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때로 어떤 선택은 그 고민의 깊이를 재어보게 만든다. 매 끼니의 메뉴를 정하거나 퇴근길의 교통편을 선택하는 건 진학이나 결혼, 육아 문제와 달리 심사숙고할 필요가 없어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루가 차곡차곡 쌓여서 인생을 만들듯 일상 속 사소한 결정이 하나 둘 모여서 지금의 나를 만드는 법이다. 나이를 먹고 어쩌다 어른대접을 받게 되면 비로소 그 때의 선택으로 만들어진 나 자신을 돌아보며 자문하게 된다. 그동안 나의 선택으로 이뤄진 나는 더 좋은 나일까? 아니면 여전히 그대로인 나인가?
일본 만화가 마스다 미리의 <지금 이대로 괜찮은 걸까?>는 30, 40대를 지나는 여성이라면 한번 쯤 마음속에서 고개를 드는 질문들을 담담하게 던진다. 지금 이대로 괜찮은 걸까? 결혼하지 않아도 괜찮을까? 내가 정말 원하는 건 뭐지? 객쩍은 소리라고 마음 속 저 깊은 곳에 다시 묻어버리려고 하지만 지친 퇴근길을 걷거나 혼자서 TV를 볼 때, 친구의 애인이 왠지 괜찮아 보일 때면 슬금슬금 수면 위로 떠오른다. 마스다 미리는 그럴 때마다 혼자서 고민하고 불안해하는 독자들에게 손을 내밀며 위로한다.
<지금 이대로 괜찮은 걸까?>는 30대 중반의 미혼여성 수짱을 주인공으로 한 만화이다. 수짱과 친구들을 내세운 만화는 이외에도 <결혼하지 않아도 괜찮을까?>, <아무래도 싫은 사람>, <수짱의 연애> 등 이른바 수짱 시리즈라고 불리며 일본과 한국에서 큰 인기를 모았다. 수짱 시리즈는 실사 영화로 제작될 정도로 사랑을 받으며 마스다 미리를 베스트셀러 작가로 등극시켰다. 작가는 지금까지도 만화, 에세이, 어린이책 등 다양한 작품을 선보이며 활동영역을 넓히고 있다.
30대 중반의 미혼여성 수짱은 카페에서 일하는 평범한 직장인이다. 하루 종일 여자들과 부대끼는 일터에서 빠져나와 혼자서 저녁을 먹을 때 쯤, 수짱은 마음속의 고민을 하나씩 꺼내든다. 어떻게 하면 더 좋은 내가 될 수 있을까? 더 좋은 나라는 건 어떤 모습일까? 지금보다 더 나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지금 이대로 괜찮은 걸까?>에서 수짱과 함께 등장하는 마이코도 유부남 남자친구를 사귀는 30대를 넘긴 직장여성이다. 영업직인 마이코는 눈치 없는 상사와 사이좋게 지내며 만면에 웃음을 띤 채 일에 열중한다. 그러다가도 집 안에 들어서면 마음대로 방귀를 뀔 수 있는 자유를 즐기지만 양배추 반통씩밖에 살 수 없는 처지를 아쉬워한다. 이처럼 같은 일과를 반복하는 도시인, 수짱과 마이코는 더 나은 내가 되기 위해 고민한다.
내 인생의 센스 앤 센서빌리티
<지금 이대로 괜찮은 걸까?>는 웃는 얼굴과 그 뒤에 감춰진 진심의 간극을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직장에서는 물론이고 절친인 수짱과 마이코조차 둘이서만 저녁을 먹는 자리에서도 좀처럼 속내를 털어놓지 않는다. 직장에서 누가 말썽인지, 너무 미워서 죽어버렸으면 좋겠다는 험담조차 하지 않는다. 수짱의 편안한 표정 뒤에는 ‘설교 좋아하고 충고 좋아하고 생색내기 좋아하는 사람. 너무 싫다. 너무 싫다.’라는 글로 거친 마음을 드러낸다. 마이코도 상사와 영업일을 하다가 뜬금없는 주말 초대에 ‘최악’이라고 쓰인 마음을 미소 띤 얼굴로 가린다.
수짱과 마이코는 이성과 감성의 줄타기를 매일매일 타고 있다. 어떨 때는 능숙하게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데 성공하지만 또 어떤 때는 혼자서 울음을 터뜨리기도 한다. 나이 어린 아가씨들과 함께 일하는 수짱은 ‘직장에서 마음을 열 필요는 없다’라고 여기며 아르바이트생과 점장 사이에서 균형을 지킨다. 어린 아르바이트생들의 서비스도 중요하지만 직장에서의 질서도 잃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수짱의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태도는 고민을 불러일으킨다. 이성을 가지고 중립을 지키려는 내가 진짜 나인지 의심을 하게 만드는 것이다. 아르바이트생에게는 어른스럽게 보이는 수짱과 그런 태도를 인식하는 또 다른 수짱 사이에서 가장 이상적인 자아가 무엇인지 고민한다. 마이코 또한 회사 안에서는 한결같이 프로페셔널하게 일하지만 능력을 뽐내기 위해 상사의 반려동물에게까지 자신을 낮추지 않겠다고 결심한다. 이성적으로 일에 매진하는 마이코도 자신만의 법칙을 세우며 현실에 함몰되지 않겠다는 소신을 세운 것이다.
누구나 이성과 감성 사이에 고민할 때가 있지만 그 중간에서 객관적으로 자신을 바라보게 되는 시기는 많지 않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정신적으로 성숙해지더라도 종종 내가 어떤 사람이 되어가고 있는지 깨닫지 못할 때도 있다. 수짱과 마이코는 엄격한 현실을 버티게 해주는 이성과 차가운 이성의 가면 속에 지쳐가는 감성 사이에서 갈등과 고민을 반복한다. 두 사람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이성적인 태도만으로 살기엔 정서적으로 촉촉하다. 그러나 함부로 감정을 드러내다간 사회적 비난과 현실적 불이익을 감당해야하는 것도 잘 알고 있다. 딱딱한 가면 속에서 ‘최악이야, 싫어’를 소리치지만 그런 최악의 자신마저 끌어안으며 온전히 받아들이고 조금씩 성숙한 내면을 발견한다. 마스다 미리는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은 나, 그럼에도 변하고 싶지 않는 나,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괴롭지만 그 수많은 나도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을 때 나만의 행복이라는 고민의 해답에 좀 더 가까워지는 것이라고 말한다.
미래의 좋은 나대신 지금 이대로의 내가 더 좋아
마스다 미리의 만화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평범한 생활이 주는 힘을 부정하고 나태해지려는 태도를 미화한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주인공들의 마음을 잠식하는 고민들이 마치 쓸데없는 버릇처럼 반복되어 지루하게 느껴진다고도 말한다. 그러나 수짱과 친구들이 원하는 삶은 비범한 인생도, 극적인 변화에서 얻어진 행복도 아니다. 일본의 30, 40대 미혼여성을 패배한 개라는 뜻의 ‘마케이누(負け犬)’라고 부르는 사회적 시선을 수짱과 친구들이 웃으며 넘길 수 있는 이유는 매일매일 더 나아지려고 노력하는 자신에게서 나온다고 믿기 때문이다. 농담처럼 가볍게 던지는 무례한 말에서부터 불안한 경제적 문제, 임신과 육아에서 멀어지는 미래를 견디려면 무엇보다도 온전한 내 자신을 만들어야한다. 자신을 소모시키며 사는 팍팍한 도시 생활 속에서 온전히 자신을 지키고 보듬으려는 인생이 반드시 현실의 잣대에 따르는 삶일 필요는 없는 것이다. 결혼하지 않아도, 아이를 낳지 않아도 행복해질 수 있다는 믿음은 나를 잃지 않는 주체적인 삶에서 비롯된다. 수짱과 친구들은 내 자신을 돌아보고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다시 점검하는 것은 누구나 거쳐야 될 인생의 관문이자 시험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이 바로 섰을 때 수짱과 친구들은 움직이기 시작한다. 마이코는 진실된 미래를 위해서 남자친구와 절교를 선언한다. 수짱은 혼자 좋아했던 나카다 매니저가 이와이와 결혼한단 소식에 마음 깊이 절망하고 울음을 터트린 뒤 다시 하루를 시작한다. 그리고 새로운 문이 수짱에게 열린다. 마스다 미리의 만화는 주인공들이 가진 의식적 문제풀이의 반복으로 진행된다. 인물간의 갈등과 극적인 요소가 가장 강하게 드러나는 <아무래도 싫은 사람>에서조차 격한 대립과 사건은 벌어지지 않는다. <지금 이대로 괜찮은 걸까?>에서 수짱을 성숙하게 만드는 건 일상의 변화가 아니라 인식의 변화이다. 이 인식의 변화 또한 얄미운 이와이와 무뚝뚝한 점장과의 갈등에서 비롯되지 않는다. 오로지 기계적으로 같은 일과를 반복하는 수짱의 고민에서 벌어진다. 이 고민이 절정에 다다를수록 수짱의 철옹성 같은 이성도 무너져서 눈물을 쏟게 만들고 고민이 해결되면 수짱에게도 또 다른 기회가 주어진다. 마스다 미리는 수짱의 성숙해지는 과정을 극적인 사건구성이나 독특한 인물 간의 갈등 해결이 아닌 우리 주위에서 매일 겪을법한 일상 속 문제풀이로 엮어냈다. 이런 구성기법은 과장된 만화적 표현과 상투적인 사건설정에 부담을 느끼는 비 만화독자들조차 팬으로 만들 정도로 대성공을 거뒀다.
<지금 이대로 괜찮은 걸까?>는 아직은 말랑말랑한 어른들이 성숙함과 프로페셔널함을 요구하는 사회 속에서 이성의 가면에 가려진 감성을 잃지 않고 현실을 버티는 이야기이다. 전쟁 같은 하루를 마쳐도 변하는 것은 없다. 고민을 한다고 더 나은 삶을 얻는 것도 아니고 해답을 얻는다고 해서 행복을 쥐는 것도 아니다. 다만 볼품없는 나 자신이라도 온전히 보듬고 받아들일 수 있는 법을 깨닫게 해준다. 더 좋은 나란 다른 누군가의 행복을 쫓아가는 것이 아니라 게으르거나 짜증나게 굴어도 그것이 나란 존재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마스다 미리는 냉혹하고 눈물 없는 도시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강력한 무기이자 안락한 쉼터는 바로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