 어땠을까. 영화 <전설의 주먹> 중반 즈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영화 속 격투 리얼리티 프로그램 ‘전설의 주먹’이 차용한 XTM 격투 프로그램 ‘주먹이 운다’에서 류승완의 동명 영화가 떠올라서일지도 모르겠다. 또 영화 속 임덕규와 이상훈이 부딪히는 장면에서 역시 최민식과 류승범이 맞붙은 <주먹이 운다>의 결승전이 떠올라서일지도 모르겠다. 혹은 폭력의 재생산이라는 원작 웹툰의 문제의식을 풀어내기에 <부당거래>의 정서가 들어맞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영화를 보며 이런 잡념이 침입한 가장 큰 이유는, 연출을 맡은 강우석 감독의 세계에 도무지 몰입할 수 없어서였다.
웹툰 <전설의 주먹>이 영화화된다고 했을 때, 그리고 그 감독이 강우석이라는 소식을 들었을 때 기대감을 품은 이가 나 뿐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원작의 선 굵은 이야기와 강우석이라는 거대한 이름값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그는 <이끼>의 감독이었다. <이끼>가 웹툰 원작의 정서를 가장 잘 이식한 작품은 아니다. 모든 웹툰 원작 영화를 통틀어 원작의 재미와 감동을 스크린에 성공적으로 이식한 건 강풀 원작의 <그대를 사랑합니다> 정도다. <이끼>가 흥미로운 건, 윤태호라는 만만치 않은 창작자의 이야기를, 역시 만만치 않은 창작자인 강우석 감독이 자신의 스타일로 고집스럽게 밀어붙여 제법 성공적으로 완성해낸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사실 마지막의 반전 외에 영화 <이끼>의 이야기와 캐릭터는 원작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영화는 감독의 흔들림 없는 뚝심 덕에 온전히 ‘강우석의’ <이끼>일 수 있었다. 원작이 이장 천용덕과 마을 사람들이 공유한 비밀에 방점을 찍고 이 기묘한 동거가 어떻게 시작됐고 그것이 주인공 류해국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조금씩 얼개를 맞춰나가는 미스터리라면, 영화 <이끼>는 처음부터 류해국의 아버지 류목형이 어떻게 천용덕을 만나 마을을 세우게 됐는지 보여주며 시작한다. 류해국에게 진실을 알려주겠다고 말하는 하성규의 꼬드김은 그래서 원작에서만큼 관객을 유혹하지 못한다. 이미 원작을 읽은 준비된 관객에 대한 전략이었을까. 알 수 없지만, 숨을 참으며 다음 장면을 기다리는 미스터리로서의 장르적 긴장감이 거세된 상태에서 강우석은 이 공백을, 배타적인 에너지가 뿜어져 나오는 인물들에게 둘러싸인 주인공이 역시 거칠게 부딪쳐 문제를 헤쳐 나가는 터프한 질감으로 채워버린다. 핵심 모티브는 수수께끼의 해결이 아닌 류해국 대 마을 사람들의 대결로 전환되고, 천용덕의 죽음 역시 마을 역사의 종언이라기보다는 류해국과 류목형에 대한 패배처럼 그려진다. 원작에서 의심도 고민도 많던 박민욱 검사가 영화에선 좀 더 주관이 뚜렷하고 표현에 솔직한 조력자로 그려지는 건 우연이 아니다. 류해국에게 자백을 강요했던 전적만 빼면, 그는 원작의 박민욱보다는 오히려 <공공의 적 2>의 강철중 검사를 닮았다. 덕분에 원작처럼 여기저기 뿌려져 있던 퍼즐 조각들이 하나의 그림을 완성하는 쾌감은 덜하지만, 한정된 러닝타임 동안 관객을 엔딩까지 밀어붙여 납득시켜버리는 직진의 에너지는 놀라웠다. 원작에는 없던 반전도, 이 직선주로를 쭉 따라가다가 만난 것이기에 더 충격적일 수 있었다. 요컨대 <이끼>는 원작의 장점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연출자의 서명을 어떻게 영상에 새겨 넣을 수 있는지 보여주는 성공적인 사례다. 그리고 같은 이유로 <전설의 주먹>은 실망스럽다.
원작에는 없는 프로 격투가 제이슨의 과장된 말투를 비롯해 <전설의 주먹> 속 대사와 설정들이 얼마나 촌스럽게 느껴지는지 말하려는 건 아니다. 임덕규에게 건들건들 시비를 거는 고등학생 양아치들의 헤어스타일과 말투는 90년대 <비트> 속 임창정의 연기와 비교해도 훨씬 올드하고, 재벌가 회장인 손진호의 안하무인적인 태도도 현실적인 질감이 떨어지지만, 사실 그게 뭐 중요한가. 강우석의 영화는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언제나 영화적이었다. 블랙코미디에 가까웠던 <투캅스>도 현실 속 비리 경찰의 문제를 꼬집고 환기하기보다는 적극적으로 웃음을 뽑아내는데 열중했다.
<투캅스>의 조 형사가 이중적 생활에도 불구하고 밉지 않았다면, 그의 인간적 고뇌를 그려내서가 아니라 그가 철저히 영화 속에만 존재할 것 같은, 혹은 존재할 수 있는 캐릭터이기 때문이다. 강우석의 가장 탁월한 작품 중 하나인 <공공의 적>의 강철중은 어떤가. 그는 정의 실현에는 관심도 없고, 범죄자들의 마약을 빼돌려 한 몫 잡으려는 타락한 경찰이지만 사실 영화에서 중요한 건 그의 비리 경력과 그것을 가능케 한 공권력의 메커니즘이 아니다. 강철중의 프로필은 그가 정의감이 아닌 성깔로 진짜 나쁜 놈을 (말 그대로) 때려잡는 과정의 쾌감을 배가시키는데 복무한다. “너희를 공공의 적으로 부르기로 했다”는 대사가 촌스러운 건 사실이지만, 이런 대사를 태연히 읊고 나쁜 놈들에게 돌진하는 강철중에게서 오직 영화에서만 가능한 어떤 후련함을 느낄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여 <전설의 주먹>에서 종종 등장하는 감정 과잉의 대사들은 조금 거슬리되 문제가 되진 않는다. 자타가 공인하는 상업영화의 마이스터인 강우석은 다분히 영화적인 악역과 다분히 영화적인 주인공이 부딪힐 때의 쾌감을 효율적으로 뽑아내왔다. 링 위에서의 싸움을 속죄와 구원의 과정으로 풀어냈던 원작을, 아직 죽지 않은 40대 남자의 자존심 대결로 치환한 건 그래서 충분히 납득할 수 있다. 원작에서 육두문자를 입에 붙이고 사는 거친 막노동꾼이었던 임덕규는 영화에선 순둥이 국수집 주인이 되고, 평범한 샐러리맨이던 이상훈의 직위는 간도 쓸개도 빼놓고 남의 비위 맞추는 기업 홍보팀 부장으로 설정된다. 이처럼 전설의 주먹들이 세월의 흐름 속에 자존심도 분노도 억누르며 살아야, 그 주먹의 봉인이 해제될 때의 쾌감 역시 배가된다. 다시 말하지만, 강우석은 이러한 영화적 재미를 향해 우직하게 돌진하던 감독이다. 과거형인 건, 이번 <전설의 주먹>에선 그러지 못했다는 뜻이다.
가령 앞서 언급한 양아치들과의 싸움에서 임덕규는 딸을 제대로 지키지 못한 자책감에 떨며 주먹을 쓴다. 그토록 밉살맞던 캐릭터들을 압도적인 힘으로 두들겨주지만, 과거 <공공의 적>에서 교통순찰을 보던 강철중이 조직폭력배 몇 명을 밟아줄 때의 후련함이 느껴지지 않는 건 그래서다. 시원한 무언가가 터져 나오길 기대할 때마다 <전설의 주먹>의 인물들은 주저하고 자책한다. 임덕규와 이상훈의 첫 맞대결은 제 컨디션이 아닌 덕규 때문에 맥이 풀리고, 친구이자 상사인 철들라고 일갈하던 상훈은 당장 기러기 아빠로서 가족에게 돈 부쳐줄 게 막막하다. 마지막의 ‘전설 대전’에서 덕규가 상훈과의 싸움을 포기하는 순간에도 ‘전설의 주먹’을 비롯한 미디어에 제대로 엿을 먹이기보다는 그럭저럭 무난한 합의를 본다. 그들은 가족을 위해 잊고 있던 자존심을 위해 케이지 안에 들어가지만 승부는 케이지에서도 그 바깥에서도 그다지 명확하게 그려지지 않는다.
강우석은 학원 폭력의 문제에 대해, 기러기 아빠의 비애에 대해, 가해자로서의 죄책감에 대해 이야기해선 안 된다는 건 아니다. 문제는 이러한 주제들이 모두 피상적인 수준으로 다뤄지며 어느 것 하나 전체 맥락에 녹아들지 못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이야기의 흐름을 방해하는 장애물로 전락한다는 것이다. <실미도>를 생각해보라. 684 부대가 탄생하게 된 분단 정세와 그 안에서 만들어진 반공 이데올로기의 윤리적 문제에 대해 이 영화는 굳이 질문하거나 고민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국가로부터 버림 받은 684 부대원들의 배신감과 울분에만 집중하며 관객으로부터 강력한 연민을 끌어낸다.
윤리적 차원에서 비판할 지점이 없는 건 아니지만, 분명 이것은 강우석 영화의 힘이다. 그에 반해 <전설의 주먹>은 너무 많이 두리번거린다. 왕년의 전설이라는 것이 사실은 추악한 진실을 파묻은 곳에서 만들어졌다는 걸 보여준 원작처럼 폭력에 대한 성찰을 보여주기에는 너무 강우석 스타일로 인물과 배경을 뜯어고쳤고, 뜯어고친 것 치고는 어느 것 하나 강우석의 스타일로 밀어붙이지 못한다. 이러한 어정쩡함으로는, 원작의 팬도 새로운 영상을 기다린 관객도 만족시킬 수 없다. <이끼>의 성공과 <전설의 주먹>의 실망스러움은 그래서 앞으로 나올 웹툰 원작 영화들이 참고해야 할 단순하되 명확한 진리를 보여준다. 때론 잘하던 걸 잘하는 게, 많은 욕심을 부리는 것보다 나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