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극장가의 화제작 가운데 하나인 <스캔들 : 조선남녀상열지사>는 조선 시대 양반사회의 모습을 이전과 다르게 볼 수 있도록 만든 영화로, 개인적으로 시선을 끌어 당긴 부분이 있다. 영화 초반과 후반부를 비중 있게 차지하는 빨간 딱지의 ‘금지’라는 보이지 않는 표식을 달고 있어서 더욱 자극적인 호기심을 유발시키는 만화책. 만약 실제로 그 당시에 만화책이 있었다면, 우리나라 만화 문화의 현황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아니, 실제로 있는데 후손들이 못 찾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은, 일본에서 ‘만화의 아버지’로 불리는 카츠시카 호쿠사이가 그 무렵에 활동했기 때문이다. 인상파 화가, 고흐조차 열광했던 카츠시카 호쿠사이는 1814년에 <호쿠사이 만화> 1집을 발표했다. 효과선을 넣어 움직임의 빠르기를 표시했고, 시간의 경과를 나타내기 위해 화면의 칸을 나누는 시도를 했다. 그래서 일본은 근대만화의 시조로 그의 작품을 꼽고, 카츠시카 호쿠사이를 ‘만화의 아버지’라 부르고 있다.
일본 만화의 200년 역사가 일본 애니 100년의 역사를 만든다.
지금 중장년층의 나이라면, 조금씩 모양을 달리 그린 그림을 묶어 한 번에 넘기면서 연속동작의 효과를 얻었던 어린 시절 놀이를 추억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의 과자나 껌 속에 들어 있는 장난감과 파워딱지처럼, 30년쯤 전에는 소형 포스트잇 크기의 두툼한 종이뭉치가 들어 있었는데, 아이들은 마냥 신기해 하며 그걸 빠르게 넘겨 움직임을 감상하곤 했다. 그리고 이 가운데 일부는 곧바로 직접 그것을 만들어 보기도 했다. 그러니 이미 카츠시카 호쿠사이의 만화에서 조짐을 보였던 ‘움직이는 만화’에 대한 흥분과 기대는 일본에서는 더욱 광범위하게 조성되어 있었고, 1895년 영화가 탄생하면서 더욱 뜨거워졌다.
라틴어 ‘anima(영혼)’에 기원한 ‘Animation(동화상)’은 1908년 프랑스의 에밀 콜이 세계 최초로 공인된 애니메이션 <판타즈마고리>를 선보이면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미국과 러시아, 스페인, 영국 등이 속속 애니메이션 제작에 힘을 쏟은 20세기 초반, 아시아 최초의 애니메이션은 1917년 일본에서 만들어졌다. 시모카와 오텐이 분필로 그린 <문지기 이모카와 무쿠조>는 일본, 아시아 최초의 단편 애니메이션이 되었고, 같은 해, 기타야마 세이치로와 코우치 쥰이치 역시 애니메이션을 발표해 이들 3명은 일본 애니메이션의 선구자가 되었다. 카츠시카 호쿠사이의 만화책이 나온 이후 100년여 만의 일이다. 1910년을 즈음해 일본에 들어온 해외 단편 애니메이션들은 풍자 만화가였던 시모카와, 서양화가였던 기타야마, 만화가인 코우치의 활동세계를 바꿔놓았고, 기타야마는 1921년 일본 최초의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인 ‘기타야마 영화 공장’을 설립하기에 이르렀다. ‘기타야마 영화 공장’은 이후 일본에서 주목할 만한 초기 애니메이션 작가들을 다수 배출하였는데, 그들이 바로 일본 애니메이션의 1세대라 부를 수 있는 야마모토 사나에, 오후지 노부로, 무라타 야스시 등이다.
선구자 3인보다 10살쯤 터울이 있는 이들은 ‘최초’의 애니메이션들이 보여준 실례를 토대로 적극적인 작품 활동을 하기 시작, 야마모토 사나에는 1924년 <토끼와 거북이>, 1928년 <일본 제일의 모모타로>를 내놓았다. 무성 애니메이션인 두 작품 가운데 전자는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이솝우화인 토끼와 거북이의 경주를, 또 후자는 일본 오카야마의 유명한 전설을 토대로 하고 있다. 복숭아에서 태어난 모모타로(桃太郞, 복숭아 아이)는 힘이 천하장사여서 영주의 요청에 따라 도깨비 섬으로 떠나 도깨비를 물리치고 보석을 얻어 온다는 줄거리. 오후지 노부로는 독일 애니메이션에 영감을 얻어 1927년 실루엣 애니메이션인 <고래>를 발표했고, 이것은 프랑스로 수출되기도 했다. 야마모토 사나에의 친구이기도 했던 무라타 야스시는 미국 애니메이션에 반해 종이 커팅 애니메이션 기법으로 <원숭이의 풍어> 등을 제작했다.



‘움직이는 만화’의 신기함에 매료되어 그 표현기법을 익히고 일본화하려는 1세대의 노력들은 20세기 일본 애니메이션의 붐을 가져오는 거름이 되었다. 특히 ‘재패니메이션의 아버지’라 불리우는 마사오카 겐조는 1913년 미국에서 만들어진 셀 애니메이션 기법과 1928년 월트 디즈니가 만든 세계 최초의 토키 애니메이션 <증기선 윌리>에 영향을 받아, 1932년 일본 최초의 토키 애니메이션인 <힘과 여자의 세상>을 발표했다. 이 작품은 원시적이던 일본 애니메이션의 수준을 한 단계 발전시켰을 분만 아니라, 소리를 사용함으로써 본격적인 현대 애니메이션의 문을 열게 되었다. 그리고 마사오카의 스텝으로 일하던 세오 미츠요는 1943년 일본 최초의 장편 애니메이션 <모모타로의 바다갈매기>를 제작했다. 이런 애니메이션의 역사 속에서, 일본에서는 중요한 2세대들이 성장하였다.
20세기 후반의 일본 애니메이션, 재패니메이션이 되다.
재패니메이션의 선두주자, 데츠카 오사무는 2차대전 무렵 극장에서 모모타로 시리즈를 보던 10대였다. 그리고 전쟁 무렵부터 그 직후까지 일본 내 상영이 금지되었던 미국 애니메이션들이 데츠카 오사무의 20대 시절에 풀리면서, <밤비>와 <피노키오>등 40년대 더욱 발전된 디즈니 작품들이 상영되었고, 데츠카 오사무를 비롯한 일본의 애니메이션 업계가 이 영향을 입었다. ‘일본의 디즈니’를 꿈꾸며 1956년 토에이 동화가 설립되어 장편 애니메이션을 정기적으로 제작하는 한편, 데츠카 오사무도 61년 프로덕션을 설립, 초당 프레임 수를 현저하게 줄이는 리미티드 기법을 실험했다. 1943년 미국에서 개발된 리미티드 기법은 1963년 <철완 아톰>을 통해 전세계에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TV 애니메이션의 주요 기법이 되었다. ‘로보트’의 의미조차 대중들에게 불분명하던 1960년대 초반, 인간과 같이 사고하고 감정을 느끼는 ‘아톰’은 애니메이션의 혁명적인 소재였으며, 데츠카 오사무가 만든 이 일본 최초의 TV 애니메이션은 이후 ‘재패니메이션’의 창조적 세계관의 토대가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가치는 전세계에서 흥행에 성공함으로써, 애니메이션과 TV를 연계한 ‘재패니메이션’ 시장 확대에 초석을 쌓아 올렸다는 것이다. 그리고 일본 애니메이션은 독자적인 스타일과 캐릭터, 세계관을 확립하며 급성장을 이룩했다. 1968년 토에이 동화에서 일하던 다카하타 이사오와 미야자키 하야오에 의해 <태양 왕자 홀스의 대모험>이 만들어지고, 이후 그들이 세운 지브리 스튜디오의 모든 작품은 미국의 디즈니가 배급을 맡겠다고 나섰을 만큼 세계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다. 7-80년대 TV를 통해 우리나라에서 국적불명으로 보았던 숱한 작품들이 대부분 재패니메이션이었고, 지금도 전세계 TV에선 <란마1/2>과 <피카추>, <드래곤볼> 등이 방영되고 있으며, <공각기동대>의 오시이 마모루 감독은 그 후편 격인 <이노센스>로 올해 깐느 국제 영화제 경쟁 부문에 진출하였다.
일본 애니메이션, 재패니메이션.
상업성과 작품성의 경계를 교묘히 운용하며 기술력을 과시, 세계 시장을 점유하고 있는 일본 제 9의 예술 산업은 100년 가까이 된 애니메이션 역사를, 아니 카츠시카 호쿠사이로부터 출발한 일본 만화 200년의 역사를 아우르는 결과물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의 애니메이션이 난공불락의 절대 지존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이들이 좇고 흉내 내던 미국과 서구의 애니메이션이 데츠카 오사무 이후 재패니메이션을 보고 자란 세대들에 의해 완전히 역전된 것처럼, 지금 세대, 그리고 그 다음 세대를 염두에 둔 애니메이션 예술가들에 의해 또다시 바뀌게 될 것이다. 다만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오늘날의 재패니메이션이 있기까지, 지난 세월 동안 토대를 마련하고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은 일본 애니메이션의 선구자와 1세대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마침 그 재패니메이션의 뿌리를 직접 눈으로 확인해 볼 수 있는 ‘일본 애니메이션의 원류 특별전’이 오는 부천 국제 판타스틱 영화제에서 개최된다. 1917년부터 2차 대전 직후까지의 작품 53편이 소개되는 이 자리에서, 제대로 된 열매가 열리기 위해선 뿌리와 가지가 튼튼해야 한다는 당연한 이치를 다시 한번 확인해 보도록 하자.

